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에 있어서의 백신 이야기
이렇다 할 치료제나 백신이 없던 고대 역병과 전쟁이 가져다준 ‘재난 스트레스’는 현대인들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고통받고 있는 수준 이상이었을 것이다. 그러다보니 재난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정화해줄 장치가 필수적이었다. 그게 바로 ‘극장’이다.
방황하는 욕망과 치밀어오르는 분노, 죽어가는 사람들에 대한 연민, 자기도 죽을지 모른다는 공포에 짓눌린 사람들은 극장, 그리고 그 극장에서 이뤄지는 희극과 비극을 통해 위로를 받고, 웃을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기원전 419년경 그리스 아크로폴리스 언덕에 의술의 신인 ‘아스클레피오스’의 신전과 대형 야외극장인 디오니소스 극장이 나란히 있는 건 우연이 아니다. 아스클레피오스 신전은 자연 질병으로서 역병을 의학적으로 치료하는 곳이지만, 디오니소스 극장은 사회 질병으로서 역병이 낫고 퍼뜨려 놓은 공포와 연민, 불안과 불만을 해소하고 정화해주는 치료 공간이었다.
당시 사람들이 역병을 자연 질병과 사회 질병으로 바라봤다. 특히 사회 질병으로서 역병이 남긴 사회적 후유증을 치유하기 위해 감정 정화 및 사회적 성숙 교육 프로그램 일환으로 디오니소스 극장을 증축하고 희극과 비극을 경연하는 축제를 제공했다. 디오니소스 극장은 역병의 격리소 역할을 하던 아스클레피오스 신전에서 치료를 받던 환자들에게 즐거움과 위안을 주는 역할도 했다.
유럽뿐만 아니라 한국도 비슷했다. 역병이 창궐하는 여름이 오기 전 역병을 옮기는 귀신인 ‘역귀’를 쫓은 공연 형식의 의식을 통해 한 해 건강과 안녕을 기원했다. 역귀는 전염병과 같이 사회에 혼란을 가져오는 나쁜 기운을 상징해 국가의 안정을 위해 반드시 막아야 하는 존재였다. 그러한 의식은 ‘나례(儺禮)’라고 불렸는데, 연중 누적된 모든 재앙과 병마의 근원인 잡귀를 쫓아내고 새해의 복을 맞으려는 제화 초복 의식이었다.
민간에서도 궁중 풍습의 영향으로 부엌이나 마구간 등 집안의 정(淨·깨끗)하지 못한 곳을 치운 후 그믐날 밤 마당에 불을 피우고 폭죽을 터트렸다. 깨끗한 상태에서 새해를 맞으려는 축제 형식의 풍습이다. ‘고려사’(1451년에 쓰인 고려 시대 역사서)에 따르면 해당 풍습은 1040년에 행해졌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전래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풍습은 조선 중기 이후 점차 연극적 성격을 강하게 띠게 된다. 원래 축귀 의식이었던 나례는 창우나 광대, 심지어는 무당들까지 동원하는 놀이로 그 성격이 완전히 바뀐다. 왕의 행차나 신임 감사의 영접, 또는 칙사의 대접 등에 동원됐다. 심지어 공연 오락물의 성격인 궁중 연희로도 거행됐고, 이는 큰 탈을 쓰고 춤을 추는 ‘처용무’로 현재까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이처럼 병원 등의 ‘의료적 처방’만큼이나 예술을 통한 ‘사회적 처방’이 중요하다. 하지만 코로나19로 인해 문화시설이 일제히 휴관하고 공연, 축제, 전시 등이 줄줄이 취소됐다. 예술계는 현재 고사위기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과거 사례를 통해 배울 수 있듯이 동서양을 막론하고 전쟁과 역병 등으로 해체된 지역사회를 재건하고 건강한 시민 공동체로 성숙시키기 위해 백신 ‘치료제’만큼이나 문화카지노 게임의 역할이 중요하다. 건강한 사회를 위한 ‘치유제’이기 때문이다.
전통예술 디렉터 조인선
●전통예술 디렉터 조인선
한국예술종합학교 아쟁 전공. 국내 최초 전통예술플랫폼 (주)모던한(Modern 韓)을 운영하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 공식 자문위원이며, 예술경영지원센터 편집위원과 한국관광공사 코리아 유니크베뉴 심사위원을역임했다. 케이콘 2016 프랑스 전시 기획, 한국-인도 수교 50주년 기념 공연 기획 등 다양한 한국 전통예술 우수성을 현대적으로 재해석, 글로벌 시장에 알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