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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Mar 12. 2025

자크 오디아르, <카지노 게임 추천 페레즈

해방을 원하지만 기꺼이 갇히겠어요

자크 오디아르, <카지노 게임 추천 페레즈 - 해방을 원하지만 기꺼이 갇히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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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사회에서 남성성으로 규정한 규범을 따르고 사랑하는 여성을 잘 통솔하여 가정을 꾸려라, 마찬가지로 여성은 여성성을 체화하고 사랑하는 남성을 성심성의껏 보필하도록 하라”, 이와 같은 이성애적이고 이분법적이며 절대적인 성적 규범이 몇 천 년 간 인류를 옥죄어왔다. 그렇기 때문에 여와 남, 단 두 개의 젠더(사회적이고 문화적인 성 역할이자 관행)를 거부하고 무한한 젠더를 창조하여 ‘트랜스’할 것을 독려하는 ‘주디스 버틀러’의 젠더 이론은 해방의 창구로 보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버틀러의 이론이 적용되는 실제 현장은 해방과 거리가 멀다. 버틀러는 전 세계 인류가 70억이라면 각자가 제 정체성을 자유롭게 반영한 70억 개의 젠더를 만들라고 주장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선 단 두 가지 젠더만 오가며 이분법적인 성 역할을 공고히 만드는 성전환만 발생한다. 버틀러 또한 젠더의 해방이 아니라 젠더 공고화를 불러오는 오늘날의 세태에 별 우려를 표하지 않는듯하다. 문제는 남성에서 여성으로의 성전환은 '성 관계에서의 마조히즘적이고 수동적인 역할', '꾸밈', '성 노동' 등 오늘날 페미니스트들이 타파하려는 전근대적인 성 역할을 마치 여성의 천성인 양 반복하며, 가부장제를 해체하기는커녕 부역하며 여성들을 괴롭힌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분법적 성 체계를 건립한 가부장제의 소산, '마피아'가 성전환을 하며 나타나는 자크 오디아르의 신작 역시 외피는 해방적일지 몰라도 그 속내까지 급진적이진 않을 것 같다. 그는 지극히 남성적인 집단에서 발생하는 성전환을 고찰한다.


1952년 파리 태생의 자크 오디아르는 프랑스의 영화감독이다. 그는 1994년 <그들이 어떻게 추락하는지 보라로 장편 데뷔한 이래 ‘장 피에르 멜빌’의 계보를 잇는 느와르물을 주로 연출해왔으며, 2010년대 이후에는 <러스트 앤 본과 같은 드라마, <디판 등의 정치극, 미국에서 찍은 서부극인 <시스터스 브라더스, 셀린 시아마와 동업한 멜로 <파리, 13구로 작품 세계에 변주를 가했다. 하지만 장르가 아무리 변화해도 그의 인간관은 변치 않는데, 그 철학은 미국의 시네아스트 ‘제임스 그레이’와 유사하다. 보통 '남성'인 주인공들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는 상황이 발생한다. 오디아르의 개인들은 주로 ‘범죄자’인데 이들이 악의를 띠어서 그런 것뿐만 아니라, 범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 연속된다. 주인공들은 협박을 받아서 어쩔 수 없이 청부 살해를 맡거나 절도, 강도 등의 중범죄를 저지르기에, 오디아르의 작품은 늘 '하드보일드'의 색채를 띤다.

그러나 오디아르의 거칠고도 비정한 세계에는 늘 부드럽고 세심한 손결, 자애로운 사랑, 추한 범죄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예술이 뒤섞인다. 주로 백인 남성이 주인공인 세계에 늘 유색인종과 여성이 섞여들며 '다름'을 환기한다. 이로써 범죄를 장려카지노 게임 추천 구조에 잠식될 뻔한 주인공들은 주체적인 꿈을 되찾고 제 삶을 되찾으려한다. 물론 이러한 과정에서 여성을 부수적으로 사용카지노 게임 추천 도구적인 태도가 썩 달갑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다만 최근 <파리 13구와 같은 작품에서는 그녀들의 섹슈얼리티를 지지카지노 게임 추천 등 여성 역시 주체적으로 나아가야 함을 부각한다.

주인공들은 대체로 '청년'이다. 이들은 늘 기성세대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기성세대는 현실을 장악하였기에, 청년들은 신문, 사진, 사전 등 가상 세계, 최근에는 사이버스페이스에 깊게 몰입한다. 청년들은 현실에 제 발을 뿌리내리지 못하기에 대안 공간을 찾거나, 아니면 픽션으로 상상한다. 그래서 주인공들은 궁극적으로 성별뿐만 아니라, 기성세대가 드리운 짐까지 벗어던지며 진정한 자유를 이룩하려 한다.

오디아르의 자유를 향한 『오딧세이아』에선 늘 동물이 상징으로 등장한다. 가령 <그들이 어떻게 추락카지노 게임 추천지 보라에서 애완견은 기성세대에게 길러지는 유약한 청년, 이후 등장카지노 게임 추천 사냥개는 그들에 의해 훈련되고 부패한 주인공의 상태를 드러낸다. <러스트 앤 본, <디판, <시스터스 브라더스에서 각각 등장카지노 게임 추천 범고래, 코끼리, 야생마는 가축화를 거부하고 야생으로 돌아가려는 본연적 정체성의 상징, 곧 자유를 그리워카지노 게임 추천 인간을 드러낸다.


이러한 관점을 종합하자면 오디아르가 영화에서 다루는 존재들은 반 야생-반 가축 사이의 애매모호한 지위에 속한다. 이러한 이중적인 결합이 <에밀리아 페레즈의 도입부터 연속된다. 본 작품은 오디아르 최초의 뮤지컬이다. 그렇기에 도입에서도 여성 가수의 목소리에 전자음이 덧입혀진 배경음악이 신묘하게 흘러나온다. 그 목소리에 취한 채로 스크린을 응시하다보면 아무 생각도 들지 않을 것이다. 그 음악 자체로 꽤 만족스러울 것이기에 잡생각이나 의문스러움이 끼어들 틈이 없다.

그런데 검은 화면에 무언가가 떠오르기 시작하면 감상자는 의아함을 느낄 것이다. 아무리 기계음이 합성되었어도 여성의 목소리임이 확연한데, 정작 시각은 판초를 입은 남성 가수들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의 편견일까, 남성이어도 그런 목소리를 낼 수 있을 가능성이 전무하지는 않을 테니. 하지만 확실히 이 시퀀스에서 시각과 청각은 부조화하다. 청각의 가사와 시각의 입모양이 전혀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미지 속 그들이 남의 목소리를 자신의 것인 양 따라 부르는 립싱크임이 오히려 더 뚜렷해진다. 이윽고 남성 가수들의 얼굴이 희미해지더니 익스트림 롱숏으로 포착된 멕시코의 정경이 디졸브된다. 그런 목소리와 존재들로 멕시코라는 국가는, 더 나아가 아메리카라는 대륙이 구성되고 있다는 얘기인가. 남성이 여성을 대신 말하고, 프롤레타리아가 자신을 착취카지노 게임 추천 부르주아를 대신 대변카지노 게임 추천 '트랜스'의 땅…


남성이 여성을 대신 말하고, 피해자 여성이 가해자 남성을 대신 변론하며, 빈자가 부자를 걱정카지노 게임 추천 세태는 어째서 발생카지노 게임 추천가? 이율배반적이고 부조리한 것을 합리화카지노 게임 추천 그 괴상한 마력, 니체의 표현으론 ‘디오니소스적 원리’(그리스 신화 속 포도주의 신에서 이름을 따온 디오니소스적 원리는 본성적이고 감각적이며 비이성적인 힘, 밤의 혼돈 등을 의미한다. 이와 반대되는 태양의 신인 아폴론적 원리는 명석한 대낮의 이성과 합리성을 뜻한다)가 바로 본 극이 선택한 뮤지컬이라는 장르를 추동카지노 게임 추천 원동력이다.

<카지노 게임 추천 페레즈에는 조 샐다나, 셀레나 고메즈 등 유명한 기성배우들이 대거 출연하긴 했어도, 이들이 마치 일반인처럼 보이게끔 본디 그들의 얼굴에 칠해졌고 몸에 입혀졌을 그 모든 사치품들을 벗겨낸다. 이후 덜덜 떨리는 카메라, 마치 리타와 고객들의 은밀한 배후 공작을 몰래 엿보는 듯한 ‘르포적인 핸드헬드’를 동원하여 현실이라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실제로 핸드헬드로 촬영된 시퀀스는 어딘가의 현실을 충분히 반영하고 있다. 마초적인 멕시코 법정은 멕시코 입법부가 여성 범죄를 '페미니사이드'로 특별 규정했음에도 불구하고 피해자 여성들을 보호하는 판결을 내리지 않고 있으니, 이러한 사법 거래는 충분한 현실이다.(물론 본 작품의 페미니사이드 외의 요소들은 멕시코를 제대로 반영하지 않았다며 크나큰 비판을 받았다) 그 현장을 멕시코 바깥의 제3자인 관람객과 당사자인 리타가 접하는 강도에는 크나큰 차이가 있다. 우리는 그저 멕시코의 부패상과 여성 변호사의 모순을 객관적으로 접한다면, 리타는 피해자가 될 수 있는 여성이자 그러한 범죄가 일어나는 뒷골목에 몸소 거주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배신해야 하기에, 자신의 야비한 주관성에 몸서리 칠만큼 끔찍한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이때 오디아르는 뮤지컬을 동원하고, 이 장르는 아주 강한 진통제 역할을 수행한다. 실제 현실에서 리타는 배태된다. 현실에선 리타를 경멸하거나, 아예 그녀를 신경조차 안 쓰고 제 할일만 하는 사람들이 많다. 리타의 정장과 그들의 청소노동자 유니폼, 맥주, 칼, 노점상 등은 아예 다른 세계라고 선을 긋는다. 영화에서도 리타의 변론이 적혀가는 노트북을 클로즈업한 이후에는 필시 컷한 이후 다른 사람과 주변 풍경을 포착한다. 리타 및 노트북/노동자들은 다른 차원에 속한다는 것을 가위질로 가시화하는 것이다. 그런데 영화의 본질이 잦은 컷이라면, 연극·뮤지컬은 롱테이크가 원리고, 영화인 본 작품에서도 뮤지컬 시퀀스만큼은 롱테이크를 사용한다. 현실에서와 달리, 뮤지컬의 주체인 리타는 자신의 세계와 노동자의 세계가 분리되지 않는다고 믿는 체하는 듯하다. 또 핸드헬드를 이용한 리얼리즘풍 숏들과 달리 뮤지컬 시퀀스는 가상적이고 초현실적임에도 불구하고 더 현실다운 롱테이크를 사용하는데, 이는 자신의 합리화를 현실로 대체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리타만의 표상에서 마약 카르텔 및 고위공직자들에게 희생당하는 소시민, 노동자들은 오히려 리타의 궤변에 동조하거나 그녀의 푸념을 위로한다. 노동자들의 세계로 나뉘지 않고 리타의 세계를 조력하는 무수한 엑스트라가 되어서 말이다.

롱테이크와 더불어 우리의 생각이나 판단을 거치지 않고, 바로 무언가를 느끼고 이해시키는 음악의 마력도 한 몫 보탠다. 우리가 음악이나 뮤지컬을 접하며 화자의 부도덕한 사랑이나 아주 잔혹한 밤의 여왕을 아름답다거나 대단하다고 맹목적이고도 무비판적으로 홀려버리는 것처럼 말이다. 그 음률이 리타뿐만 아니라, 리타가 배반카지노 게임 추천 여성들과 노동자들 역시 유혹해왔을지 모른다. 그들에게 유해한 집단의 편을 들도록……


그 황홀한 리듬과 박자와 풍부한 사운드는 바로 '법'에 덧입혀진다. 리타는 법의 참혹한 진실을 몸소 안다. 모든 증거를 검토하고, 또 일반적이거나 정상적인 상황에서 벗어난 것을 직감하는 촉도 동원하여, 그야말로 리타의 감각과 이성 그 모든 것이 법이 잘못됐다고 말한다. 그녀에게 찝찔한 뒷맛을 남기고, 그렇게 남성을 비호하는 동안 제 몸을 챙길 탐폰도 챙기지 못했다. 하지만 그 법, 가부장적인 세계의 작동 원리를 모르는 여성들은 조금의 이상함도 느끼지 못한 채로 그냥 그렇게 살아왔다. 뮤지컬이 그 법을 선전해왔기 때문이다. 리타는 뮤지컬로 자신도 어쩔 수 없다고 말한다. 성전환 사업의 막대한 이윤 창출을 위해 서늘하고도 섬뜩한 메스가 인간의 나약하고도 민감한 살갗을 스윽 갈라내는 차갑고도 창백한 병원을 환희에 찬 목소리로 긍정한다. 그녀와 맞선 텔아비브의 의사는 뮤지컬로 진실을 노래한다. 아무리 몸을 바꿔도 영혼이 바뀌지 않는 이상 소용이 없을 거라고, 맞는 말이다. 생물학적 성별인 섹스라면 몰라도, 사회문화적 성별인 젠더는 굳이 육체를 수정하지 않아도 지금의 몸 그대로 충분히 수행할 수 있다. 남자가 부드럽거나 다정하고, 여성이 우락부락하거나 거친 면모를 추구하는 것이, 아무리 그 누가 의아하게 쳐다보더라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육체가 바뀌어야 영혼이 바뀌고 더 나아가 사회마저 바꿀 수 있다고 주장하는, 젠더가 규정지은 한계의 피해자이면서도 그것을 열심히 변호하는 리타의 목소리가 의사의 입을 압도한다. 그렇다, 법은 진실이 아니라 거짓이자 궤변이고 초현실적인 망상에 불과하지만, 뮤지컬이라는 초월적인 마력이 마치 합당한 진리이자 논리인양 만인을 설득한다.

그리고 영화 역시 비슷한 힘을 지녔다. 만약 우리가 어떤 극악무도한 범죄자의 일대기를 글로만 접한다면, 그 자는 금수라 불리어 마땅하고 죽음으로 그 죗값을 치러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윽고 그 자의 사형집행일이 다가왔고, 어떤 카메라가 그 자의 파르르 떨리는 얼굴을 클로즈업해서 보도한다면 감상자는 어떤 생각을 할까. 온건하게는 “그 자가 죽어 마땅하지만 그래도 안타깝긴 하다”라는 생각부터, 극단적으론 “그래도 살려주자”라는 반응이 나올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 파르르 떨리는 눈동자와 맞대게 해주는 영화 역시 관람객의 옥시토신을 분비시켜 그 끔찍한 인간과의 유대감, 우애, 동정을 쌓게 만들어주는 마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뮤지컬임과 동시에 영화인 본 작품 또한 마땅히 연민할 것을 연민하고, 진실을 호소할 때 그 마력을 사용했어야 했을 텐데 그 점을 필자는 잘 모르겠다. 델몬테는 어느 정도 봐줄만한 수준의 마초가 아니라, 무수한 사람을 죽이고 나락에 빠트려 성공한 극악무도한 마약상이다. 물론 그 역시 남성 젠더를 따를 필요가 없었다면, 제 몸 안에서 꿈틀거리지만 억압된 성정을 따르며 착하게 살았을 거라 말하고, 지금의 삶이 너무 공허하다고 답한다. 자신 역시 피해자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 옆에는 죽거나 납치된 무수한 사람들, 특히 남성들은 그나마 제 선택에 나름의 주체성이 반영되었겠지만, 아예 결정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을 여성들의 싸늘한 유해가 놓여 있다. 그 무수한 유골 위의 델몬테가 막대한 지폐를 쌓아두면서 단지 공허함의 피해자라고 말하는 것은 배부른 소리다. 여기서 오디아르의 마력 넘치는 카메라가 어떤 입장인지 정확하게 모르겠다. 그간의 작품들이 그래왔듯 범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는 남성 젠더를 연민하는 것인가, 아니면 그들을 옹호하는 법을 미러링하는 것인가? 분명한건 이전의 작품들이 전자에 가까웠던 만큼 더더욱 명확하고 조심했어야 했다. 당장 리타도 델몬테에게 납치당하는 현장에서 그에게 섣불리 면죄부를 쥐어줘선 안 되었듯이 말이다.


그래도 오디아르의 카메라가 피해를 호소하는 델몬테이자 에밀리아의 편만 들지는 않는다. 버틀러의 젠더론이 현장에서 잘못 적용되고 있다는 것을 충분히 보여주고자 노력한 흔적은 보인다. 에밀리아가 공개석상에 얼굴을 드러낸 이후 시작하는 사업은 자신이 속죄하기 위해서인지, 여성 젠더를 수행하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여하간 카르텔 희생자를 발굴하는 일이다. 하지만 에밀리아는 가부장제에서 약자들을 보호하겠다는 명목으로 힘으로 다스리며 제압하는 가장의 습관을 아직 버리지 못했다. 제 아무리 목소리를 가늘게 내고, 하반신에 돌출된 흉한 무엇을 제거하며, 가슴에 지방과 실리콘을 채워내더라도, 남성의 편리함과 특권을 놓기는 쉽지 않은 것이다. 육체와 성별만 바뀌면 모든 게 만사형통일거란 태도는 틀렸다.

무엇보다 그러한 태도 변화는 남성일 때 수행해야 한다. 남성이 여성이 되어야만 온화한 성격을 지닐 수 있다고 법이라는 뮤지컬이 강하게 비호하는 세상에서, 자신은 본성상 어쩔 수 없이 흉폭하게 군다는 남성들이 여전히 징그럽게 득실거리니, 에밀리아가 아무리 실종자를 수색해도 또 다른 희생자가 늘어날 전망이다. 에밀리아 역시 그 남성에 의한 희생자이자 가장에 항상 끌려 다니는 수동적인 여성 젠더를 수행했기에 제시, 그 배후에 있는 구스타보에 의해서 후반부에 납치를 당한다. 즉 남성이 여성의 전유물로 여겨진 역할과 관행을 흡수하지 않는 이상 여전히 여자는 여자고 남자는 남자로,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다. 에밀리아가 수행하는 여성 젠더로 지도자 자리에 올라 정책을 펼쳐내는 것은 좋지만, 그것은 되레 여성이라면 늘 베풀고 선하게 행동해야 한다는 성 역할과 관행을 강화하는 것일 수도 있다. 남성일때도 그렇게 행동했어야 했다.

그나마 미덕은 델몬테가 카지노 게임 추천가 된 이후 에피파니아와 교제하는 것이다. 이는 델몬테 시절 남성을 사랑해서, 즉 동성애를 금기시하는 사회에 의한 성전환을 한 것은 분명 아닌 것처럼 보인다. 카지노 게임 추천는 여성과 남성의 성 역할은 분명 강화하면서도, 거기에 딸려오는 이성애적인 성 관행에 있어선 일부 급진적이고 해체적인 모순적인 존재다.


그래서 오히려 젠더에 덜 얽매이는 캐릭터들은 다른 곳에 있다. 먼저 제시다. 그녀는 가부장제에 의해 이리 저리 옮겨지는 여성 젠더의 전형을 보여줬다. 멕시코에서 스위스로, 겨우 적응하니 다시 멕시코로 이송되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더는 마초에게 끌려 다니지 않고 제 주체성을 추구할 것이라며 당당하게 선언한다. 에밀리아의 재력에 기대지 않고 자신이 유산으로 물려받은 떳떳한 돈으로 구스타브와 새 가정을 이뤄 아들들과 오붓하게 살겠다는 계획을 세운다. 그 자리에서 에밀리아가 델몬테 시절의 관행이 나와 그녀를 겁박해도 제시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으며, 에밀리아가 제시의 모든 돈줄을 끊으니 오히려 그녀를 납치하고 협박하기에 이른다. 물론 제시의 해방된 섹슈얼리티, 특히 이성애자 여성의 성적 선택권은 경계할만한 점이 가득하다. 그녀가 사랑하는 구스타브는 델몬테와 별 다르지 않은 마초이자 가장으로서 그녀를 이용해 에밀리아를 납치하고, 겨우 해방된 제시를 또다시 예속하니 말이다.

또 다른 존재는 에피파니아다. 리타의 이름이 불리지 않은 것에 의아함을 느낄지 모르지만, 그녀가 일을 사랑한다는 점은 긍정할지 몰라도 에밀리아-제시 사이를 중재하고 설득하는, 전형적인 여성 젠더를 수행한다는 점에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또한 그녀는 변호사이긴 하지만 그 능력으로 정확히 무엇을 해야 할지, 델몬테나 에밀리아의 지시 없이는 다소 모호한, 수동적인 입장만 고수해왔다. 반면 에피파니아는 그런 고루한 젠더를 따르지 않는다. 자신을 폭행한 남편이 돌아온다면 죽이겠다며 꽃 대신 칼을 들고, 식칼을 다른 용도로 사용하겠다는 여성이다. 본디 마약상이었던 에밀리아가 총을 든 것과는 다소 상이하다. 에밀리아가 놓지 못한 총은 남성 젠더의 습관이라면, 에피파니아는 여성 젠더의 탈피이기 때문이다. 또한 에밀리아의 정체를 모르더라도, 그녀는 여하간 레즈비언이다. 에밀리아의 휘황한 궁전에 의존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소박하고도 누추한 거처에 연인을 초대하여 경제적 의존 관계가 아니라, 권력에 주눅 들지 않은 주체적인 욕망을 실현하기 때문이다.


물론 탈젠더가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에밀리아의 무의식중에 튀어나오는 남성 시절의 습관과 아무리 여성 젠더를 모방하려 해도 남성 젠더를 따르라고 요구하는 '아빠 냄새', 델몬테와의 결혼 생활이 지긋지긋하고 위태로웠음에도 불구하고 가부장제 내 여성의 ‘스톡홀름 증후군’의 전형을 보여주는 제시처럼 말이다. 오디아르는 이들에겐 '죽음'으로만 해방될 수 있다는 듯 좋은 결말을 선사하지 않고, 에밀리아의 저택을 물려받은 리타가 제시-에밀리아의 아들들을 떠맡는 것도 썩 개운치 않다. 여자는 결국에는 '엄마'가 되어야 한다는 말일까? 그걸 오디아르가 어떻게 바라보는 것인지 의아하기에 영화를 마냥 긍정하기 어렵다. 여전히 달아날 수 없는 두 가지 젠더만 오가는 트랜스로 얼룩진 혼란스러운 오늘날을 객관적으로 비춘 것인지, 이를 어쩔 수 없다며 긍정하는 것인지 모호하다.그런데 지금껏 남자들로는 더 어려운 난관도 어떻게든 탈피하고 자유를 선사했으면서, 왜 여성들한텐 어쩔 수 없다며 붙잡히는 결말을 선사한 것일까.

초현실적인 뮤지컬로부터 이젠 실제로 입에서 새어나오는 뮤지컬인 결말의 카지노 게임 추천 추모제도 그렇다. 그것은 가짜가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났기에, 지금까지 거짓을 마력으로 선동하던 뮤지컬과 달리 각자가 포장하고 싶은 것을 포장한다는 인상을 주지만, 감상자는 알고 있다. 카지노 게임 추천를 온전히 칭송하기에는 결함이 있다는 것을, 오히려 그 현장은 내부에서는 경탄으로 가득할지언정 이를 바라보는 외부의 시선은 다소 미심쩍거나 냉소를 지어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이 또한 오디아르는 과연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 것인가. 진짜로 카지노 게임 추천를 칭송하는가, 아니면 그/그녀의 진실을 모르는 현장을 비웃는 것인가? 오디아르의 모호한 태도가 오늘날 가장 민감한 화두에 제대로 된 답을 하지 못했다는 게 극의 피할 수 없는 결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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