회사는 그에게 퇴사하는 날을 공고했다. 그는 아무렇지 않는 듯 신경도 쓰지 않는 듯했다. 마치 그날이 빨리 오길 바라는 것 같았다. 태서는 궁금했지만 물어볼 수 없었다. 같은 시기에 들어온 같은 계약직이었다. 태서가 조금 더 빨리, 그리고 이후에 거의 바로 그가 계약직으로 들어왔다.
태서는 시간이 지나며 그가 더 좋은 평가를 받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태서는 초조했지만 달리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다. 정규직은 이번 계약직 두 명중 한 명만 될 거란 무성한 소문도 알고 있었다. 어떤 직원들은 정규직 한 자리를 두고 둘 중에 누가 될 지에 대한 내기도 하는 것도 알고 있었다.
시간은 금방 흘렀고, 그가 퇴사하는 날이 되었다. 계약직이면 계약을 다 채워야 될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었다는 것을 알았다. 태서는 언젠가 지금처럼 그의 여유로운 표정을 본 적이 있었다. 그게 그가 가진 장점이라 생각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변하지 않는 저 여유로운 표정에 샘을 느끼기도 했다. 그렇지만 왠지 그가 더 좋은 곳을 갈 수 있을 것 같아서 일련의 죄책감도 덜 수 있었다.
그는 출근 한지 얼마 되지 않아 사무실을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태서를 비롯한 사무실의 모든 사람들은 그를 쳐다보며 그가 하는 행동을 볼 수밖에 없었다. 그의 행동에 사람들은 지금의 상황을 머릿속에 입력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에게 무례하다 해야 할까 아니면 당연한 권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해야 할까, 물론 말을 하진 못하고 있었지만 태서는 복잡했다. 점심시간이 되자 모두 그가 정규직이 되기 전에 그만둘 것 같았다와 그만둘지 몰랐다는 서로의 예측해 왔던 결과를 말하곤 했다. 하지만 태서는 그에게 관둘 것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것에 대한 이유는 말하지 않았다. 태서는 그에게 미안한 감정과 고마운 감정을 동시에 느꼈다. 정규직은 한 명만 될 수 있었고, 만약 그가 계속해서 회사를 다녔다면 태서보다는 그가 정규직이 될 가능성이 더 컸을 것이란 걸 태서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계약종료가 되는 해가 시작될 때부터 정규직 전환을 생각하기보다는 새로운 진로를 찾아야 하는 게 태서한테는 현실적인 일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태서가 계약직으로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에 사장이 사람 키 만한 식물을 가지고 온 적이 있었다. 사장은 태서씨가 식물을 관리했으면 좋겠다는 말을 했다. 태서는 덜컥 알겠다고 했다. 업무 외의 일이 생긴 것이다. 근무 중에도 식물의 이름을 찾지 못해서 퇴근 중에도 검색을 하여 겨우 식물종류를 알 수 있었다. 매일 물을 줄 필요 없는 식물이었다. 그러나 실내에서는 습도나 직광이 부족해 자주 갈색으로 변색되는 식물이라고 하니 관리가 어려운 식물이라고 했다. 이런 식물을 선물한 사람도, 그리고 사무실에서 잘 관리하라는 사장도 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다만, 식물을 관리하는 그 시간 동안은 업무에서 조금이나마 쉴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시간이 지나며 식물은 잎이 갈라지고 갈색으로 변색되는 부위가 많아졌고 그래서 시든 부분을 가지치기해야 했다. 태서는 그럴 때마다 스트레스를 받았다. 시간이 더 흘러 식물은 첫날과 크게 차이 날 정도로 얄팍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초췌해져 있었다. 병들고 시든 부분을 가지치기하고 필요한 부분만 남긴 것과 같아 보였다.
태서는 그가 떠나고 나서야 적어 놓았던 메모가 눈에 들어왔다.
매주 화요일에 물 주기
그가 떠난 오늘은 화요일이었다. 태서는 오늘만큼은 물을 주고 싶지 않은 기분이 들었다.
죽든지 말든지
그가 떠나고 나서 회사는 정규직 발표예정 공고를 했다. 다음 달 1일이었고 약 2주 후였다. 2주간 사람들의 관심사는 자연스럽게 그에서 태서가 될 것이다. 태서는 정규직이란 말이 언급될 때마다 주목되는 시선이 느껴졌다.
태서는 통장 잔고와 월급을 보며 다음 달부터 정규직이 되면 오를 월급을 생각했다. 얼마나 오를지도 기대되었다. 다음 달 1일이면 1년이 되고 또한 정규직이 되면 주택대출도 받을 거라 생각하니 다음 이사할 때의 집을 자연스럽게 떠올렸다. 또한 정규직이 되면 했던 것과 해왔던 것들보다 더 할 수 있는 것들의 목록을 추가해 나가기로 했다. 태서는 목록을 하나씩 늘리며 더 할 수 있는 것들을 적어나갔다. 그리고 목록의 마지막즈음에서야 가지고 싶었던 브랜드의 가방과 신발을 적을 수 있었다. 그리고 어떻게든 주택대출을 받아서 이사도 가고 싶어졌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지만 요즘 친구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주식도 할 수 있어지는 만큼 충분한 희망 월급을 리스트 제일 위에 적고 동그라미와 HOPE를 크게 적었다.
태서 씨 이런 말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암튼 다행이야. 이번에 정규직 말이야.
발표 예정 공고가 나자 사무실의 사람들은 태서에게 안심의 인사를 건넸다. 태서 역시 빨리 다음 달 1일이 되길 바랬다. 월급이 생기는 것은 기분 좋았지만 이런 식으로 주목받는 것은 최대한 빨리 끝내고 싶었다. 그리고 최대한 그가 생각나지 않을 만큼 시간이 지나길 바랐다.
혹시 정규직이 안 된 사례도 있을까요? 제가 원래 최악의 경우도 이렇게 생각이 들어서요.
딱 한번
딱 한번 그런 적이 있었다고 했다. 그 이유는 그럴만했다는 것이었다. 지각도 많았고, 업무도 잘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태서는 다행이라 생각했다. 태서는 단 한 번의 지각도 없었고, 업무는 그와 비교해서였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마지막에 말 한 단 한 가지가 걸렸다.
사장이 좀 사이코야. 계약직마다 업무 외의 것을 줘. 그게 평가에도 반영된다고는 하더라. 태서 씨에겐 식물관리를 준 것 같은데 그 사람에겐 뭘 줬는지 알 수가 없단 말이지. 아 참.. 이거 내가 말했다고는 하지 마. 태서씨니까 이제라도 말하는 거야.
태서는 오늘 식물에 물을 주지 않은 것을 그제야 떠올렸다. 태서는 사무실에 오자마자 식물에 물을 주기 위해 물을 담았다. 태서는 사장도 사장이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동안 왜 이런 걸 말하지 않은 것도 마음에 걸렸다.
태서 씨 식물 관리 잘하고 있지?
사장이었다. 원래도 굳은 인상이 오늘따라 더 굳어 보였다. 태서는 사장이더 미워보였다.
오늘 보니까 식물이 많이 죽어 있던데, 태서 씨 물을 얼마나 안 주길래 그런 거야? 팍팍 줘야 식물이 살지. 줘 봐. 내가 물 좀 주게.
태서는 순간 고민이 들었다. 물을 주고 안 주고가 아니라 이 식물은 직광이 필요하다고, 사무실 습도는 살아남지 못한다고, 물을 많이 주면 오히려 죽는다고 말이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장은 태서가 들고 있는 물병을 자연스럽게 건네받아 자신을 따라오라는 제스처를 했다. 태서는 말없이 따라갔다.
물을 듬뿍 줘야지 태서 씨, 이거 물 주고 좀 부족한 것 같으니 한 번 더 줘. 알았지?
물을 적게 주는 것 같아서 식물이 죽는 것 같단 말이야. 앞으론 줄 때마다 그렇게 해.
지금보다 더 많이 물을 준다면 틀림없이 원래 시들어가는 속도보다 더 빨리 시들 것이란 것을 태서는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사장이 직접 시킨 게 아닌가. 지금처럼 주면 되는 것이라고.
혹시나 태서는 자신이 틀린 방법으로 식물을 관리한 것일지 모른다며, 사장의 말대로 평소 주었던 물보다 2배 더 물을 화분에 부었다.
퇴근시간이 되자 사장은 자기 말대로 한번 더 물을 더 줬는지 한 번더 태서에게 물었다. 태서는 물을 줬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자기 말대로 하니 식물 잎이 더 건강해 보이지 않냐면서 최면에 취한 말을 태서에게 건넸다. 태서 역시 잎이 평소보단 건강해 보였다. 죽어가던 식물이 사장의 관심을 갑자기 받아서 살아남는 것처럼 태서 역시 그러길 바랬다.
태서는 메모해 놓은 리스트를 보며, 그리고 상단의 월급을, 그리고 동그라미와 HOPE를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