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하면 다수결이 떠오른다. 다수가 지지하는 대표가 국가를 이끈다. 민주주의가 다수결만으로 정의될 수 없지만, 다수결에 의한 투표 시스템은 민주주의의 대표적인 모습이다.
다수의 사람, 집단은 강하다. 호모 사피엔스는 혼자인 것보다 모여서 강해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진사회성 동물이다. 그러나 다수는 항상 강할까? 당신은 절대 양보하지 않는 카지노 게임와 양보하는 다수의 싸움에서 누가 이길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필자의 경험에 따르면 이러한 경우 절대 양보하지 않는 카지노 게임가 이겼다.필자는 소화기 계통이 안 좋아서 몇 가지 못 먹는 음식이 있다. 대표적으로 못 먹는 음식 중 하나가 돼지고기 중 삼겹살 구이이다. 친구들과 만나 밥을 먹으러 갈 때, 필자는 절대 양보하지 않는 카지노 게임였다.만약 4명의 친구와 만났다면, 절대 양보하지 못하는 필자 한 명 때문에 나머지 네 명이 삼겹살이라는 음식 메뉴 의사결정을 양보한다.
이를 확장해보자. 예컨대 4인 가족인 4가구가 있다고 해보자. 총 16명 중 필자 한 명만 삼겹살을 먹지 않는다. 필자가 만난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필자의 가족은 평소에 삼겹살을 먹지 않게 된다. 만약 다른 가구들과 함께 모여 외식을 한다고 해보자. 그렇다면 그 날은 단 한 명으로 인해 나머지 15명은 삼겹살을 선택하지 않는다. 이는 절대 양보하지 않는 카지노 게임가 양보하는 다수를 이길 수 있다는 필자의 직접적 경험이다.
필자의 대학 시절, 특정 수업은 영어로 진행되었다. 전국 대학교 순위 평가에 영어수업이 들어가면 가산점이 생긴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외국인 학생이 한 명이라도 있으면 수업은 영어로 진행되었다. 자동차에 자동 변속기가 기본 옵션이 되는 것도 이와 같은 원리로 해석할 수 있다. 다신교보다 일신교의 종교가 지배적인 종교가 된 것도 그렇다. 수리물리학에서는어떤 특성이 전체로 확산되거나 수렴되는 상황을 해석하는 것을'재규격화 집단(Renormalization Group)'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재규격화는 카지노 게임에 의한 거부로 이루어진다.
양이 이끄는 사자 군단보다는
한 마리의 사자가 이끄는 양 군단을 갖는 편이 더 낫다.
알렉산더 대왕
고대 카르타고의 위대한 군사 지휘관이자 전략가였던 한니발은 용병 위주로 구성된 카지노 게임의 군대만으로 수 십년 동안 로마를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다. 칸나에 전투에 임할 당시 한니발 휘하의 지휘관인 기스코가 로마군의 군세가 너무 큰 것에 우려를 표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숫자는 중요한 게 아니야. 저렇게 숫자만 많으면 뭐하나. 기스코라는 한 사람의 지휘관이 없는데."
알렉산더 대왕과 한니발도 이러한 소수의 힘을 잘 이해했던 것 같다.
절대로 양보하지 않는 카지노 게임의 주장의 장점이자 단점은 명확하다는 것이다."다른 사람에게 폭력을 가하지 말라" "남의 물건을 훔치지 마라"와 같은 보편적인 도덕은 옳고 그름을 명확하게 만든다. 절대로 남의 물건을 훔치지 않겠다는 사람의 도덕률은 때때로 남의 물건을 훔치는 사람의 도덕률보다 예외사항이 적고 안정적이다. 이는 판단에 따른 명확한 근거를 기대할 수 있다.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불안정성을 명확히 제거해준다.그러나 순수에 집착할수록 주변의 어둠은 짙어진다. 게르만 족이 우월하니 열등한 다른 민족에게 함부로 대해도 된다는 명확한 도덕률은 때론 극히 위험해진다.
모든 부분에서 양보하지 않는 소수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과학적 지식은 역대 과학자들이 한 모든 연구의 총합이 아니다. 과학계는 소수의 과학자가 찾아내는 새로운 발견이 전체를 이끌어가는 분야다. 심지어 한 사람의 발견이 그전까지의 모든 이론을 모두 부정하는 것으로 드러날 수 있다. 만약 과학계가 항상 다수에 의한 장악으로 점쳐진 학문이었다면, 지동설의 갈릴레이와 상대성 이론의 아인슈타인은 변방의 이단자로 남았을 것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도 양보하지 않는 소수의 문제는 드러난다. 어쩌면 여론이라는 것이 대다수의 의견이 아니라, 절대로 양보하지 않고 비타협적인 소수가 만들어내는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역시 항상 옳고 그르다는 가치판단을 할 수 없지만, 소수의 결집층의 의견이 언론에 실리고 정치적으로 우세한 여론이 된다. 필자의 주변에선 언론에 나오는 것만큼 강렬한 의견을 표출하는 사람이 없는데, 언론에서는 그런 사람들만 있는 것처럼 비춰진다.이런 사회에서 우리는 절대로 양보하지 않는 소수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를 고민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