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하다 만난 사람들은 서로 인사한다. 가볍게 건네는 ‘안녕하세요’라는 말에는 산을 오르는 힘든 일을 공유하는 사람이라는, 실제적인 동반자가 아니지만, 똑같은 목표를 공유하는 상징적인 동반자로 여긴다는 마음이 담겨 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삶에서, 그런 ‘동반자 의식’은 가능한가? 서로를 마주하며 격려하지만, 마음속으로는 ‘그래도 내가 먼저’라는 생각을 품지는 않을까? “요즘 어떻게 지내? 공부(준비)는 잘 되니?” “이번 시험은 어땠어?”라는 질문을 쏟아내는 동안, 모순된 안도를 느끼지는 않는가를 자문한다.
불안에 떠는 사람은 누구나 비슷하다. 나는 올해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했는데, 다른 사람은 성과를 냈다고 생각하면 뒤처지는 듯한 기분에 불안해지고 초조해진다. 나와 동급자든, 나보다 상급자든 상관없이, 누군가는 무언가를 해내고 있는데, 나는 아무것도 해내지 못했다는 그 사실에서 비롯하는 감정이다.
이런 생각을 품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면, ‘나는 더불어 사는 일에 익숙지 않은 사람이 분명하구나’ 생각한다. 그 이유를 ‘골방에 틀어박혀’ 살아간 탓으로 돌리지만, 그건 정당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다시 묻게 된다. 자신의 길을 가기로 한 사람은 반드시 외로운 것인가? 혹은 카지노 게임 사이트을 선택해야 하는가?
SNS에서 보이는 ‘부자’들의 조언에는 에디슨의 경쟁자 이름으로 사업하는 사람이나, 한 입 베어 먹은 사과를 남기고 세상을 떠난 사람이나, 문란한 소개팅 앱으로 (여전히 문란하게) 거대한 성공을 거둔 사람은 모두 외로웠다고 말한다. 친구들과 만나서 희희낙락 시간을 보냈더라면(‘W.L.B.’를 추구했다면), 그들은 성공할 수 없었을 거라고 말한다.
이 말에는 두 가지 쟁점이 있다. 하나는, 성공하기 위해서는 외로워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많은 사람과 함께 가는 길은 성공할 수 있는 길이 아니라는 것이다.
첫 번째는 까다로운 문제니, 두 번째부터 보도록 하자.
많은 사람과 함께 간다는 건 최소한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하나는 동반자가 있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경쟁자가 많은 길이다. 앞서 거대한 성공을 거둔 인물을 언급하며 카지노 게임 사이트을 강조하는 이는 아마 전자의 부정성을 강조하고 있는 듯싶다.
동반자라는 핑계로 서로를 챙기며 나아가는 일은 대단히 소모적이라는 생각이 있는 것 같다. 힘들어하는 동료를 앉혀서 다독이고, 충분히 울고 공감한 후 다시 일어나 길을 걸어가는 과정. 그 과정에서 우리는 더 많은 욕심을 바라기보다는 지금 상황에 안주하는 경향을 나타낼 수 있기 때문이겠다.
이른바 남성적인 사고방식의 결과물로 보인다. 극한의 상황에서, ‘누군가가 나를 도와줄 것이라는 생각’은 스스로 나약해지리라 결심카지노 게임 사이트 것 같다고 생각하는 게 부지기수이기 때문이다. 누구도 도와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 혹은 누구도 나를 도와줄 수 없다고 믿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삶의 주체로서 힘을 갖도록 만든다는 믿음이 이 세상에 가득하다.
그러므로, 나약해지지 않고, 내 삶의 주체가 되기로 한 사람은 누구와도 삶을 나누지 않는다. 진심으로 생일을 축하하지 않고(SNS에 올릴 사진 한 장이면 족하다), 다시 웃기까지 필요한 시간이 아깝기에 진심으로 울지 못하며, 우는 친구를 다독이느라 멈추었다가는 관성을 잃을까 봐 걱정한다. 그렇기에, 혼자가 낫다고 믿는다.
또한 우리는 그들 중에 참된 리더(지도자/우두머리)가 많다고 생각한다. 참된 리더는 뒤에서 전진할 방향을 알려주는 존재가 아니라, 함께 짊어지고 이끌어가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찰나에만 집중하며 참된 리더에 관한 개념 규정을 한 게 아닌가 싶다. 진짜 리더는 멤버를 버리지 않는다. 생환하지 못한다면, 시신이라도 반드시 데리고 귀환하는 존재가 우리가 기대하는 리더의 모습이다.
전장도 아닌 삶의 현장에서도 이러한 리더의 모습은 기대하기 힘들고, 실제로 찾아보기도 쉽지 않다. 다치거나 힘이 달리는 존재를 타일러서 데리고 가는 리더는 별로 없다. 일론 머스크·저커버그·스티브 잡스·빌 게이츠가 자신의 목표를 향해 함께 하던 누군가가 더 이상 자신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게 됐을 때, 내치지 않고 그 자리에 앉혀 두었을까? 증명하기 힘든 일이다. 또 다른 역할을 주거나, 같은 일을 하더라도 적은 힘만 쓰도록 용인하면서까지 함께 나아갈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이제 조금 더 까다로운 첫 번째로 돌아와 보자. 생각해 보면, 솔직히 말해서, 앞에서 많은 이에게 내세운 우상(?)들은 모두 ‘부자’다. 그들이 홀로 걸어갔다고 말하는 길은 ‘자본주의적 성공의 길’이고, 그 길에서 동료는 필요 없거나, 존재할 수도 없다. 쉽게 말해, 자신의 꿈이라는 게 자본주의가 인정하는 부의 생성과 유지라면, 그 꿈을 향해서는 동반자가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다.
이는 결혼과 같은 문제로도 연결된다. 결혼은 자본주의적 성취를 추구하는 과정에서는 중요하지 않은 문제처럼 보인다. 희생을 강요하고, 배려를 의무화하며, 경제적인 이익을 나누고 공유해야 하기 때문이다. 결혼 후에도 경제적 독립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부부가 없지 않으나, 그것이 얼마나 만족스럽게 유지될지는 장담하기 힘들다.
‘부모-자녀’, ‘선생-학생’의 관계도 비슷하다. 부모나 선생은 꿈을 포기하고 현실에 적응하라고 하고, 자녀나 학생은 자신만의 길을 가겠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이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가 모두 ‘부(富)’라면, 그건 어떤 자동차를 타고 서울까지 가겠느냐를 선택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 속도 차이가 있을 뿐, 승차감의 차이가 있을 뿐 결국 도달하는 곳은 같으니까 말이다. 서로를 조롱하고 비난하는 세대 갈등의 양상도 결국 ‘분배’의 문제에서 비롯하는 것임을 볼 때, 그들의 욕망은 같은 곳을 향하고 있다는 걸 생각한다. 가는 길이 달랐다면, 그리고 각자의 길이 저마다의 성공을 보장한다면, 조롱과 비난이 필요할까? (이는 모든 ‘기존:신생’의 관계에서 벌어지는 상황에도 비슷하게 대입해 볼 수 있다.)
나 같은 ‘꼰대’가 으레 생각하듯이, ‘꿈’이란 ‘내가 어떠한 상황에서도 오롯이 사랑카지노 게임 사이트 일’이라고 한다면, 그 일로써반드시 막대한 부를 축적하기위해스스로 고립시킬 필요는 없을 듯하다. 오히려 진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한다면, 주변 사람과 행복한 웃음으로 시간을 채울 가능성이 더 클 듯싶다. 내가 사랑카지노 게임 사이트 일, 그 꿈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놓을 수 없는 일이고 즐거울 만큼이면 충분한 일이니, 누군가와의 관계 속에서 소중한 시간을 ‘허비’한다고 생각할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는 너무 많은 자립성을 강조하고 있다. 모든 부분에서 독립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게 인생일까? 우리는 결코 혼자서 살아갈 수 없는데, 그것을 알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왜, 우리는 ‘카지노 게임 사이트’을 전제로 ‘성장’이 가능하다고 말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