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분만 의사의 선택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현재는 짧고 미래는 길다."
이 산모는 간절히 임신을 원했고 임신 기간 동안 출산을 포기할 마음도 전혀 없었다. 그러나 이런 경우와는 다르게 출산을 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경우도 종종 있다. 소위 낙태 수술을 원하는 경우다. 원치 않는 임신을 하게 되어 출산을 포기할 때는 현대 의학의 발전으로 요즘은 비교적 안전하게 낙태 수술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의학이 발전하지 않았던 과거에는 임신은 곧 출산과 같은 의미였다. 독초를 먹는다거나 복부에 강한 충격을 가한다거나 하는 등 유산을 시키기 위해 임신부의 생명에 대한 위협을 무릅쓰고 낙태를 선택하는 사람들이 있기는 했지만 그런 사례는 적었다.
출산과 낙태라는 두 가지 선택 사이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는 분들도 있다. 임신부의 건강에 대한 위협을 포함하여 고민하는 이유는 다양하다.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여성이 출산을 선택하는 것이나 먹고사는 문제에 허덕이는 가난한 부부가 출산을 결정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출산이 고민스러운 경우는 태아가 기형을 가지고 있거나 기형이 아니더라도 태아의 건강에 이상이 있어 정상 생활이 쉽지 않을 것으로 예상되는 경우다.
태아 기형의 종류는 다양하며 출산 후 비교적 간단한 수술로 완치를 기대할 수 있는 경우도 있지만 염색체 이상처럼 현재의 의학 기술로는 치료가 불가능한 기형도 있다. 내부 장기에 여러 가지 이상을 함께 가지고 있는 복합 기형의 경우도 출산 후 정상 생활이 가능할 정도로 교정하는 시술이 생각만큼 간단하지 않은 경우도 종종 있다.
개인 의원을 운영하면서 산모와 태아의 안전을 위해 태반의 위치가 비정상인 산모나 중증의 내과 질환을 가진 산모 또는 40 세 이상의 고령 산모와 같은 고위험군 산모는대학병원으로 옮겨서 진찰을 받고 출산을 하도록권한다. 태아 기형은 산모의 나이와 관련이 깊기 때문에 노산 산모를 보지 않으면 태아 기형의 사례도 그만큼 적게 만나게 마련이다. 그렇다고 해서 태아 기형을 동반한 임신부를 만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몇 년 전에도 그런 사례가 있었다. 우리 병원에서 이미 두 아이를 낳았던 산모의 사례다. 이 산모는 2 아이를 잘 출산하고 다시 임신이 되어 3 번째 아기의 출산을 위하여 방문하셨다. 이전 두 번의 출산 동안 밝은 얼굴로 병원을 다니셨고 또 진통도 잘 견디어 나에게는 좋은 기억으로 남은 산모였다. 우리 병원의 열렬한 응원자이기도 했다. 출산한 후에도 간식거리 등을 챙겨 종종 병원에 놀러 오시곤 했다. 그러나 이번 3 번째 임신에서는 임신 초기에 초음파 검사에서 이상 소견이 관찰되었다. 대학병원에서의 정밀 초음파 검사를 위하여 의뢰를 하였고 검사 결과 태아의 기형이 강력히 의심되는 상황이었다.
출산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산모께서 나에게 조언을 구했다. 이미 가족들은 모두 출산을 포기하는 쪽으로 결론을 내린 모양이었다. 나라고 별 다른 의견을 내기는 어려웠다. 산모는 항상 맑고 명랑한 분이었는데걱정과 근심으로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여러 가지 가능성을 감안하여 본인이 최종 결정을 하는 수밖에 없다고 말씀드렸다. 기형이 있더라도 염색체 이상이 아니라면 출산 후 치료하는 방법도 있을 수 있다고도 말씀드렸다. 출산으로 인해 본인의 삶이 얼마나 힘들어질지, 또 아이는 과연 후유증 없이 회복되어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을지 지금으로서 정확히 알기는 어렵다. 다만여러 가지를 고려해서 출산할지 말지 가족들과 잘 상의하시라고 했다. 물론 산모 본인의 생각이 제일 중요하다고 조언해 드렸다.
그 산모가 만났던 대학병원의 의사들도 출산을 포기하기를 권했을 것이다. 나도 비슷한 취지로 말씀드렸지만 결론부터 말하면 산모는 결국 출산하는 쪽으로 선택했다. 산모는 여러 조언 중 출산을 하고 나서 치료를 하는 방법도 있다는 나의 말을 가장 크게 받아들였던 것 같다. 되돌아 생각해 보면 그녀가 가장 듣고 싶어 했던 말이 그 말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해 볼 뿐이다.
대학병원에서 출산을 택한 그 산모는 출산 후 어느 날인가 아기를 데리고 우리 병원에 인사차 왔다. 아기는 또래의 아기들보다 작았고 외부에 대한 반응도 다른 아기들보다 지체되어 있어 보였다. 식도와 심장 쪽으로 여러 복합 기형을 가지고 있어서 이미 수차례의 수술을 받았고 앞으로도 받을 예정이라고 했다.
이후 그 산모는 부인과 진료를 위하여 우리 병원에 다녀간 적이 있는데 장애가 있는 아이를 돌보다 보니 산모는 많이 지쳐 보였다. 여전히 밝은 목소리로 의연하게 대처해 나가는 것으로 보이긴 했지만 삶의 고단함이 얼굴에 흔적으로 남아서 감추어지지 않았다. 겉으로 드러 내지는 않았지만 몸과 마음이 매우 힘들 것이 뻔했다. 괜히 작은 희망의 말을 건네어 출산하도록 한 나 자신의 조언이잘한 것인지 회의가 들었다. 인간의 생명은 어떤 경우에도 소중한 것으로 그것을 지키기 위해 누구랄 것 없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환자의 생명과 건강을 지키는 최일선에선 의사에게는 그런 목적에 걸맞게 최선을 다하는 자세가 바람직하다. 그럼에도 현실에서 막상 힘든 길을 걷는 그분을 보니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이처럼 진료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태아가 이상이 있거나 산모가 이상이 있는 경우들을 만나곤 한다. 임신의 지속이 나을지 어떨지 묻는 산모에게 조언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내가 낙태 근절 운동을 하면서 산모들의 출산을 적극 독려하고 낙태 수술을 말렸던 것은 대부분 낙태가 소위 사회경제적 이유 때문에 발생하기 때문이었다. 산모의 건강이 위협받는 경우나 성폭행에 의해 임신된 경우처럼 특별한 경우의 낙태조차도 허용해 주면 안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아직 결혼 전인 미혼의 산모라는 사회적 이유로, 아이를 낳아 키울만한 돈이 없다는경제적이유로 출산을 포기하는 경우는 우리 사회와 당사자가 함께 노력하면 얼마든지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기가 심각한 기형이 있어서 출산을 고민할 때는 무어라 조언하기가 참 어렵다. 어떤 이상을 가진 아이를 출산하던 내가 키우는 것도 아니고 키우는 데 있어 내가 도움을 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나는 산부인과 의사로서 산모의 안전하고 순조로운 출산을 도우는 역할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출산과 출산의 포기.
두 갈래의 길은 대부분 사람에게는 그리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양쪽의 길이 모두 위험과 부담을 많이 안고 경우들이 있다. 그런 경우에서 나는 가능하면 중립적으로 말하려고 노력한다. 아기가 아무런 이상이 없고 산모 또한 출산으로 안게 되는 일반적 수준의 위험 이상의 위험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고민할 필요가 없이 출산을 적극 권한다. 국가의 장래를 위해서 사회의 건강한 발전을 위해서 혹은 소위 대를 잇는다는 차원에서는 아니다. 그런 것들은 출산으로 얻게 될 부수적인 효과일지 모르지만 한 개인이 출산을 할지 말지 결정하는 데 있어서 고려해야 할 요인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산모 자신의 행복과 삶의 의미 부여를 위하여 출산을 권한다. 여성이 출산의 의무를 가진 존재거나 여성이 출산의 도구이기 때문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행복할 권리를 가진 것처럼 모든 여성은 출산할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출산과 관련하여 의무가 있다면 오직 국가와 사회가 가지고 있다. 출산을 택한 여성 혹은 가족이 출산으로 하여 불행해지지 않도록 돕는 일이 그것이다.
지금도 종종 그때의 두 산모를 생각하고는 한다. 한 분은 자신의 생명을 포기하면서 확고하게 출산을 결정했고 한 분은 많은 고민 끝에 장애를 가진 아이를 출산하기로 결정했다. 두 분의 행로가 정해지는 과정에서 딱히 내가 내릴 선택은 없었다. 그저 결정에 따라 최선을 다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어찌 되었건 자신의 생명을 포기하면서 출산을 한 산모를 생각하면 가슴이 저릿하다. 장애를 가진 아이가 평생 짊어지고 가야 하는 바위처럼 자신의 삶을 속박할 위험이 높다는 것을 알면서도 출산을 결심한 산모에게 미안함과 안쓰러움을 느낀다.
자신의 생명을 포기하고 출산한 아이는 지금은 중년의 나이가 되었을 것이다.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아이는 초등학교에 입학할 나이쯤 아닐까 싶다. 태어나면서 어머니를 잃었을 아기는 어머니의 사랑이 결핍된 가정에서나마 행복한 삶을 살고 있기를 바란다. 육체적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지만 누구보다 큰 사랑을 쏟아붓는 어머니를 둔 아이의 삶도 행복하기를 바란다. 내가 출산을 도운 모든 아이들이 그렇기를 바라지만... 조각가나 미술가 혹은 음악가가 자신의 작품으로 사람들이 감동을 받고 삶에의 의욕이 더 충만되기를 바라는 마음과 흡사할 지도 모르겠다. 세상에 건강하게 나오는데 아주 작은 도움을 준 사람으로서 그런 바람을 가지는 것이 큰 욕심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어떤 아이는 비뚤어진 삶을 살지도 모르고 어쩌면 어떤 아이는 범죄자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결국 그렇게 나쁜 결과로 귀결되었더라도 처음부터 태어날 가치조차 없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삶은 정해진 궤도를 따라 목적지를 향해 달리는 열차가 아니다. 삶에는 궤도도 없고 목적지도 없다. 살아가는 과정의 모습은 언제든 바뀔 수 있다. 내가 출산을 도운 아기가 스스로 행복하고 더불어 사는 세상이 더 나은 세상이 되도록 좋은 영향을 주면서 살아가기를 간절히 바란다.
이런 세상과 저런 세상 중에서 어떤 곳을 골라서 살고 싶은지 누군가 나에게 물어본다면 나는 그렇게 대답해 줄 것이다. 현재 어느 곳이 더 편하냐 보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더 많은 쪽을 선택하고 싶다고. 왜냐하면 의미는 좀 다르지만 "짧은 만남 긴 기다림"이라는 말처럼 현재는 순간이지만 미래는 길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희망이라는 말을 좋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