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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하 Aug 25.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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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가 시작된 후 줄곧 몸이 찌뿌둥하다. 1년까지는 기존 내 몸무게 범주 안에서 놀던 숫자들이 이젠 눈치 보지 않고 마의 경계를 넘나든다. 무게보다 더 살쪄 보이는 몸매도 문제다. 불어난 무게가 모조리 뱃살로 향하기라도 한 듯 출렁출렁 복스럽고 징그럽다.

나는 몸무게가 늘어난 정도라지만 실은 코로나 블루라는 신조어가 생길 정도로 코로나 피해는 막대하다. 혹자는 몸이 힘들면 마음이 힘들 겨를이 없다고도 하지만, 글쎄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몸이 힘들면 마음도 힘들고 마음이 힘들면 결국 몸도 같이 아프게 되는 건 아닐까? 몸과 맘은 글자만도 닮았지만, 실제 그 관계도 긴밀하고 촘촘히 엮여있는 듯하다.


코로나시기에 고인이 된 분들이 내 주위만도 적지 않다. 우리 할무료 카지노 게임도, 친구의 부친과 존경하는 교회 집사님의 부친도, 남편의 외할머니도 세상을 떠나셨다.


나의 할무료 카지노 게임는 작년 여름밤 세상에 작별을 고하셨다. 할무료 카지노 게임와 할머니는 잉꼬부부라 할 수 없는 그저 정으로 자식 보고 사는 보통의 노부부였다. 그럼에도 할무료 카지노 게임는 할머니가 계신 요양병원에 자주 들락날락하시며 짐도 갖다 주시고 그 김에 할머니 얼굴도 보고 오시곤 했다. 그때 처음 할무료 카지노 게임는 할머니가 불쌍하다 하셨다. 젊었을 땐 젊었던 대로 할머니 속 깨나 썩이시고 나이 들어서는 나이 든 대로 할머니 뒤치다꺼리 하며 투덜투덜 불평을 늘어놓으시던 할무료 카지노 게임. 그 속에 할머니에 대한 측은지심 같은 건 없었다. 그저 같이 사는 할망구정도로 보셨을까. 그러다 할머니가 심약해져 요양병원 생활을 하시자 몇 번 찾아가 뵙더니 “니 할마이가 가여워” 하셨다. 그것은 할머니가 요양병원에 계셔서라기보다 나이 들고 몸이 아파 병자 취급 받는 것이 가엾게 느껴진다는 의미였던 것으로 나는 기억한다. 나이 들어서는 병자가 병자 취급 받아도 그것이 그렇게 서글프고 서운하고 화나고 기운 빠지는 일인가 보다. 하긴 어린애가 환자로 돌봄 받는 것과는 사뭇 다른 광경이 연출되기도 하니까.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할아버지는 더 이상 누군가를 돌볼 필요가 없어졌다. 교회도 좀체 나가지 않으셨다. 몸과 의지가 약해져 꼭 필요한 곳이 아니면 외출을 삼가셨다. 교회는 달에 한 번, 집 앞 병원은 보름에 한 번 즈음 다녀오셨다. 거기에 코로나까지 덮치자 할아버지의 외출은 더 요원해졌다. 결국 할아버지의 죽음은 직접적인 코로나로 인함은 아니었지만 할머니의 죽음으로 마음이 쓸쓸해진 가운데 활동량까지 급감한 탓이었으리라.

사실 나는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나 할무료 카지노 게임가 돌아가셨을 때 큰 슬픔을 느끼지 못했다. 돌아가시기 전 혹시 앞으로 못 뵙게 되면 어쩌지 하는 마음으로 찾아뵙고 이야기 나누고 전에 없던 포옹을 해드리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큰 후회와 슬픔은 없었다. 그렇다고 그 마음이 영구한 것은 또 아니다. 내가 철이 없었지, 더 친절하고 따뜻하게 대해드릴 걸, 너무 죄송하고 후회된다, 많은 사랑을 주셨었지, 정말 감사했지, 나를 많이 참아주셨지, 더 잘해드릴 걸 등 조용한 후회는 끝이 없다.




친구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해양업에 종사하시던 부친은 대만 앞 어느 해협에서 죽음을 맞이하셨다. 아직 30대 중반의 친구는 이 황당한 소식에 마냥 놀라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그녀는 장녀였고 그녀의 일생은 장녀의 역할을 감당해나가는 연속이었다. 어머니는 바다에 나가신 아버지의 부재를 큰딸에게서 위로받았고 크고 작은 일에 그녀를 의지해왔다. 가엾은 나의 친구는 어머니와 한참 어린 여동생을 보살피는 일에 몰두된 삶을 살았다. 그것은 바람직한 관계가 아니었다. 그녀는 가장이 아니라 딸이었으니까. 더군다나 이제 그녀는 결혼한 여성으로서 남편과의 거리를 좁히고 어머니와의 적정거리는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어머니의 자립에 힘을 실어드려야 했고 그것은 돈을 보태거나 감정적으로 엮이는 식으로 될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매정함이 요구되는 일이었다.

여전히 갈팡질팡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지만 다행히 그녀는 지혜롭고 현숙한 여인이다! 친구는 아버지의 죽음에서 감사의 제목을 찾기 시작했다. 그녀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으로 온 가족이 함께 송구영신예배를 드렸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그날은 12월 31일이었고 그들은 함께 한 해의 마지막을 돌아보고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감사의 예배를 드렸다. 송구영신의 의미는 아버지의 죽음에 이르러 더욱 아름다운 복선을 드리웠다. 고달픈 인생을 뒤로 하고 새로운 시작을 향해 내딛는 발걸음에 예배의 복선은 우연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여전히 친구는 어머니로부터 자유하기 위해 많은 노력과 고민을 거듭하며 점차 방법을 강구해나가는 중이다.




이번에는 존경하는 교회 집사님의 부친이 소천하셨다. 나와 남편이 당장이라도 깨어질 것만 같던 그 시기에 그분은 물심양면으로 우리를 도와주셨다. 아니, 퍼주셨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이다. 집사님은 낭비라고 볼만큼 우리를 도우셨다. 그분은 우리가 아니더라도 그렇게 그분의 물질과 진심을 아낌없이 내어주시고는 했다. 그분의 사업이 성공을 거두든 침체기를 겪든지 그분은 놀라울 만치 그대로였다.

우리가 보낸 무료 카지노 게임의 글에 집사님이 답장을 보내주셨다. 평소의 괴짜 집사님다운 반응이었다.


“감사합니다. 큰 무료 카지노 게임와 소망을 느낍니다. 아버지께서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보혈로 천국에 입성하셨습니다! 지난 3일 동안 환송잔치 끝내고 어제 에덴의 낙원에 안치하였습니다. 다시 한 번 깊이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불과 한 달하고도 보름 전 남편의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 미국에 계신 아버님과 어머님을 대신해 남편을 따라 서울의 모 장례식장에 가 3일장을 치렀다. 지금껏 가족장례는 기독교식으로만 지내온 나에게 불교장례는 무척이나 새로웠다.

첫날 그 깊이 깔린 우울감에 당혹스러웠다. 당연한 얘기지만 교회장례의 정서를 그곳에서 기대하긴 힘들었다. 함께했던 날을 그리며 슬퍼하면서도 다시 만날 날을 고대하며 기꺼이 기다리는 일말의 여유와 수용이 없었다. 이제까지의 추억과 우스꽝스런 사건들에 이야기꽃 피우며 울고 웃는 자유로움과 편안함도 느낄 수 없었다. 저세상으로 떠난 이를 향한 애끓는 후회와 안타까움이 초라한 감정의 껍데기가 되어 무거운 공기 중을 타고 부유했다. 우울감과 체념이 마치 주인이라도 되는 양 기세를 부렸다. 저승을 위한 통곡과 정성어린 제의가 끊이지 않았다. 통곡과 정성, 정성과 통곡의 연속이었다. 어쩌면 내가 불교장례에 익숙지 않고 의식의 본 의도에도 무지하여 그렇게 느끼는지 모르겠다. 여하튼 첫인상은 그랬다. 친정 가족장례의 풍경이 그리웠다. 후회 남는 과거이지만 사랑하려 애썼고 앞으로도 사랑할 기회가 남아있다는 것에 우린 늘 무료 카지노 게임받았다.




문득 할아버지를 무료 카지노 게임 못 만난다면, 생각해보았다. 우리가 정말 무료 카지노 게임는 서로의 얼굴을 보지 못한다면, “할아버지 사랑해 고마워 미안해” 말할 수 없다면. 우리가 칠팔십년의 생애를 뒤로 하고 진정 끝나버리는 하루살이 버금의 인생이라면. 슬프고 화나고 억울하고 허무하단 말 외에 과연 어떤 말이 필요할까?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신이 있음을 안다는 건 말로 못할 큰 무료 카지노 게임이다. 더불어 그 신이 공의이자 사랑이시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밀려오는 안도감과 안정감이란 말로 다할 수 없다. 믿을 수 없는 것을 믿는 자는 자못 무지하고 어리석어 보이나 실은 그렇지 않다. 그는 마치 깊은 우물에서 청결한 물을 퍼 올려 마신 해갈된 이와도 같다. 해갈의 축복은 누구에게나 열려있고 이는 오래 전 그리스도라 불린 예수에 의해 선포되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요 7:3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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