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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경 Feb 10. 2025

타인은 온라인 카지노 게임

아들이 감기에 걸린 것 같다.


예전에는 이런 지령서를 받으면 이맛살부터 찌푸렸다. 감기에 걸려서 뭐 어쩌라고. 그게 구급차를 부를 이유가 되는가? 구시렁댔지만 짬밥이 찬 뒤로는 좀 달라졌다. 염치없어 뵈는 지령에는 보통 이유가 있었다.


고등학생 아들을 엄마가 돌보고 있었다. 아들은 침대에 누워 움직이지 못했다. 의사소통도 눈을 깜빡이거나 으으, 소리를 내는 게 다였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 뇌출혈이 왔다고 했다. 뇌정동맥기형(동맥이 모세혈관을 거치지 않고 바로 정맥으로 연결되는 혈관 기형)이었다. 아들은 겨우 움직이는 두 손을 맞잡고 아랫배를 계속 내리쳤다. 그 모습이 꼭 마네키네코 같았다. 환영인지 거부인지 의미 불명의 손짓을 반복하는 마네키네코. 아들을 들것에 실었다. 키만 비죽 크고 몸에 근육이 없어서 쉽게 들렸다.


가혹한 운명이 차선을 넘어 그들의 작고 소중한 일상과 정면추돌한 까닭이 뭘까. 졸음운전이라도 했을까. 신이 제정신이 아니라서 재미 삼아 그런 사고를 마련했을까. 알 수 없다. 거기에 어떤 의미가 있다고 여기는 건 과하게 희망적이고 아무 의미 없다고 여기는 건 과하게 절망적이다. 운명의 교통사고를 마주한 그들에겐 의미부여를 멈추고 터진 바퀴로 갓길을 따라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일이 최선일지도 모른다.


나는 내 나라를 사랑하지만 타인이 당한 사고에 대해 ‘참 안 되었다’ 이상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 분위기가 부끄럽다. 남의 사고를 수습하기 위해 내가 낸 세금을 쓰는 게 아깝다고 말하는 것도 부끄럽다. 20대에 1억을 모으고 30대엔 10억을 모으는 방법론은 널리고 널렸는데 백만 원을 들여 타인의 짐을 덜어주는 행위의 가이드라인은 눈 씻고 찾아도 없다. 타인은 온라인 카지노 게임. 이따금 속절없이 그렇게 느낀다.


두 시간 뒤면 출근이다. 오늘은 또 얼마나 무거운 운명이 얼마나 가벼운 존재에게 짐 지워져 있을까. 열심히 한다고 돈을 더 버는 건 아니지만 열심히 해야겠다. 친절하다고 누가 상을 주는 건 아니지만 친절해야겠다. 더럽고 약하고 슬픈 이들에게 기꺼이 손을 내밀어야겠다. 그러면 세상이 조금 가벼워질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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