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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서 May 01. 2025

#05 카지노 쿠폰 내 삶의 순도는,

인디언 써머 _ 장편소설



곧 우기가 시작이라더니 도착한 날부터 흐리고 자주, 자분자분 비가 내렸다. 일부러 내다보지 않으면 비가 오는 걸 모를 정도로 조용하게 내리는 비는, 이곳 사람들의 성품과 닮아있었다. 자연이 사람의 성품에 영향을 끼친다는 걸 새삼스레 확인한다.


밴쿠버에 온 지 열흘 만에 드디어 한국에서 부친 이삿짐이 배달되었다. 직원 중 한 분이 놀이용 파란 자동차를 맨 먼저 끌고 들어오다가 문간에서 빼꼼 내다보는 카지노 쿠폰과 눈이 마주치자 환하게 웃으셨다. 카지노 쿠폰도 꽤 오래 보지 못했던 장난감을 보자 좋아서 달려 나갔다. 무슨 대화를 하는지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몇 마디 대답하던 카지노 쿠폰이 '고맙습니다~'라고 배꼽 인사를 하는 걸 보니 아마 아이를 좋아하거나 또래의 아이를 키우는 분인 것 같았다. 날마다 긴장과 근심을 휘감고 살던 시기라선지 우연일 수도 있는 그분의 행동이 카지노 쿠폰을 위한 세심한 배려 같아서 고마웠다.


나도 익숙한 살림살이를 보자 낯선 곳에서 피붙이를 만난 것처럼 반갑고 뭉클하기까지 했다. 한국에서 큰 짐들은 거의 처분을 했는데도 짐을 다 풀만한 공간이 없어서 거실 한편에 이사 박스를 쌓아 올렸다. 거의가 책이었다. 그토록 아끼던 책들이 갑자기 허영심이란 짐으로 보였다. 한국에서 이삿짐을 옮기시던 아저씨가, '이런 건 머릿속에 넣고 다녀야지 무겁게 끌고 다니냐'고 하셨던 말씀이 새삼 떠올랐다. 다 읽은 책들인데 정말 어쩌자고 이 먼 나라까지 끌고 왔을까. 나름대로의 분명한 이유는 있었지만 지금의 나라면 가져오지 않았을 것 같았다. 불과 몇 달 전의 내가 현재의 나를 낯선 듯 빤히 쳐다본다. 그래도 침대와 텔레비전 같은 큰 가구들의 자리를 정하고 부엌살림과 옷가지 등을 정리하자 이제야 집 같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그 안정감은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현실적인 자각에 밀렸다. 어쩌면 낯설고 어설펐던 지난 열흘이 오히려 폭풍전야 같은 평온이었을지 모른다.


이삿짐 정리가 거의 끝나고, 둘째가 태어난 기념으로 원목 서랍장과 함께 샀던 작은 원탁을 창가에 놓고 오랜만에 제대로 된 의자에 앉아서 커피를 마셨다. 몸은 익숙한 습관을 기억하며 금세 적응했지만 창밖의 풍경은 이내 카지노 쿠폰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일깨워 주었다.


창가에서 내려다 보이는 큰 도로 건너의 건물들 중에서 첫날부터 유난히 눈에 띄는 간판이 있었다. 그건 전혀 예상하지 못한 풍경이기도 했다. 간판엔 한글로 '외환은행 밴쿠버 지점'이라고 쓰여있었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불편하고 서툰 언어 속에서 또렷하게 다가오는 한글로 된 간판이 오히려 더 낯설게 느껴졌다. 처음엔 그 황당함의 이유를 몰랐다. 하지만 며칠 후 알게 되었다. 이젠, 어설픈 향수 따위는 한 올도 남겨두어서는 안 된다는 모진 결심이 나를 뚫고 들어와 마음 한가운데 박혀있기 때문이었다. 내게 외환은행의 한글 간판은, 떠나온 곳에 대한 그리움이 아니라 익숙했던 모든 것들을 잊고 다시 시작해야 카지노 쿠폰 낯선 현실을 일깨워 주었다.


날마다 창가에 서서, 외환은행 앞으로 밀물과 썰물처럼 지나가는 출퇴근 차량을 바라보며 이 시간에 내가 속해야 할 곳은 이 창가가 아니라 저 길 위여야 한다는 생각이 절실해서 가슴이 울렁거릴 정도였다. 나는 무슨 일이든 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그 일은 내 카지노 쿠폰의 편한 잠자리와 밥을 보장해주기만 하면 충분했다. 이토록 단순한 바람이 세상에서 가장 간절한 소원이 되는 경험은, 내 삶의 순도를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온 캐나다를 다 뒤져도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제자 S를 알게 되었고 그녀를 통해서 남편의 고등학교 선배도 알게 되었다. 어느 날, 저녁 초대를 받아서 S의 가족들과 함께 그 댁으로 갔다. 정원이 깊은 단독주택이었다. 선배님이 이민 오신 70년대만 해도 당시 돈으로 200달러 이상은 가져가지 못하게 했다니 정말 빈 손으로 오신 거나 마찬가지다. 내외분은 이민 초기부터 일한 생선공장을 20년째 다니고 있었다.


"그때는 일은 많은데 일할 사람이 없어서 투잡은 기본으로 뛰었지. 부족한 잠은 거의 이동하는 차에서 잤어. 힘들었지만 좋은 시절이기도 했지. 내가 원하는 만큼 일할 수 있고, 평범한 사무직보다 보수가 훨씬 높았으니까. 그렇게 일해서 금세 집도 사고 각자 차도 사고 애들도 키웠지. 내가 한국에서 어떤 사람이었는데 이런 일을 하나...라는 오만한 마음을 버리고 성실하게 일하면 금세 안정이 되네. S한테 대충 얘기는 들었는데 4월부터 시즌이 시작되지만 아마 여자만 뽑을 거야. 밴쿠버는 여자들이 일자리를 구하기가 훨씬 쉬워. 근데 카지노 쿠폰 엄마를 보니 여리여리하게 생겨서 그런 힘든 일은 못할 거 같은데... 소개해주었는데 일을 못하거나 금세 그만두면 내가 입장이 좀 난처해서 그래."


두 분은 몇 번이나 더 나를 살폈다. 아마 한국에서 살 때, '여리여리하게 생겨서 힘든 일은 못하겠다'라는 말을 들었다면 그걸 내 단점이라고 생각하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나는 부끄러웠다. 마치 숨겨왔던 치명적인 약점을 들킨 것 같았다. 한편으론, 특별한 기술이 필요한 일도 아니고 한국이었으면 생각조차도 안 했을 일인데 그런 일 때문에 무능하다는 말을 들은 것 같아 당황했다. 자존감이 떨어지자 돋아난 쓸모없는 자존심이었다. 그래도 시즌이 시작되면 연락하겠으니 준비하고 있으란 대답을 들었다. 하지만 이제 겨우 1월이었다. 무작정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사실 그동안 일을 아예 안 한 건 아니었다. 한인 수퍼에서 가져온 신문에 난 광고를 보고 찾아가, 나는 집 근처에 있는 작은 식당에서 서빙을 했고, 남편은 조금 먼 곳의 어느 한식당 벽에 페인트를 칠하는 일을 했었는데, 그 며칠 동안의 경험으로 우리가 내린 결론은, 앞으로는 절대로 한국인에게 고용되는 일은 하지 말자는 것이었다. 정당한 노동력을 주고 서로 합의된 임금을 받는 수평 관계인데 자영업을 하는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주종관계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한국에서 살 때도 좋은 사람인가 아닌가를 판단하는 우리의 기준은 직업의 귀천을 따지는 것과 가게에서 일하시는 분들을 대하는 태도였는데 여기까지 와서 그 꼴을 볼 수는 없었다. 하물며 내가 당하는 입장이라니... 요즘엔 좀 달라졌겠지만(달라졌기를 바란다.) 당시만 해도 '한국 사람을 가장 조심해야 한다.' '될 수 있으면 자영업을 하는 한국인과는 일을 안 하는 게 좋다.' 등등의 말들이 호환마마처럼 떠돌았다. 물론 그렇지 않은 분들이 더 많았겠지만 원래 나쁜 소문은 발이 빠르고 힘이 세다. 남편의 선배님도 초면에 같은 말씀을 하셨다.


교민 사회를 풍자카지노 쿠폰 말 중에 '모래알'이란 표현이 있다. 모여 있지만 뭉쳐지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씁쓸한 표현이지만 나도 아예 무관하진 못하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모른 척한 적은 없지만 어떤 상황에서 내가 먼저 적극적으로 협력하려고 한 적도 없기 때문이다. 한국인은 타민족의 이민자들에 비해 각각의 개인은 똑똑한데 결속력과 의리가 떨어지는 건 사실이다. 여러 인종이 모여 사는 '모자이크 문화'다 보니 이런 점이 쉽게 눈에 띈다. 한국에서도 나라에 큰일이 생기면 잘 뭉치면서도 소소한 개인의 일상에서는 절충의 노력 없이 바로 대립부터 카지노 쿠폰 걸 보면, 혹시 우리가 이런 모순적인 공통의 유전자를 타고난 민족인가 싶기도 하다



아침마다 청소를 하려고 문을 열면 소음이 만만치 않았다. 게다가 차량이 일찍 끊어져서 밤에는 어디든 조용한 편인데도 근처에 소방서가 두 개나 있고 대로에 가까이 있다 보니, 밤마다 몇 차례씩 요란한 소리를 내며 지나가는 소방차와 엠블런스 때문에 나는 물론 아이들까지 깨서 보채는 게 일상이 되었다. 우리가 소리에 예민한 편이라서 더 그랬겠지만 사고가 나든 누가 아프든 일단 신고가 들어오면 소방차와 엠블런스가 모두 출동하기 때문에 조용할 날이 거의 없었다. 아무리 통장의 잔고가 위험수위에 가까워졌어도 아이들을 위해선 이사를 가야 할 것 같았다.


한 달 내내 신문의 렌트 광고란을 샅샅이 뒤진 덕에 월세가 그리 차이 나지 않는데도 훨씬 환경이 좋은 곳을 찾을 수 있었다. 이사는 우리 차로 남편이 직접 하기로 했다. 돈을 아끼기 위해서긴 했지만 그래도 요즘 같으면 U-Haul에서 작은 트럭이라도 빌려서 한 번에 했을 텐데 그땐 그런 것도 몰랐다. 다행히 의자를 접으면 짐을 실을 공간이 꽤 넓었다. 어차피 아이들만 집에 둘 수도 없고, 아직은 겨울 날씨니 나와 아이들은 그냥 집안에 있으라면서 남편이 혼자서 이사를 했다. 차로 10분 정도의 거리기도 했고, 부피가 큰 옷장이나 냉장고, 세탁기 같은 것들이 모두 붙박이라서 가능한 이사였지만 남편이 몇 번이나 왕복하며 옮겼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이사를 시작한 지 사흘 째, 마지막으로 차 지붕에 아슬아슬하게 침대 매트리스를 실었던 모습만 선명하다.


표면적으로는 거의 변화가 없었지만 내면으론 겹겹의 생각과 갈등이 주상절리처럼 쌓였던 이민 생활의 첫 집에서 5개월을 살았다. 하지만 나와는 다르게 카지노 쿠폰은 아직도 이 집에 관한 좋은 추억들이 많다. 같은 시간을 살았는데도 카지노 쿠폰의 추억과 내 기억이 다르다는 게 이토록 위로가 된 적은 없었다. 카지노 쿠폰은, 대부분의 시간을 엄마, 아빠와 함께 지내고, 티비에서 나오는 'sesame street'을 날마다 보며 즐겁게 영어를 익히고, 네 가족이 모여 앉아서 디즈니의 애니메이션을 비디오로 반복해 보는 게 행복했고, 집이 좁아서 카지노 쿠폰의 공간을 따로 분리하지 않은 것도 좋았던 모양이다. 그리고 가까운 곳에 '센트럴 파크'라는 공원이 있어서 자주 그곳에 가서 놀았다. 다정하고 풍성한 자연 속에서 카지노 쿠폰은 날마다 새로운 추억을 쌓았다. 하지만 나선형으로 돌아가는 미끄럼틀을 타고 빙글빙글 내려오며 해맑은 웃음으로 엄마를 부르는 카지노 쿠폰에게 같은 표정으로 손을 흔들면서도,


더 나은 삶을 주고 싶어서 데려오고선 결국 아무것도 해주지 못하고, 새로운 환경이 그저 낯선 의미로만 남으면 어쩌나... 또 지나치게 예민해져서 마음과는 달리 자주 부딪치는 나와 남편은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까…


이런 생각들로 마음이 무거운 건 나만의 비밀이었다.


이사 한 집은 오래된 타운하우스라 집은 좀 낡았어도 주변 환경은 내가 막연하게 상상하며 바라던 것을 충족시키고도 남았다. 집 앞의 주차장을 따라 길게 벚나무가 늘어서 있고 그 나무들 너머로 놀이터가 있었는데 우리 집 주방 창문에서 바로 내다보이는 위치였다. 입구의 단풍나무 가로수 길 건너편엔 레크레이션 센터와 학교가 있어서, 9월이면 만 다섯 살이라 '킨더가든 kindergarten'에 가야 하는 아이를 걸어서 데려다줄 수 있을 만큼 가까웠다. 집 뒤쪽으론 나무들이 울창해서 건너편 집들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리고 감격스럽게도 세탁실이 따로 있었다. 먼저 살던 집에서는 9층에서 오르내리며 코인 런드리처럼 운영되는 지하의 공동 세탁실을 썼는데 그 집에서 가장 불편하고 싫은 부분 중 하나였다.


다음 날, 옆집에 사는 일본 아줌마 '마고미'와 인사를 했고, 몇 집 떨어진 곳에 사는, 우리 아이들과 나이가 비슷한 '노아'라는 사내아이의 엄마인 '제니'는 아주 맛있는 오트밀 쿠키를 만들어서 문을 두드렸다. 아무것도 달라진 상황은 없고 단지 이사를 했을 뿐인데 갑자기 일상의 표피가 아늑해졌다. 주거환경과 이웃의 중요성을 새삼 실감했다. 이젠 정말 취직만 하면 걱정할 게 아무것도 없을 것 같았다. 해결하기 가장 어려운 것을 등에 지고도 나는 잠시 그 무게감을 잊었다.


뭔가 빨리 결정되고 안정되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나에게 적응할 시간을 주기로 했다. 언젠가는 그 시간들이 발아되어 익숙한 나를 만나게 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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