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과 정치"
깨달은 개인은 정치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며, 특히 진보정치적 성향을 띠게 된다는 이야기가 우리 주변에는 적지 않게 퍼져 있다. 이를 영성이나 의식수준과도 연결짓는다. 깨달아서 의식의 레벨이 높은 이는 진보정치를 추구하게 된다는 식이다. 심지어 마르크스주의가 인간을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영적 사상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렇게 보면 깨달음이라는 단어는 분명 알게 모르게 사람들에게 상당한 권위로 작동하는 듯도 싶다. 흡사 자기가 하는 일을 가장 높은 가치를 지닌 일인 것처럼 치장하고 싶을 때 자주 사용하는 액세서리다.
그러나 어떠한 방식으로 깨달음이라는 언어를 자아의 장난감으로 삼고 싶어하든 간에, 깨달음은 정치와 아무 상관이 없다. 진보나 보수 등의 그 어떤 정치담론도 깨달음과는 전적으로 무관하다.
물론 깨달았다고 하는 이가 정치활동을 할 수도 있고, 강한 정치적 편향을 보일 수도 있다. 그에게는 취향이 있다. 오히려 더 자유롭게 자신의 취향을 누리는 일은 아주 온전한 그의 자유다. 그러나 마치 정치적 지향이 깨달음과 관련된 어떤 당위의 진리인 것처럼 말하고 있을 때, 그 말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누군가가 깨달았다고 할 때, 거기에는 정치적 기제가 단 1%도 작용하지 않는다. 좋은 정치가 인간을 깨닫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정치와 완전히 무관하게 일어나는 것이 깨달음이라는 현상이다.
쉽게 말해, 정치로는 못깨닫는다.
물론 우리는 더 공정하게 말할 필요가 있다. 철학으로는 못깨닫는다. 문학으로는 못깨닫는다. 역사로는 못깨닫는다. 경제로는 못깨닫는다. 코인으로는 못깨닫는다. 부동산으로는 못깨닫는다. 심리학으로는 못깨닫는다. 우리가 행위하는 그 모든 상대적 소재로는 깨닫지 못한다. 정치라고 특별히 못깨닫는 소재인 카지노 게임 아니라, 정치 또한 다른 여타의 소재들처럼 똑같이 깨달을 수 없는 상대적 소재일 뿐이다.
오히려 문제는 거꾸로 정치의 특별성을 주장하는 데 있다. 정치를 어떻게든 깨달음과 연관지으려고 하거나, 또는 정치적 지향으로 깨달을 수 있는 것처럼 주장하는 일이 유독 정치와 관련되어서는 빈번하게 일어난다.
이 말은 많은 사람들에게 정치라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게 자리잡고 있는 현실을 시사한다. 그러나 어떠한 현실에 더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고 거기에 힘을 부여한다고 해서, 그것이 깨달음의 현실이 되는 것은 아니다. 깨달음은 투표나 다수결, 또는 높은 평점이나 '좋아요'의 숫자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닌 까닭이다. 그 모든 양적이며 상대적인 척도를 떠나서 절대적으로만 가능하기에 그것이 깨달음이다.
이를테면 '주체적 의식이 깨어있는 시민'이라는 근대정치적 표현이, 마치 깨달음을 암시하는 것처럼 우리에게 언어적 착각을 제공하지만, 또 그에 따라 근대사회가 요구하던 시민상이 되어갈수록 자신이 깨달음에 근접해간다는 착각도 생겨날 수 있지만, 실제의 깨달음은 이런 것들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완전히 다른 체험이고, 다른 변화이며, 다른 현실이다.
근대시민주체를 가리키는 것 같은 '깨달은 개인'이라는 표현은 시작부터 깨달음이 그 자신과 얼마나 무관한지를 드러내주는 표현이다. 깨달음은 깨달은 개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을 깨닫는 것이다. 비슷한 표현으로, 내가 깨닫는 것이 아니라 나를 깨닫는 것이라고도 말한다.
개인이라는 개념이 출현한지는 인류사에서 오래 되지 않았다. 그 개념이 정말로 무엇을 뜻하는지에 대해서도 우리는 아직 생소하다.
개인이 타인과 분리된 원자론적인 개체를 지칭한다고 생각한다면 결코 그렇지 않다. 그러한 원자론적 개체는 근대시민사회의 산물이다. 이른바 자아는 근대의 유산이다. 이러한 원자론적 자아는 혼자서는 늘 불완전하고 불안하기에 연대를 이루어야 한다는 당위가 설정된다. 정치는 근본적으로 이러한 결여의 인간관에 입각한다.
그러나 실존주의의 태동과 심리학의 발달로 인해 인간은 현대에 들어와 개인이라는 개념을 획득하게 되었다. 이러한 개인의 개념은 '통째인 것'이자 '쪼개질 수 없는 것'이고 '대체될 수 없는 것'이다. 즉, 전체를 구성하는 어떤 부품으로서의 인간묘사가 아니다. 오히려 인간은 개인인 그대로 온전하고 충분하다.
이것은 물론 한 인간이 모든 기능을 다 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다. 인간이 살고 죽는 문제, 곧 그가 존재하는 문제에 있어서 어떤 집단적 가치도 개인에 우선할 수 없으며, 그처럼 개인의 존재는 집단적 가치로 보완되거나 충족될 수 있는 차원의 카지노 게임 아니라 그 이상의 의미를 담보한다는 카지노 게임다.
이러한 개인의 실존적 의미를 부정하기 위해 강압과 억지의 프레임도 생겨났다. 개인 대 집단이라는 거짓된 구도를 상정해, 어느 쪽에 더 중점을 두어야 한다든가, 또는 양자간의 균형을 잘 잡아야 한다는 식의 논의가 그것들이다. 그건 이미 개인 대 집단이라는 대립구도의 프레임을 진리틀로 전제해놓은 의도적 오류에서 출발한 속임수들이다.
개인과 집단은 언어적 뉘앙스와는 다르게 조금도 대립하지 않으며, 애초에 개인의 개념 자체가 대립을 전제하지 않는다. '통째'라는 것은 개인 안에 모든 속성이 다 있다는 함의인데 왜 대립하겠는가? 근대의 원자론적 개체나 집단과 대립하는 성질을 가질 카지노 게임다. 그리고 그러한 원자론적 개체를 통제해서 집단에 편입시키기 위해 근대적 정치담론들은 작동해왔다.
인간은 자신이 모자라고 부족하다고 생각할 때 관계에 의존하고 집단에 의존한다. 그렇게 집단은 자신의 힘을 증진시킬 수 있다. 집단에 힘이 모인 만큼 결과적으로 개별적 인간은 스스로를 더 무력하게 경험하게 될 카지노 게임다. 이 순환은 계속 되먹임을 이루며 반복된다. 전체주의의 출현은 한순간이다.
실존주의는 독재하는 왕에 저항한 전통이 아니라, 그보다 더한 독재자, 심지어 자신은 독재가 아닌 척하는 은밀한 독재자인, 바로 집단주의의 독재에 저항한 전통이다. 오늘날은 대중독재라고도 부를 것이다.
실존주의의 뿌리는 종교적 반항이다. 이 의미는 상대적인 모든 것에 복종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상대적인 그 모든 것은 개인을 개인이지 못하도록 약화시키려는 것들, 인간의 온전성을 훼손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붓다와 예수의 이명은 동일하게 '복종하지 않는 자'였다. 그들은 누구보다 종교적 반항의 태도로, 개인이 얼마나 온전한 존재인지를 밝히려고 한 인물들이다. 실존주의의 선배들인 셈이다.
붓다와 예수가 개인의 온전성을 말하기 위해 가장 먼저 한 일은, 자신은 정치를 위해 이 세상에 오지 않았다는 선언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메시지가 정치와 전적으로 무관함을 강조하며, 그 둘 사이를 철저히 분리하려 했다. 이들의 후예답게 실존주의는 정치적 길을 제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회복의 길은 존재론적 각성 내지 종교적 자각에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혼자 산속에 틀어박혀 자기수행만 하는 어떤 폐쇄주의자의 모습처럼 악의적으로 조롱되곤 한다. 자기만 아는 이기주의자라는 비난도 감행된다. 원자론적 개체를 공박하던 그 습관 그대로 새로이 출현한 개인 또한 동일하게 죄책감으로 옭아매려고 하는 카지노 게임다.
물론 실존적 개인에 대해서는 애초 번지수가 틀린 공박이다. 실존적 개인은 자기구원을 위해 산에서 살지도 타인구원을 위해 광장에서 살지도 않는다. 그것들은 다 대상에 매인 상대적 관계를 묘사할 뿐이며, 인간은 그러한 관계의 논리의 한참 위에서 온전한 까닭이다. 실존적 개인은 분명하게 상대적 관계를 신적인 것으로 우상화하는 기제에 전혀 동의하지 않는데, 관계 내지 관계의 대상을 신처럼 섬기는 이는 결국 관계를 통해 자기가 신이 되려고 하는 이이기 때문이다.
정치는 관계의 궁극적 기술이다. 관계의 힘을 집중시켜 한 개체 또는 한 집단에게 임의적으로 신적인 권능을 부여하는 카지노 게임다. 신이 되기를 꿈꾸는 인간이 시도하는 유사신성의 재현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실존주의의 인간성 회복이란, 관계를 통해 인간이 신이 될 수 있다고 믿는 이 집단주의적 최면과 도취에서 해방됨으로써 표현 그대로 신이 아닌 인간의 자리를 다시 찾는 것이다. 자신의 한계를 정확히 알고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자연스레 인간에 대한 배려가 된다. 자신의 한계를 사는 자는 타인에게도 그 한계 이상을 강요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인간 자신의 한계를 알고 사는 그 일을 우리는 성숙함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차원에서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는 오만한 말은 한계를 모르거나 무시하는 미숙함에서 비롯한다. 관계의 우울증은 바로 이 지점에서 발생한다. 한계가 무시되기에 상대적 관계에서 구원의 좌절은 필연이며, 그 결과는 우울이다. 그러다가 또 관계를 통한 신적 구원을 꿈꾸고 다시 또 좌절하기를 반복하니 우울은 만성적이다. 이 맥락에서 관계의 우울증은 인간을 신으로 착각하며 기대하는 이의 특유한 증세라고 할 수 있다.
도덕주의가 대표적으로 이러한 관계의 우울증을 양산한다. 도덕주의는 모두가 동일한 이념에 따르면 신처럼 될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하며 인간을 그렇게 추동한다. 도덕주의에 따르기를 거부하는 이는 신이 되기를 거부하는 카지노 게임니 자연스레 그 반대편에 있는 악마다. 이렇게 도덕주의는 "너 악마야?"라는 협박을 통해 추방의 두려움을 자극함으로써 자기가 목적하는 이념의 방향성대로 인간을 몰아간다.
분명하게 도덕주의는 집단주의의 가장 큰 무기다. 때문에 도덕주의가 팽배한 사회일수록 얼마나 전체주의적 성질을 갖고 있는지를 우리는 가늠해볼 수 있다.
같은 맥락에서 도덕은 자아의 가장 큰 무기다. 자아는 도덕의 칼 아니 펜을 휘두름으로써 타자를 자기와 동일한 성질이 되도록 복속시키려 한다. 자아가 하는 일은 이러한 동일성의 반복이다. 근대를 대표하는 폭력성의 형태다.
정치공학자 칼 슈미트는 정치의 성립은 피아식별에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카지노 게임 정확하게 자아의 핵심적인 속성이다. 자아는 자기와 타자를 구분함으로써 자아로 성립된다. 그리고 무수한 타자들과 대립하며 그것들을 통합해나가려고 한다. 그럼으로써 자아 자신을 더 커다란 형태로 완성하고자 하는 카지노 게임다. 자아의 활동 자체가 이처럼 정치적이다.
자아를 정치기계장치라고 말하는 일은 타당하다. 프로이트의 자아론에서도 자아의 천성은 정치적 협상가다. 초자아와 원초아 사이를 오가며 그 둘을 자기에게 가장 이득이 되는 형태로 조종해내려고 끊임없이 시도하는 카지노 게임 자아다. 부모 사이에서 아동이 하는 일과 유사하다. 부모를 조종하는 일에 성공했던 경험들이 있는 이러한 아동은 자기가 신적 존재라고 착각한다. 프로이트는 정신분석의 목표가 이와 같은 자아의 오만성을 좌절시키는 일이라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자아를 비대하게 팽창시키는 일에는 아무런 이득이 없다고 실존주의 또한 결론을 내렸다. 붓다와 예수를 위시한 종교적 선각자들이 일찌감치 내렸던 결론에 실존주의 또한 도달한 것이다.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겠다고 진격한 자아의 폭주로 인해 생겨난 두 번의 세계대전과 대학살극을 목격한 뒤 실존주의는 자아가 아닌 어떤 길을 말하려고 시도했다.
깨달음.
실존주의는 왜 선불교와 유사하다고 평가되는가? 그 방향성과 방법론의 유사성 때문이다. 더 근본적으로는 자아가 아닌 삶의 길을 모색하고 있어서다.
삶은 인간을 닮았다.
분리될 수 없는 통째이며, 대체될 수 없다. 누구에게나 삶은 한 번뿐이다.
이것은 무슨 말인가?
삶은 애초 피아식별이 아니라는 뜻이다.
우리의 모든 삶은 정치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그 말은 자기 부모가 자기 삶의 전부라고 하는 말과 같다. 그가 얼마나 효성이 지극한지는 이해하겠지만 그 말이 사실은 아니다. 피아식별은 인생 초기의 양육관계에서 생겨난 인식의 착각이지, 우리의 삶은 애초 피아식별로 펼쳐져 있지 않다.
공원에 나가 풍경을 한번 봐보자.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우리편이고, 어디서부터가 상대편인가?
우리 앞에 펼쳐지고 있는 현상들은 그렇게 분리될 수 없이 언제나 통째로 우리에게 개시된다. 심지어 풍경과 우리 자신도 분리되지 않는다. 우리가 풍경을 바라보고 있는 카지노 게임 아니라, 우리가 그 풍경 속에 있는 카지노 게임며, 더 정확하게는 우리도 이미 풍경으로 함께 포함되어 바로 그 삶인 카지노 게임다.
언어는 우리가 세상을 피아식별의 이원론으로 인식할 수 있게 도와준 도구였다. 그 일은 무척이나 편리했지만, 역으로 이제 인간의 인식은 언어에 의해 지배당하게 되었다. 이원론의 렌즈로 모든 것을 보게 된 카지노 게임다. 그것도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가치화의 필터를 통한 평가작용을 끊임없이 이루어가며.
평가받는 카지노 게임 두려운 이유는 자신이 지금 평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원론의 가치평가로 살아가다보니 인간은 늘 지치게 되었다. 상시 감시하는 카메라 앞에 놓인 것처럼 높은 평가를 받아야 한다는 압박 속에서 긴장과 불안에 떨게 되었다.
그래서 상담자는 '평가하지 않는 시선'을 훈련할 것을 요청받는다. 이것은 다른 말로 '현상학적 시선'이라고 불린다.
이는 언어의 이원론을 극복하고 통째로 봐보려는 시도다. 삶의 온전성을 회복하려는 시도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러한 시선의 주인이 바로 개인이다.
개인은 온전함을 시작하는 자. 이미 펼쳐진 온전함을 확인하는 자. 그럴 수 있는 이유는 개인이 이미 온전하기 때문이다.
깨달음은 이 온전한 시선으로 자신을 보게 될 때 일어난다.
물론 잘 알려진 얘기로, 눈은 자기 자신을 볼 수 없다. 그래서 그게 곧 자기 자신이다.
온전한 눈으로 보고 있던 자는 자신이 완벽하게 온전하다는 그 존재의 사실을 눈치채고야 만다. 소스라치게 놀라며 실감하고야 만다. 볼 수 없는 것을 지혜의 눈으로 본 카지노 게임다. 만나고야 만 카지노 게임다.
그 엄청난 카지노 게임 바로 개인의 의미다. 우주에는 모든 카지노 게임 다 있다. 그래서 우주는 온전하다고 말한다. 개인의 크기가 정말로 우주와 같다. 개인은 우주 전체와 동급의 존재론적 의미를 지닌다.
깨달음을 통해 인간은 원자론적 개체의 문제와, 상대적 관계로 만들어진 집단주의의 문제를 동시에 넘어, 비로소 문제없는 그 자신이 된다. 스스로의 근거를 스스로의 존재 자체에서 얻게 된다.
이렇게 한 번 회복하게 된, 또는 상기하게 된 존재의 근거는 계속 작동한다. 원자론적 개체로 고립된 것처럼 두려울 때, 그리고 집단주의의 압력으로 인해 질식할 것만 같을 때, 인간은 그가 그 자신으로서 온전한 그 자리를 언제든 다시 찾을 수 있게 된다.
우주에서 가장 본원적인 이 자리만을 향하고자 하는 마음을 신학자 틸리히는 '존재에의 용기'라고 명명한다. 그는 개체적 가치를 주장하는 마음도, 집단주의에 몰두하는 마음도, 다 상대적인 카지노 게임라 근본적인 인간성 회복을 이루지 못한다고 말한다. 결국 피아식별의 인식으로는 인간의 깊이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카지노 게임다.
눈은 자신을 위해 뜨는 카지노 게임다. 남들에게 잘 보이라고 뜨는 카지노 게임 아니라, 자신이 잘 보기 위해 뜨는 카지노 게임다. 바로 자기 자신을.
자신이 정말로 어떠한 존재인지를 이해하기 위해.
그러면 그게 곧 인간에 대한 이해가 된다.
더는 자신과 타인이 상대적인 변별의 구조를 이루는 것으로 보이지 않으며, 즉 자아들의 대립구도로 보이지 않으며, 그 구도 속에서 관계의 이득을 챙기기 위해 교묘한 가식과 위선의 태도로 편법과 반칙의 행위를 은밀히 일삼는 행위가 멈추게 된다. 정직한 절대적 시선 속에서.
그 시선은 나를 통해 보게 된 인간만을 향하며, 그 시선으로 말미암아 그 인간이 바로 나임을 깨달은 카지노 게임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파편화된 부품 같은 상대적 소재로 경험할 때, 그렇게 나를 망각하고 또 상실해 있을 때 생겨나는 것은 커다란 결핍과 두려움이다. 결핍을 채우기 위해 자신이 뭔가 진정한 어떤 카지노 게임 되어야만 한다는 강한 압박감에 우리는 늘 쫓기게 되며, 그럼에도 자신이 아직 진정한 무엇인가가 되지 못하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상대적인 적을 만들어낸 뒤 그 적으로 인한 두려움에 떨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의 귀결점은 늘 거대한 화다. 자신의 길을 가로막고 위협하는 적에게 난 화 같지만, 근본적으로는 자신이 바라는 자신이 될 수 없어 자신에게 난 화다.
상대적인 소재를 신격화해서 추구하고 있을 때는 이러한 화의 출현은 필연이다.
이와 같은 화는 종종 선함과 정의라는 이름이 붙어 그 소비가 가속되곤 한다. 이것은 자아의 작동방식과 동일하다. 자아가 꿈꾸는 것은 영웅이다. 그리스 신화에서 묘사되는 것처럼, 스스로의 힘으로 신의 자리에 도달하는 인간상이다. 화의 기운이 핏줄을 타고 전신을 가득 채울 때 자아는 자신이 바로 이 영웅이 된 것처럼 경험한다. 일상 속에서 무기력했던 '가짜 자신'의 모습에서 깨어나 이제 진정한 영웅으로서의 자기 자리를 찾은 것만 같다. 자아가 화를 좋아하는 이유다.
그러나 화의 도핑으로 인한 도취가 끝나면 몸은 더 괴롭다.
화의 과잉된 소비에 대한 반작용으로 우울은 한층 더 무겁게 찾아든다.
이 무거운 기운을 날리기 위해 더 거센 화가 필요할 카지노 게임다.
심리학적으로는 중독상태일 뿐인 이 반복의 현상에 근대는 역사변증법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인류는 바로 이런 방식으로 진보해나간다는 자의적 환상을 부여했다.
우울증이 환상의 무게에 눌려 생겨난 증세라는 점은 언제나 의미깊다.
우리는 환상에서 벗어나 살 수 있는가?
그러고자 발명된 카지노 게임 바로 깨달음이다.
내연기관의 발명만큼이나 이것은 인간의 정신문화사에서의 커다란 혁명이었다.
모든 환상은 이렇게 작동한다.
"내가 있어야만 너는 (행복하게) 살 수 있어."
깨달음은 바로 그것이 환상임을 깨닫는다. 그리고는 상기한 표현을 가장 사실적인 형태로 바꾼다.
"내가 있어야만 나는 살 수 있어."
나는 그 어떤 상대적 소재에 의존하지 않고도 처음부터 나였을 뿐이고, 오직 나에만 의지해서 언제나 나일 뿐이었다. 스스로를 등불로 삼아 살면 된다는 붓다의 유언처럼, 또 "나를 따르라."라는 예수의 고백처럼.
나를 잃은 결여의 자리에 환상이 침투해 들어와 자신이 중요한 보물인 것처럼 그 자리에 대신 서며, 이제 내가 나로 선 그 귀하고 온전한 자리에 더는 환상이 머물 곳이 없다.
누군가가 나의 자리를 대신 찾아주어야 하는가?
어느 자리에서라도 나를 잃을 수는 없이 나는 반드시 거기에서도 나일 뿐이다. 이런 자리에서는 나는 나로 존재할 수 없다고 환상에 사로잡혀 부정하던 그 자리에서도 나는 그러한 나로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니 나는 불가능성의 가능성. 나로 존재하는 일이 불가능하다고 믿어진 그 모든 곳에서 나는 계속 발견된다. 분명히 발견되며, 끝없이 발견된다.
깨달음은 나를 더 끝없는 자유로 계속 새롭게 발견하기 위해 만들어진 영원의 발명품.
인간이 인간을 위해 만들었던 것 중 제일 좋은 카지노 게임다. 다른 상대적인 모든 것과 비교를 불허한다.
정치? 깨달음과 아무 상관이 없다. 정치적 지향을 갖는다고 깨달음이 더 깊어지는 것도 아니고, 깨달음을 잘 실천하는 것도 아니다. 정치가 깨달음이 나아가야 할 방향성인 것은 더욱 아니다. 이러한 생각들은 유교주의의 잔재이거나, 깨달음이 아니라 유사깨달음의 현상을 체험한 이들이 자주 취하는 결론인데, 이에 대해서는 다른 장에서 밝히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