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어떡해?: 시편 37편 (3)
악인이 칼을 빼고 활을 당겨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엎드러뜨리며
행위가 정직한 자를 죽이고자 하나
그들의 칼은 오히려 그들의 양심을 찌르고
그들의 활은 부러지리로다 (시편 37:14-15, 개역개정)
악인들은 칼을 뽑아 치켜들고, 또 활을 당겨서,
비천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쓰러뜨리며,
자기 길을 똑바로 걷는 사람을 죽이려고 하지만,
그 칼에 오히려 자기 가슴만 뚫릴 것이니,
그 활도 꺾이고야 말 것이다. (시편 37:14-15, 새 번역)
드라마 <더 글로리를 좋아한다. 주인공 문동은이 복수를 하는 방식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자신을 고통스럽게 한 카지노 게임에게 적극적으로 무언가를 되갚아 주는 대신, 그들의 악한 성향이 결국 자신을 찌르는 칼이 되도록 한 이야기 흐름이 무척이나 만족스러웠기 때문이다.
의로운 누군가가 나타나서 악당을 대신 처벌해 주거나, 법과 정의가 내 원한과 억울함을 갚아주는 이야기도 좋지만, 악한 자들의 자승자박이 이끌어내는 사필귀정은 권선징악 형식의 이야기보다 훨씬 더 흡족하다. 빌런이 있는 힘껏 던진 카지노 게임이 다시 돌아와 그를 쓰러뜨리는 모양새가 주는 윤리적 만족감이 있다.
반면, 급작스럽고 어설픈 사과 혹은 어정쩡한 개과천선으로 이어지는 결말은 오히려 피해자의 억울한 마음이 안착할 곳을 앗아가 버린다. 악인이 나에게 했던 행동이 과거가 되었다고 해서, 내 안에 남기고 간 폐허와 상흔마저 과거가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동기 트라우마 회복 전문가 Patrick Teahan은 이렇게 말한다.
트라우마 생존자들을 향해 “너는 아직도 과거에 매여 있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들이 과거에 매여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 안에 아직도 과거가 살아 숨 쉬고 있는 것이다.
내가 겪었던 학대의 경험과 기억을 누군가에게 이야기하고, 공유하고, 치유하는 과정을 밟을 때에야 비로소 과거는 서서히 그 생기를 잃는다. 시편 37편 14-15절 말씀은, 내 안에서 거친 호흡으로 나를 노려보던 학대의 과거가 그 힘을 읽고 과거의 자리로 돌아가게 해 준 구절 중 하나였다.
14절에서 시편 기자는 '칼'이라는 말로 노래를 시작한다.
"저 칼 보이지?"라고 말하듯, 악인들이 뽑아 든 무기를 가리킨다.
악인들은 칼을 뽑아 치켜들고, 또 활을 당겨서
비천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쓰러뜨리며
자기 길을 똑바로 걷는 사람을 죽이려고 하지만
팽팽하게 당겨진 활 위에 놓인 화살의 과녁이 되는 대상,
칼이 뚫고 지나갈 목표가 되는 대상에게 있어 그 칼은
말 그대로 생사를 가르는 위협이다.
시편 기자도 그걸 안다. 그리고 카지노 게임도 아신다.
그럼에도 15절에서 시편 기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악인의 결말을 노래한다.
그 칼에 오히려 자기 가슴만 뚫릴 것이니,
그 활도 꺾이고야 말 것이다.
"근데 아까 우리가 본 그 칼이 말이야.
그 칼, 우리 심장 근처엔 오지도 못해.
그 활, 화살은 날려 보지도 못하고 꺾여서 아작 나."
왜?
그들의 칼이 향하던 '비천하고 가난한 사람, 궁핍한 사람'들은
카지노 게임 심장이 머무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카지노 게임 분노가 보호하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심장을 찌른다는 건
곧 카지노 게임 심장을 찌르겠다는 말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들의 활이 노리던 '자기 길을 똑바로 걷는 사람'은
카지노 게임 얼굴빛이 향하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카지노 게임께서 그 걸음이 가는 길을 닦아주시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을 죽이려 노린다는 건
곧 카지노 게임와 맞짱 뜨겠다는 말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짧고도 강렬한 이 두 구절 속으로 들어가 내 과거를 회상해 보았다.
내가 가진 외국어 능력, 낯선 환경에서의 적응력, 관계를 풀어나가는 방식—그에게는 없고 나에게만 있었던 것들. 그는 그 모든 걸 자기 소유물 꺼내 쓰듯 가져다 썼다.비난의 칼과 죄책감의 활을 겨누며 내 안에 있는 것들을 빼앗아 갔다. 자신이 해야 할 일들을 나에게 떠넘기고, 자신이 책임져야 할 사람들을 나에게 맡겼다. 그리고 밖에서는 마치 자신이 다 한 일인 양 떠들어댔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그가 나에게 들이밀었던 칼과 활은 나를 향하지 못했다. 내가 그를 대신해 만났던 사람들은 나의 친구가 되었고, 지금까지도 나를 돕는 든든한 지원군이 되었다. 그를 대신해 내가 해낸 일들은 차곡차곡 쌓여 나의 경력이 되었다. 그리고 그는 속 빈 강정처럼 가볍게 이리저리 굴러 다니며 요란한 빈수레처럼 싸움질만 하느라 홀로 남았다. 학대자의 잔꾀가 만들어낸 칼과 활은 나의 무기고를 채우고 내 삶의 거름이 되었다.
상담실을 먼저 찾아간 것도 그였다. 내가 잘못하고 있다고, 아카지노 게임이 자신의 말을 듣지 않아 망가지고 있다고, 그 말을 상담사의 입을 빌어 하고 싶은 마음에 생각해 낸 꼼수였다. 치유와 회복을 위해 찾아가는 상담실 마저 칼과 활로 바꾸어 나와 아카지노 게임을 죽이고 쓰러뜨리려 했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그 칼은 그의 심장을 찔렀다. 상담 선생님이 하신 “이건 학대입니다.”라는 말로 그의 폐부를 관통했다. “00님이 바뀌셔야 합니다”라는 상담 선생님의 말로 그의 활이 부러졌다. 자신이 바뀌어야 한다는 말에 분노한 학대자는 자기 파괴적인 행동으로 화를 내며 결국 상담실을 박차고 나갔다.
그의 칼이 나를 찌르지 못한 건, 내가 강해서가 아니었다. 카지노 게임 부메랑 권법, 그 정확한 궤도 덕분이었다. 그는 결국 자기 가슴을 찔렀다. 그리고 나는 그 틈으로 숨을 쉬게 되었다.
악인들은 칼을 뽑아 치켜들고, 또 활을 당겨서,
비천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쓰러뜨리며,
자기 길을 똑바로 걷는 사람을 죽이려고 하지만,
그 칼에 오히려 자기 가슴만 뚫릴 것이니,
그 활도 꺾이고야 말 것이다. (시편 37:14-15, 새 번역)
푹 빠져 헤엄치며 노래하던 구절 밖으로 나와 다시 현실을 바라보았다.
이번에 그가 택한 무기는 '돈'이었다. 학대자에게 맞서며 '더는 이렇게 살 수 없다' 호소하기 시작할 즈음, 그는 나에게 가끔 하던 재택근무 부업마저 하지 말라 했다. 아카지노 게임을 이유로 내세웠지만, 속내는 나의 경제력을 완전히 박탈하는 것이었다. 그마저 통하지 않자 아예 생활비를 끊어 칼과 활로 삼았다: 하지만 결국엔 그것도 소용없었다.
그가 들이민 칼 때문에 나는 비로소 소리쳐 도움을 요청하게 되었고,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은 카지노 게임이 나를 도와주었다. 경제적 도움뿐 아니라 배움의 기회도 더 많이 만날 수 있었다.
나와 아카지노 게임이 매일 함께 밥을 차려 먹고, 돈 없이도 갈 수 있는 소소한 소풍을 다니는 동안, 그는 아카지노 게임과 함께할 수 있었던 시간을 잃었다. 아카지노 게임과 가까워질 수 있는 기회도 스스로 버렸다. 시도 때도 없는 분노와 비난을 쏟아붓는 동안, 아빠를 향한 아카지노 게임의 마음마저 잃었다. 그리고 이제 나는 그의 돈이 나와 아카지노 게임을 묶어두지 못하는 자유롭고 안전한 곳을 꿈꾸고 있다.
과거에도 지금도, 학대자가 어떤 무기를 택하든 카지노 게임 부메랑 권법이 기다리고 있다. 더 크고 더 강력한 칼을 가져올수록, 학대자 스스로 자신의 심장을 더 깊숙이 찌를 뿐이다. 더 튼튼한 활을 당겨 나를 겨냥할수록, 더 큰 자멸이 학대자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더 글로리의 가해자들이 악한 삶의 방식을 포기하지 않은 채 자승자박이라는 귀결을 맞은 것처럼, 학대자도 그 우매함과 교만함, 카지노 게임께서 미워하시는 것들을 행하며 카지노 게임께서 보호하시는 이들을 공격함으로써 스스로를 파멸에 이른다.
그러나 카지노 게임 부메랑 권법을 아는 나는 조용히 읊조릴 뿐이다.
"어떡해? 너네 주님 개 빡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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