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이 아닌 서로가 색을 결정할 때
지난 주말, 박물관에서 일하시는 분과 대화를 나누다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다. 백자 특별전을 할 때는 색감이 마음에 들었는데, 청자 특별전은 그만큼의 만족을 하지 못했다는 것. 재미있는 건 두 전시는 동일한 조명을 썼다는 것이다.
우선 큰 박물관은 보통 매우 좋은 조명을 쓴다. 가격은 우리가 예상하는 금액 뒤에 가볍게 0이 하나 더 붙을 정도다. 그만큼 연색성과 배광, 안정성 등에 특화된 고급 조명이다. 이 좋은 조명으로 동일하게 비추었는데 왜 백자는 좋고 청자는 아쉬웠을까?
시각정보를 인지하는 우리의 뇌는 기본적으로 화이트밸런스 기능이 갖춰져 있다. 색온도가 다양해도 색을 인지하는데 문제가 없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전구색에서도, 주광색에서도 흰색은 흰카지노 쿠폰 인지한다. 스마트폰 카메라도 동일한 기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비교군이 필요하다. 고정된 색을 인지할만한 주변 정보들 말이다. 시야 내에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이라던지, 시야 내 전반의 색감, 내가 흰색이라고 인지하는 물체, 식물, 사람피부, 재질 등을 보고 지금의 색온도를 파악하고 이를 고려하여 색상을 인지한다.
하지만 주변 정보가 너무 적으면 우리 뇌는 혼란을 겪는다. 기준점이 된 색을 인지하지 못해 사물의 색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게 된다. 우리는 이 경험을 전지구적으로 한 번 한 적이 있다. 바로 논란의 파검/흰금 드레스 사건(?)이다. 주변의 정보가 조금이라도 더 있었다면 우리 뇌는 드레스색을 헷갈려 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백자는 거의 모든 스펙트럼을 반사하기에 단일 소재만 모여 있어도 색을 파악하는데 무리가 없다. 하지만 청자는 다르다. 청자의 깊고 오묘한 빛깔은 박물관처럼 주변 환경이 차단된 상태에서 단일 소재만으로 파악이 어렵다. 높은 연색성의 같은 조명이라도, 세밀한 색을 느끼기 어려운 이유다.
이는 카메라로 찍은 사진에서도 비슷하게 드러난다. 스마트폰 카메라는 화면이 켜지면 열심히 화이트밸런스부터 찾는다. 앵글 전반의 색감을 분석해 색온도를 파악한 후, 이를 보정하여 촬영하도록 돕는다.
그런데 청자사진은 카메라의 화이트밸런스 작업도 쉽지 않게 만든다. 특히 그 오묘한 청빛은 조명의 색온도에 의해 만들어진 것인지 고유한 색감인지 판단하기가 특히 더 어려울 것이다. 그렇게 눈도 카메라도 색감을 파악하는데 어려움을 겪는다.
사람도 크게 다르지 않다. 비슷한 환경과 성격과 문화의 사람들 사이에서만 있으면 나를 제대로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겪기 쉽다. 편협함을 버리고 익숙한 곳에서 떠나 새로운 환경과 사람 사이에 들어갔을 때, 비로소 우리는 내가 있던 환경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나를 발견하게 되는 경험을 할 수 있다. 우리에게 다양성이 필요한 중요한 이유다.
청자는 백자 옆에서, 백자는 청자 옆에서 더욱 자신만의 카지노 쿠폰 빛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