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냇가에 심은 나무에게서 다시 배운 '형통'
시편 1편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카지노 게임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카지노 게임 겨와 같도다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무릇 의인들의 길은 카지노 게임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개역개정)
어려서부터 수없이 읽고 외우던 시편이다. 성서의 모든 가르침을 담고 있는 지표라 믿었기에 온 맘 다해 사랑했다. 그랬기에 카지노 게임자와 함께 사는 동안 더욱 미워하게 된 시편이기도 했다. “이 말씀은 정말 참인가요, 주님?”이라고 가장 많이 물었으니까.
나는 ‘기복신앙’을 몸서리치게 경계했다. 시편 1편을 읽을 때조차도 '형통하리로다’를 빼고 나머지 구절들만 내 고백으로 삼겠다 했다. 형통 없이도 만족하며 신앙을 지키고 싶었다. 다만 여호와의 율법을 사랑하며 삶의 계절을 따라 열매 맺고 싶었다. 푸르고 무성한 잎을 드리운 ’복 있는 사람’이기를 원했다.
그러나, 나는 틀렸다. 악인들은 겨처럼 흩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거세게 나를 짓눌렀다. 카지노 게임자는 언제나 입버릇처럼 ’내가 너보다 하나님을 더 잘 안다, 내가 너보다 더 거룩하다’ 했다. 하나님의 심판대에 달린 저울추로 나를 수시로 후려쳤다. 어디 그뿐인가. 카지노 게임자를 돕는 이들도 많았다. 이중적인 모습은 인간의 연약함이라고, 폭력은 네가 부덕하기 때문이라며, 언제나 카지노 게임자를 보호했다.
그러는 사이 내가 사랑하던 시편 1편의 말씀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날아가버렸다. 카지노 게임를 견디지 못해 망해가는 것은 나였다. '의인의 길과 악인의 길‘을 가르치는 시편 말씀은 더 이상 내 고백일 수 없었다.
배신감과 무력감에 찌든 마음으로 시편 1편을 읽기 시작했다.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않음.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않음.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음.
악인과 죄인과 오만한 자는 사실 하나리라. 카지노 게임를 신뢰하는 겸손 대신, 자신을 신뢰하는 오만한 자가 곧 죄인이요 악인이니. 복 있는 자는 그들의 '꾀'를 따르지도 않고, 그들의 '길'에 서지도 않는다. 삶의 양식으로 고착되어 버린 그들의 '자리'에는 더더욱 앉지 않는다.
‘근본적인 삶의 양식'을 다시 물었다. 나의 길은, 나의 자리는 어디에 있는지 다시 바라보았다.
“카지노 게임 힘든 건 참아도, 의미 없는 삶은 참을 수 없어."
6년 전, 내가 카지노 게임자에게 했던 말이다. 그는 늘 성경책을 들고 있었고, 하나님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 그러나 그의 길은 폭력과 거짓뿐이었다. 나는 그의 길을 막고 싶었고, 그의 행위를 멈추고 싶었다. 한 발짝도 더 함께 내딛기 힘든 고통의 길 한복판에서 내뱉은 간곡한 부탁이었다. “제발 돌이켜라. 나는 이렇게 살 수 없다.” 악인의 꾀를 멈추라 했다, 죄인의 길에서 돌이키자 했고,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는 앉지 말자 했다. 소용없었다. 더 거센 비난만 날아올 뿐이었다.
그렇게 나는, '결혼'이라는 무거운 멍에에 얽매여 카지노 게임자의 ’꾀’가 이끄는 곳으로 동행해야 했다. 주께서 묶으신 한 몸이라는 생각에 카지노 게임자의 ’길‘에서 갈라설 수 없었다. 오래도록 이어진 카지노 게임자의 역기능적이고 고착된 삶의 ‘자리’에 나도 함께 주저앉은 기분이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아니, 내 의지와 정반대로. 나를 가장 괴롭히던 현실이었다.
"너는, 악인들의 꾀를 '멈추는 자'
죄인들의 길을 '돌이키는 자'
오만한 자들의 자리를 '파하는 자'가 아니다."
다시 펼쳐든 시편 1편을 통해 들은 첫 음성이었다.
그 꾀를 멈추게 하거나 그 길을 돌이키게 하려 하지 말아라. '피해 가거라.' 너는 너의 길을 가거라. 다만 나를 즐거워하여라. 너는, 내 율법을 곱씹고 또 곱씹어 소화하여라. 너는, 나라는 시냇가에 깊이 뿌리내려라. 그러면, 네 잎사귀가 마르지 않을 것이다. 철을 따라 열매를 맺을 것이다. 너의 형통은 그저 나와 친밀하게 지낸 결과로 드러날 것이다.
"He is like a tree planted beside streams of water, which yields its fruit in season, whose foliage never fades, and whatever it produces thrives." (시 1:3 JPS Tanakh)
"그 나무가 맺는 열매는 무엇이든 thrive 할 것이요"라는 JPS(Jewish Publication Society)의 번역본을 읽다가 'thrive'라는 단어가 마음에 와서 꽂혔다. 'survive and thrive' 얼마나 간절히 붙들던 문구였나. 죽음의 골짜기 같은 카지노 게임자와의 결혼 생활에서 '생존'하고 싶었다. 그저 생존하느라 버거운 삶에서 그치지 않고 '뚫고 나아가는 자라감'에 이르기 원했다. '형통'이 thrival' 이라니. 어릴 적 거룩한 치기에 내다 던진 '형통'을 다시 붙잡고 싶어졌다.
"무릇 의인들의 길은 카지노 게임께서 인정하시나..." (시 1:6 개역개정)
이 구절은 다시 펼쳐든 시편 1편에서 내가 들은 두 번째 음성이었다.
“내가 너를 안다."
"For the Lord cherishes the way of the righteous..." (시 1:6 a JPS Tanakh)
’인정하시나’의 히브리 원어는 ‘매우 친밀하고 가깝게 알다(야다)‘이다. 연인들이 육체적 결합을 통해 서로를 ’알듯’ 그렇게 주께서 나를 ‘아신다’라는 뜻이다. JPS는 이를 cherish라고 번역하고 있었다. 그저 '앎'이 아니라 '소중히 여기는 앎' '귀하고 가깝게 여기는 앎'이라는 그 단어가 한 번 더 마음을 어루만졌다.
헝클어진 마음과 육신으로 사나운 짐승처럼 울부짖던 나에게 카지노 게임 말씀은 이렇게 속삭였다:
"내가 너의 길을 안다. 내가 너를 안다. “
“네가 원하는 복 있는 자의 삶에 어울리지 않는 길은 피해가도 된다. 카지노 게임 네가 그러기를 원한다.”
너는 나에게 뿌리내려라. 형통은 만사에 번영하는 기적이 아니다. 형통은 나와 함께 걸어가는 길에서 피어난다. 카지노 게임의 어둠 속에서도 너는 자랄 것이다. 마침내 풍성한 잎사귀를 드리우고 쉼이 될 것이다. 생명의 씨앗이 겨울 동안 언 땅을 뚫고 나와 움을 틔우듯, 꽁꽁 얼어버린 것 같은 네 삶에도 내가 ‘뚫고 나아가는 형통‘이 되어줄 것이다.
"내가 너를 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의 길을 따르기 원하는, 그 자리에 뿌리내리고 싶은 네 마음을 안다."
그걸로 충분했다. 악인을 멈출 수도 없고, 그들에게 임하는 심판을 목도할 수도 없다고. 이 어찌 된 일이냐며 피투성이가 되어 찢긴 들짐승처럼 울부짖던 내 마음이 잔잔해졌다. 카지노 게임자를 그의 길에서 돌이켜, 어떻게든 한 마음으로 같은 길을 걸어가 보겠다며 피투성이가 되도록 붙잡고 씨름하던 밧줄을 놓았다. 그리고, 다시 돌아가기로 했다.
주께서 나를 아신다.
카지노 게임 몰랐다. 그러나 주께서는 나를 아셨다.
카지노 게임 떠밀렸고, 흔들렸고, 부서졌지만,
주께서는 나를 한 번도 놓지 않으셨다.
주께서 나의 형통이 되어 주신다.
망해간다 믿었던 내 삶은 막다른 골목이 아니었다.
주께서는 내가 카지노 게임라는 차가운 어둠을 뚫고 나아가
마침내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자라게 하실 것이다.
그렇게 카지노 게임, '복 있는 자'의 자리로 돌아왔다.
나의 길을 아시는 카지노 게임 시냇가로, 그분의 '형통'안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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