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론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은 타국민들에게는 어떻게 보일 것인가? 삼성, 현대, LG 같은 유망한 대기업을 보유한 선진국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짧은 시간에 전쟁, 독재를 경험한 민주주의 국가로 볼 것인가? 어떤 면에서 대한민국을 바라보든, 외국인들의 눈에는 우리나라는 놀라움으로 비칠 것이다. 그 어떤 나라보다도 빠르게 한강의 기적을 통해서 선진국의 대열에 합류했고, 어떤 나라보다도 빠르게 전쟁의 아픔과 독재의 그늘을 벗어났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의 성장을 이끈 힘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2024년에 내려진 계엄령과 이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답을 내릴 수 있다. 갑작스러운 윤석열 대통령의 계엄 선언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국회로 뛰어갔고, 이는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지켜냈다. 대한민국의 공권력은 시민들을 통제하고 국회로 난입하려 했지만, 국회에 도착한 시민들은 서로서로를 의지하면 인간벽을 쌓았다. 이는 국회가 계엄령을 무효화시키는데 필요한 소중한 시간을 벌었다. 이는 대한민국이 경제적 그리고 정치적 성장에 있어 국민들의 힘이 결정적이었음을 보여준다. 본인들은 비록 가난하지만 자식들의 미래는 더 나아져야 한다는 신념하에 많은 국민들이 희생했고, 이는 눈부신 경제성장으로 이어졌다. 말도 통하지 않는 독일로 광부들과 간호사들은 보내졌고, 이를 통해 대한민국은 경제성장에 필요한 자본을 얻을 수 있었다. 광부들은 그 누구도 가려고 하지 않는 지하로 들어가 석탄을 캤고, 간호사들은 독일 치매환자들의 똥오줌을 받아내며 버텼다. 이처럼 강인한 대한민국 시민들은 1989년 서슬 퍼런 독재자의 폭력에도 굴하지 않았고 마침내 민주주의를 쟁취했다.
하지만 이러한 긍정적 면모만으로 대한민국에 대해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모든 변화와 마찬가지로 대한민국의 긍정적 변화의 이면에는 아픔이 자리 잡고 있다. 이러한 아픔들이 대한민국의 근현대사를 정의하고 있다. 전태일열사는 노동자 탄압에 대항하며 스스로의 몸에 불을 붙였다. 여공들은 창문조차 없는 방에서 미싱기를 쉼 없이 돌리고 폐병을 얻었다. 독재자들은 조그마한 반대의 목소리에 그 어떤 관용도 없이 폭력으로 대항했다. 그중, “소년이 온다”는 우리가 절대 잊어서는 안 될 광주시민항쟁에 대한 소설이다. 광주시민항쟁이 무엇이고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해서 모르는 대한민국 시민은 없다. “소년이 온다”는 광주시민항쟁에 대한 객관적 정보 전달보다는 광주시민항쟁과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어떤 사람들이 희생되었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어떤 트라우마 속에서 삶을 살고 있는지 이야기한다. 광주시민항쟁이 우리에게 준 선물인 민주주의의 혜택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광주항쟁의 피해자들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 그 큰 빚을 갚아내는 첫 번째 단계는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기억하고 왜곡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2. 줄거리
“소년이 온다”는 한강 작가의 에필로그를 포함해서 7개의 챕터로 이루어졌다.
제1장 “어린 새”는 중학생 동호의 이야기다. 동호는 진압군에 희생당한 광주시민의 시체를 관리하는 역할을 한다. 동호는 매우 어린 나이지만, 친구 정대가 총에 맞았을 때 끝까지 함께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도청에 남아 광주시민군의 일을 돕는다. 시체 보관소에서 정대의 시체를 맞이하는 것이 그의 끝 모를 죄책감을 씻어주는 유일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시체를 관리하다 보면 정대의 시체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도청에 남아 시체를 관리한다. 그리고 그 일을 통해서 광주시민들의 분노를 두 눈으로 똑똑히 보게 된다.
제2장 “검은 숨”은 진압군에 희생당한 정대의 ‘혼’에 관한 이야기다. “소년이 온다”에서는 사람이 사망하면 혼이 몸에서 떠난다고 묘사한다. 이러한 혼은 다른 혼들과 생생하게 교류하지는 못하지만, 느낄 수 있다. 감각의 보고로 할 수 있는 몸은 이미 유린되고 훼손되었기에 어떠한 느낌인지 알 수 없지만 기억만은 간직하는 혼은 외로움을 느낀다. 또한, 정대의 혼은 자신의 시체에서 나와 훼손되어 가는 자신의 몸을 보면서 분노를 느낀다. 자신을 이렇게 만든 사람에게 분노하고 군인들에게 분노한다. 하지만, 분노보다 더 큰 건 누나와 벗에 대한 그리움이다. 정대의 혼은 동호를 찾아 떠나려고 하지만, 폭발음과 함께 도청에서 동호가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제3장 “일곱 개의 빰”은 도청에서 살아남은 은숙의 이야기다. 은숙은 광주 도청에서 살아남아 출판사에 취직하고 살아간다. 은숙은 수배 중인 작가의 도서를 검열소에 가져가 출판 허가를 받으려고 하지만, 그곳에서 정부 관계자에게 “일곱 대의 빰”을 맞게 된다. 처음 생각과는 달리, 은숙의 빰을 때린 그는 보통 사람들과 똑같이 생긴 손으로 그녀의 빰을 때렸다. 그녀는 하루에 빰 한 대씩 잊으려고 한다. 하지만, 동호를 남겨두고 떠나 살아남은 그녀는 죄책감이라는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불행한 삶을 산다.
제4장 “쇠와 피”는 김진수와 강민우를 통해 카지노 게임과 트라우마에 대해 보여준다. 김진수와 강민우는 도청에서 진압군에게 체포당하고 감옥에서 고통스러운 카지노 게임을 받는다. 모나미 볼펜으로 손가락의 살을 들어내고, 끊임없는 구타를 통해 공포가 이성과 자아를 지배하게 한다. 무더운 여름 90명 정도의 수감자를 한방에 몰아놓고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지체 없이 군홧발이 쏟아진다. 먹는 것은 극도로 제한하고, 하루 한 끼는 하나의 식판으로 둘이 나누어 먹게 한다. 이는 서로가 서로를 믿을 수 없고 먹는 것에 굴복하고 증오하게 만든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카지노 게임 후에 김진수와 강민우는 풀려나게 되지만, 그들은 보통의 삶을 살 수 없게 된다. 카지노 게임이 그들의 자아 깊숙한 곳에 자리 잡았고 끊임없는 죄책감과 악몽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한다. 김진수는 고통 끝에 스스로 생을 마감하고, 강민우는 김진수와의 이야기를 물으러 온 작가에게 울부짖는다.
제5장 “밤의 눈동자”는 은숙을 통해 노동 탄압과 광주의 이야기를 한다. 은숙은 노동 운동에 참여했다 경찰의 발에 차여 내장이 파열되는 큰 고통을 겪는다. 이러한 고통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광주시민항쟁에도 참여한다. 그녀는 광주시민항쟁을 이야기할 것이라는 작가의 인터뷰 요청을 받고 이야기하는 것을 꺼리지만, 그녀의 멘토였던 성희 언니의 암 투병 소식을 듣고 인터뷰에 응하자고 마음먹는다. 그녀는 성희 언니의 병원에 무작정 찾아가고, 성희 언니에게 “죽지 말고 살아”라는 말을 전하고자 한다.
제6장 “꽃 핀 쪽으로”는 동호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다. 광주시민항쟁에서 살아남은 광주시민들의 삶이 얼마나 지옥 같은지를 잘 보여준다. 동호의 어머니와 둘째는 동호를 데려오지 못한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동호를 끔찍이 사랑했던 큰 형은 둘째에 대한 분노를 간직하고, 이는 가족을 파괴한다. 전두환이 광주를 방문한다는 소식에 광주시민들은 분노하고, 분노를 표현하지만, 바로 공권력에 진압당한다. 희생자의 어머니들은 흰색 수의를 입고 시위를 벌이고 청년단도 반대의 뜻으로 시위한다. 하지만, 이들은 곧 경찰서로 잡혀오고 이들의 목소리를 들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는 그들의 무력감은 그들을 더욱 죄책감이라는 심연으로 몰아넣는다.
3. 카지노 게임의 비인간성
카지노 게임은 인간의 존엄성과 기본적인 인권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행위로, 국제법적으로 명백한 불법행위다. 하지만, “소년이 온다”에서 묘사된 것처럼 당시 폭력 정부와 군인들은 카지노 게임을 거리낌 없이 사용했다. 카지노 게임이 인간의 존엄성과 기본적 인권을 침해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카지노 게임은 인간이 견딜 수 없는 수준의 고통을 통해 인간을 굴복시키는 것이 목적이다. 이러한 카지노 게임의 목적성은 인간의 존엄성을 해칠 수밖에 없다. 우리가 견딜 수 있는 고통을 준다면, 카지노 게임은 아무런 효과가 없다. 전기카지노 게임은 인간의 고통을 넘는 수준으로 가해지고 통달구이라는 사람을 닭같이 걸어두는 단순한 카지노 게임은 모든 피를 머리로 몰아 피를 쏟아내게 한다. 민주주의라는 형언할 수 없는 큰 가치를 위해 자신의 몸을 던졌던 시민군들에게 견딜 수 있는 고통은 참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참기 힘든 육체적 고통을 통해 군부는 그들의 신념을 부서뜨리고
“민주주의 좋아하시네. 니들이 지키려고 한 그 가치는 고통 앞에서 쉽게 부스러지는 과자 부스러기만도 못하다.”
라며 그들의 행위를 비웃었다. 이는 시민군 스스로가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게 하고 자신의 무모함을 질타하면서 굴복하게 만든다. “1984”에서 윈스턴이 견딜 수 없는 쥐를 통한 카지노 게임을 겪고 난 후 자신의 신념을 던지고, 빅 브라더가 조작한 뉴스를 듣고 눈물을 흘리는 장면에서 그런 ‘굴종’을 볼 수 있다.
둘째, 견딜 수 없는 육체적 고통은 인간의 이성과 자아를 파괴하고, 그 자리에 카지노 게임자에 대한 공포감이 자리 잡게 한다. 눈만 마주치면 날아드는 구둣발, 어떠한 카지노 게임이나 이야기하기도 전에 모나미 볼펜을 이용한 손가락 고통 주기 등은 언제든지 고통을 받을 수 있다는 공포를 심어준다. 카지노 게임자에 대해 가지는 공포는 흡사 왕정시대에 백성들이 폭군에게 가지는 공포와 같다. 이는 모든 인간이 동등하다는 민주주의의 근간을 뒤흔들고, 나의 운명은 카지노 게임자의 손에 달려 있다는 계급적 차이를 발생시킨다. 카지노 게임자의 기분이나 그날의 계획에 따라, 카지노 게임 희생자의 삶이 질이 결정된다. 카지노 게임 희생자는 홀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들의 삶은 전적으로 카지노 게임자에게 달려있다. 나 위에 ‘군림’하는 존재를 상정하게 만드는 카지노 게임은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한다.
셋째, 카지노 게임은 평생 지워지지 않는 심리적 트라우마와 자신의 육체에 대한 저주를 심는다. 카지노 게임의 피해자는 평생 악몽에 시달린다. 길을 지나다 군홧발 소리만 들려와도 두려움에 떨게 되고, 자신을 카지노 게임한 사람에 대한 증오는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김진수와 강민우의 삶처럼 술에 취하지 않으면 잠을 이룰 수 없게 되고, 보통 사회생활은 꿈도 꿀 수 없다. 한 인간의 한평생을 카지노 게임이라는 울타리에 가둬두기에 비인간적이다. 뿐만 아니라, 카지노 게임을 당한 사람은 자신의 육체를 증오하게 된다. 카지노 게임실 안에서 육체가 썩어 문드러진다. 뿐만 아니라, 육체는 즐거운 감각의 대상이 아니라 벗어날 수 없는 고통의 원인이 된다. 인간은 외부로부터 오는 감각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다. 즐거운 음식을 먹으면서 행복을 느끼고, 향기로운 꽃 냄새를 맡으면서 어린 시절을 회상한다. 또한, 육체의 감각은 새로운 즐거움의 시작이다. 혀 끝을 통해 새로운 음식 맛을 느끼는 순간, 이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행복을 느낀다. 뿐만 아니라 새로운 여행지를 방문하고 눈에 담게 되는 새 여행지의 아름다움은 인간의 행복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또한, 사랑하는 사람과의 성행위는 정신적 행복과 함께 오르가슴이라는 인간 쾌락의 절정을 선사하면서, 사랑을 다시 확인하게 한다. 하지만, 카지노 게임의 희생자는 카지노 게임 후 아무런 육체적 즐거움도 얻을 수 없다. 육체는 고통의 원인이 되고, 그들의 성기는 군인들의 조롱과 고통을 주는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 30cm 나무자는 은숙의 성기를 유린했고 진수는 이쁘게 생겼다는 이유 하나로 손이 뒤로 묶인 채, 발가벗은 채로 연병장에 버려졌다. 그의 성기와 주요 부위들은 개미의 먹잇감이 되었다. 이런 극한의 육체적 고통은 다른 기억들은 모두 지우고 고통만 남겨두고 이는 이들이 미래에 성적 기쁨을 느끼지 못하게 한다. 인간의 행복을 빼앗아가는 이러한 카지노 게임은 존엄성의 파괴일 뿐만 아니라, 행복과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인간의 독특한 감각기관을 파괴해 새로운 종을 탄생시킨다. 인간이 다른 인간과 같은 종인 이유는 우리 모두 같은 방식으로 감각하기 때문이다. 이는 인간이 다른 인간과 교류를 통해 자연스럽게 사회적 존재로 그리고 의지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든다. 하지만, 카지노 게임으로 인해 파괴된 인간은 다른 인간과 다른 변종이 된다.
이러한 이유로 카지노 게임이란, 비인간적이고 인류에 대한 범죄로 치부되나 부당하게 권력을 찬탈한 권력자들에게는 매우 유용한 통치의 수단이 된다. 육체적 고통에 취약한 인간은 아무리 숭고한 사상일지라도 고통 앞에 무력하게 쓰러진다. 남영동 대공분실은 그 존재만으로도 사람들을 벌벌 떨게 했고, 거기에 갈 만한 ‘행동’ 자체를 생각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카지노 게임은 지금도 시리아, 중국과 같은 독재국가에서뿐만 아니라, 미국의 관타나모 베이에서도 일어난다.
4.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집단
“무엇이 인간을 비도덕적으로 만드는가?” 이 물음은 우리 사회에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전 인류는 인간이라는 존재를 다시 탐구하기 시작했다. 이성과 지성의 복합체라는 우리의 인류가 유태인 학살, 일본군의 난징 대학살 그리고 캄보디아 킬링필드등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행동에 동참하게 되었는가? 인간은 원래 비도덕 한 존재인가? 아니면 인간을 비도덕하게 만드는 어떠한 기제가 존재하는가?
에리히 프롬은 그의 저서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책임감과 두려움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인간은 자신의 미래를 결정해야 한다는 실존적 책임에서 두려움과 버거움을 느낀다. 인간은 세상을 인과관계에 따라 파악하려 할 만큼 확실성을 추구한다. 나의 선택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올지 모른다는 두려움은 실존적 성격을 가진 인간을 압박한다. 자유는 책임을 동반한다. 내가 자유롭게 내린 선택은 결과에 대한 책임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두려운 권리다. 하지만 이런 두려움은 군중으로 숨어 들어가면서 지울 수 있다. 군중에 숨어들기 위해서는 자기의 자유를 어느 정도 벗어던져야 하지만, 이는 확실성을 위한 대가로 지불할 만하다. 특히 어릴 때부터 부모의 그늘과 영향에서 살았던 인간은 큰 거부감 없이 군중의 일원이 되는 선택을 한다.
심리적 압박뿐만 아니라, 국가는 공권력이라는 물리적 압박을 통해서 비도덕 한 인간을 생산한다. 광주에 동원되었던 공수부대원들은 어느 곳으로 가는 줄도 모르고 광주로 향했다. 그들에게 하달된 명령은 광주 ‘폭도’들을 진압하라는 명령이었다. 군인에게 항명은 즉결처분이 가능할 정도로 큰 죄다. 군인들에게 물리적 폭력을 가할 수 있는 힘을 가진 국가는 공권력을 통해 도덕적 개인을 지우고 국가의 명령을 따르는 비도덕적 군인들을 만들었다. 처벌의 두려움 속에서 군인들은 양심의 소리를 차단하고, 살아남기 위해 폭력적으로 변했다.
군인들에게 양심이란 없었을까? 분명 군인들도 양심에 괴로워하고 명령에 의무감을 가졌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스스로 내러티브를 만들어 양심의 소리를 지우는 능력이 있다. 6/25 전쟁 때 중공군에게 사로잡힌 미국인 포로들은 담배를 얻어 피우는 대가로 “자본주의는 나쁘다”라는 문장을 읽어야 했다고 한다. 이때 담배를 얻어 피우고 그 문장을 직접 이야기한 미군 포로들은 후에 정말로 자본주의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 이유는 담배를 위해 조국을 배신했다는 것에 치욕감을 느낀 자아가 스스로 “자본주의가 나쁘다”는 내러티브에 빠졌기 때문이다. “소년이 온다”에 나온 군인들은 광주시민항쟁이 아니라 북한에서 내려온 ‘북괴’들이 일으킨 폭동이라고 끊임없이 자기 합리화를 하면서 양심의 목소리로부터 달아났다.
이처럼 군중 속으로 들어가기, 공권력으로부터의 처벌 두려움, 그리고 ‘북괴 폭도들을 처벌한다’는 자기 정당화가 군인들을 더욱 잔인하게 변하게 했다. 이는 군인들이 더욱더 이유 없이 잔인해졌던 이유가 된다. 개머리판으로 시위대들의 머리가 터질 때까지 가격하고 일열로 줄 서서 걸어오는 항복한 미성년자들에게 아무런 주저 없이 총구를 겨눴다.. 심리적·외부적 요인에 의해 변화한 군인들은, 눈앞에서 피가 터지고 뼈가 부러지는 시민들을 보면서 자기 정당화라는 주술을 더욱 강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양심에게 조금의 자리라도 내어주는 순간, 그들은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에 스스로 무너져 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더욱 난폭하고 잔인한 행동을 통해 ‘북괴의 소행’이라는 내러티브를 더욱 강화했던 것이다.
이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다음 편에서는, 광주가 우리에게 남긴 유산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책임이 무엇인지에 대해 다시 한번 꼽씹어 보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