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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Mar 26. 2025

미겔 카지노 게임 사이트, <그랜드 투어

아시아는 카지노 게임 사이트의 몽상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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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랑카지노 게임 사이트(Grand Tour): 17세기~19세기의 유럽에서 극소수의 귀족 자제만 누릴 수 있었던 여행 관습이다. 이들은 곳곳을 유랑하며 고전과 역사의 유산을 몸소 체화하고 몸가짐과 예법을 갖춰 진정한 어른이자 상류층으로 인정받게 되었는데, 한편 그 과정은 결코 독립적이지 않았다. 무수한 하인이 여행에 동원되었고, 자금의 출처 역시 농노 착취 및 식민주의였다. 이후 철도가 개발되어 여행이 만인에게 보편화되자 그랑카지노 게임 사이트의 인기는 시들해졌지만, 식민주의 호시절을 그리워하는 백인 예술가에겐 여전히 매력적인 소재였다. 작금에는 오리엔탈리즘과 옥시덴탈리즘 등 비판과 자성의 목소리가 높아져 자취를 감췄지만, 그럼에도 미겔 고미쉬는 다시 한번 그랑카지노 게임 사이트를 떠난다. 하지만 그랑카지노 게임 사이트를 떠나는 이유는 선대 예술가들의 목적과 첨예하게 달라 보인다.


1972년 리스본 태생의 미겔 고미쉬는 동시대 포르투갈을 대표하는 감독 중 한 명이다. 그는 기성 문법에 속박되지 않는 자유로운 카지노 게임 사이트, 심지어 픽션과 다큐멘터리를 아무렇지 않게 뒤섞는 천연덕스러운 분방함으로 동시대 포르투갈 카지노 게임 사이트계를 대표하고 있다. 그에게 카지노 게임 사이트란 현실, 곧 물리적 실재를 반영하는 매체다. 그래서 고미쉬의 카지노 게임 사이트는 늘 정치적이다. 자국의 식민 역사를 반성하는 <타부와 코로나 펜데믹을 반영한 <트스거오 다이어리, 소재뿐만 아니라 형식에 있어서도 <우리들의 사랑스런 8월, <천일야화 3부작에서 자연스레 현실을 반영하는 다큐멘터리 푸티지를 인서트한다. 그가 느끼기에 카지노 게임 사이트는 현실과 오롯이 분리되지 않고, 카지노 게임 사이트감독은 현실로부터 도망치고 싶더라도 실제를 어떻게든 반영할 수밖에 없는 카메라를 손에 쥐었기에 일련의 책임을 져야만 한다.

하지만 <천일야화 3부작에서 고미쉬 스스로가 말하듯, 현실은 골 아픈 세계다. 현실은 무거운 관습으로 가득 차 있다. 그래서 고미쉬는 현재를 배반하는 16mm 흑백 필름을 사용하여 <타부의 관능적인 불륜 이야기를 선보이거나, <서른 살의 얼굴에서는 현실의 법도가 아닌 '게임의 규칙'을 적용하며, <천일야화 시리즈에선 포르투갈을 직접 노출시킴과 동시에 초현실적인 시공간을 뒤섞고, <트스거오 다이어리에선 아예 시간을 뒤집는다. 그 이유는 장편 데뷔작 <서른 살의 놀이에서 진작 고백하였다. 현실의 법칙은 내가 바라지 않았는데도 억지로 맺어야 했던 계약인 반면, 게임의 창조자는 규칙은 주체적으로 설정할 수 있다. 그래서 카지노 게임 사이트라는 놀이를 선택한 고미쉬 역시 연출의 문법을 아주 느슨하게 제 마음대로 선택하며, 그의 형식 자체가 인간의 욕망을 탐구한 결과다.

놀이의 규칙을 고안하는 고미쉬는 해답을 '동물'에서 찾는다. 인간은 동물을 가축화하여 수단과 목적으로 삼는다. 심지어 보기 좋게 '박제'하거나, 인간이 선호하는 모습만을 본 따서 '인형'으로 만든다. 그러나 실제 동물들은 인간의 손에 호락호락하게 붙잡히지 않는다. 고미쉬의 작품에선 인간의 손에서 도망치는 동물들, 반대로 다큐멘터리 푸티지에 대뜸 침투하는 동물의 시청각이 두드러진다. 거기서 고미쉬는 카지노 게임 사이트의 방법론을 찾는다. 현실을 거부하고, 시시각각의 즉흥과 충동을 따라라, 거기서 감각적이고 창의적인 자유로운 카지노 게임 사이트가 탄생한다. 동시에 카지노 게임 사이트는 현실, 곧 정치를 반영할 수밖에 없는 매체이기에 고미쉬는 이 둘 사이에서 늘 줄타기를 한다.


고미쉬는 본 작품에서도 상이한 두 매체, 흑백과 컬러를 치열하게 오간다. 도입에서 흑백과 컬러는 비교적 자명하게 구분할 수 있는 차원처럼 보인다. 총 2부로 나눠볼 수 있는 본 작품에서 흑백 영역은 주인공들의 씁쓸한, 원하는 무언가를 '상실'한 세계에 상응한다. 흑백이 원색을 잃어버린 것처럼 말이다. 반면 도입에서 나레이터는 에드워드가 꿈을 따라 기차에 올라탄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기차에 올라타기 직전의 시퀀스, 대관람차와 인형극이 담긴 채색 숏이 바로 꿈일 것이다. 컬러는 아직 상실되지 않은 희망과 꿈을 보존한 세계다. 또한 다큐멘터리는 컬러, 흑백은 픽션과 주로 결합하며, 상이한 두 장르를 더욱 극적으로 대비한다. 컬러 숏의 피사체는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는다. 물론 그 컬러 숏이 백인의 꿈이란 것을 의식하면 오색찬란한 그 모든 유희와 카지노 게임 사이트라는 현실이 백인의 욕망에 종속하고 있는 것이지만, 최소한 카메라에는 무관심하다. 이들을 포착한 카메라는 마치 CCTV처럼 숨겨져 있는 것 같고, 피사체는 그저 제 일과에만 집중한다. 반면 흑백의 픽션 세계에서 배우들은 어떤 행위를 카메라한테 보여주고자 안달이 나있다. 2부의 주인공인 몰리가 '비웃음'을 표현하고자 내뿜는 작위적인 폭소, 선상에서의 만찬이 불쾌하게 종료된 이후 노래를 부르는 토너, 아주 어려운 대사를 의기양양하게 소화하는 레이디 드래곤 등 그런 모습이어야만 카메라에 ‘승인’될 수 있다는 듯이 우악스럽게 제 존재의 가치나 형상을 증명한다. 일단 여기까지 보자면 컬러: 꿈과 다큐멘터리/흑백: 현실과 픽션으로 나뉘는 것이다.

하지만 다큐멘터리가 꿈이요 현실이 픽션인 것처럼 이 구분은 애초에 명쾌하지 않고 모순적인 구석이 있다. 또한 흑백 시퀀스 중에는 다큐멘터리 푸티지이거나, 최소한 그 성격을 모사하는 숏들이 끼어든다. 그렇다면 오히려 큰 틀에서 논픽션/픽션으로 나누는 것이 지당할 것이요, 여기서의 구분법은 카메라에 대한 피사체의 관심이고, 더해서 '언어'를 들 수 있다. 픽션에선 줄기차게 포르투갈어가 흘러나온다. 반면 논픽션의 세계에선 포르투갈을 기준으로 외국어인 버마어, 베트남어, 일어, 중국어 등이 나레이터를 거쳐 흘러나온다. 감상자는 언어의 종류만 구분하면 쉽게 논픽션/픽션을 분류할 수 있지만, 고미쉬는 언어를 그렇게 단순하게만 사용하지 않는다. 감독 및 등장인물들을 기준으로 자국어/외국어의 용례 역시 차이가 있다. 포르투갈어는 늘 상대방을 구속한다. “약혼을 했으니 결혼도 해야지”, “서비스를 받으셨으니 돈을 지불하세요”, 반대로 “돈을 낼 테니 어떻게든 서비스를 제공하시라” 등 관습이나 약속에 구속된다. 또한 몰리의 선상 저녁 식사에서 포착되는 바, 상대를 제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시키는 발화요, 제 우월함을 과시하기 위해 비웃거나 평가하는 등 '나르시시즘'이 짙다. 반면 외국어는 어떤 종류가 되었든, 또 화자의 성별이 여성이든 남성이든, 늘 등장인물들의 행보를 관대하게 서술할 뿐이다. 또한 포르투갈어는 숏 내부에서 직접 말하는 반면, 외국어가 사용된 숏에서는 외부에서 이미지를 대신 설명하고, 그만큼 이미지 자체로는 입을 다문다는 점에서 픽션/논픽션임과 더불어 유성카지노 게임 사이트/무성카지노 게임 사이트로도 구분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외국어를 사용하는 우리들의 기분이 나빠진다. 왜 감상자의 언어는 그런 세속적인 경향을 조금도 띠지 않은 순수한 것이어야만 하는가? 카지노 게임 사이트 속 픽션의 배경은 20세기이지만, 그 픽션을 필요로 하는 논픽션 푸티지 아카이브는 오늘날의 것임이 서서히 탄로 난다. 핸드폰, 고층빌딩, 마스크, 폭죽 등 21세기를 환기하는데, 현 시대를 살아가는 피사체들이 세속적인 말을 전혀 하지 않고 침묵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오사카나 상하이에서 스쳐 지나간 마스크를 끼고 양복을 입은 샐러리맨들한테서 말이다. 흑백으로 포착된 다큐멘터리 푸티지 중 일부는 아주 순수한 노동에만 집중하는데, 이를 고결하고도 순일하게 포착하니 서구 세계의 세속적이고 계산적인 행위와 동떨어진, 인류 태초의 본원적인 노동을 길어내는 것만 같다. 그게 가능한 이유가 그 이미지로부터 언어를 빼앗았기 때문이다. 분명 다큐멘터리 푸티지라 할 수 있지만 그 이미지는 온전한 진실이자 객관적인 기록이 아니다. 백인이 무언가를 대신 말하거나 투영하거나 지우고 있다. 20세기 픽션을 위해서 21세기 푸티지들의 시대성을 애써 은닉하는 것처럼 말이다.


언어의 용례든 노동의 형태든, 대신 말하는 백인들은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이고 태초적인 형태로 카지노 게임 사이트에 등장하는 국가들을 미화한다. 언어의 종류도 그랑카지노 게임 사이트를 떠나는 각 나라의 풍습과 문화적 차이도 중요하지 않다. 백인의 포괄적인 오리엔탈리즘이 각 나라의 무수한 차이를 획일화하며, 그 야욕을 폭로하는 것이 고미쉬의 목적으로 보인다. 만약 고미쉬가 백인의 오리엔탈리즘을 비호하는 픽션을 연출하고자 했다면 굳이 재료가 된 푸티지들의 시대상이 오늘날이라는 것을 드러내지 않았을 것이다. 21세기가 환기되는 푸티지들의 시간성을 어떻게든 조작하거나 지워냈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고미쉬는 픽션이 다큐멘터리 푸티지의 시간성을 왜곡하고 있다는 사실을 칠칠맞게도 계속 흘리고 다닌다. 심지어 사실로서 푸티지는 카지노 게임 사이트 내내 허구인 픽션에 나름 신빙성을 부여하는 '증빙 서류'의 역할을 도맡는다. 실 풍경을 기록한 푸티지에 나레이터는 "에드워드나 몰리가 이러저러했다"라는 식으로 진술하지만, 실상 각 나라의 생생한 풍경에 에드워드나 몰리는 없다. 어떤 운송기구를 타고 이동 중이라는 그들이지만 실제 운송수단에는 노동자들만 존재할 뿐이고, 마작을 즐긴다는 에드워드를 마작 푸티지에서 찾아볼 수도 없다. 나레이터는 이들이 직접 무수한 나라에 방문했다고 얘기하지만, 클라이맥스에서 폭로된 바를 보건데 ‘세트장’에만 머물렀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 전후에 위치하는 푸티지들은 그들이 실제로 방문했다고 진땀을 뻘뻘 흘리며 비호한다. 또 무수한 오토바이가 교차하는 번잡한 사거리를 촬영한 푸티지는 어떤가. 이는 마치 <라라랜드의 교통체증 시퀀스를 방불케 할 만큼 아름답지만, 실제 그 거리는 낭만과는 거리가 멀다. 치열하고 바쁜 일상이 교차하는 현장이다.

즉 "백인은 거기 있었어요", "백인이 보기에 그곳은 어떻더라"라는 그랑카지노 게임 사이트, 오리엔탈리즘을 위해 카지노 게임 사이트라는 논픽션은 픽션이 되어 희생되고 있다. 고미쉬는 매체를 더 노골적으로 연출하며 그 사실을 폭로한다. 각 나라가 가진 여러 모습 가운데서 특별하게 선별되는 것은 연극과 노래, 인류의 탄생과 동시에 생겨났을 법한 원초적인 노동 등이다. 발전 속에서 순수한 것과 원초적인 것을 잃어버린 서구 백인이 보고 싶은 것들만 견문록 형태의 픽션에 차곡차곡 쌓여가며, 이는 때때로 '디졸브'되어 본래의 구체성과 명확함을 잃어버린다. 아주 투명하게 변해서 환상적이고 몽환적인 오리엔탈리즘을 구축하는데 일조한다. 또한 백인의 시선에서 꿈이어야 하는 것은 더 우악스러운 35mm 필름으로, 반면 시대상을 조작하고 왜곡해야 하는 것은 그레인이 자글거려서 훼손의 징후가 드러나는 흑백 16mm 필름에 담겨져야 한다. 그렇게 조작된 세계, 응옥의 불어와 몰리의 포르투갈어의 상호 소통이 너무나 매끄러운 세계, 레이디 드래곤의 비속어는 검열 처리되어서 깨끗한 것만 남은 순결한 세계가 바로 픽션의 카지노 게임 사이트다.

하지만 레이디 드래곤이 아주 어려운 대사를 과시하는 장면 바로 직후 노동자들이 카메라 앞으로 지나다니며 시야를 방해하고, 또 그녀가 꿈꾸는 픽션을 해치는 노동의 소음이 끼어든다. 물론 이 노동자들은 아카이빙된 푸티지들과 달리, 다큐멘터리적인 성격을 픽션에서 모방하고 있는 것이지만, 굳이 이를 연출하는 카지노 게임 사이트는 다큐멘터리와 픽션의 관계를 가시화하려는 듯 보인다. 1부에서 에드워드가 호텔 라운지에서 레지를 만난 시퀀스가 대표적이다. 픽션의 화자는 동그랗게 프레임을 좁혀가며 픽션에만 집중하려고 하지만, 정작 카메라 앞으로 노동자와 행인이 지나다니며 논픽션이 픽션을 열렬하게 방해한다. 즉 픽션과 논픽션의 관계는 공존불가능이다. 픽션에 의해 착취된 논픽션은 사실로서 자신의 본질을 잃지만, 그럼에도 진실이라는 맹렬한 힘을 지닌 논픽션에 의해 픽션은 고발당하며 자신의 허구성, 그것이 구분하는 현실과 다른 특별함을 잃어버린다.


겨우 남게 된 카지노 게임 사이트의 논픽션은 백인의 픽션에 일조하기에 존재한다. 백인들은 카지노 게임 사이트에 아직 문명화되지 않은 신비로운 무엇이 있을 거라 기대한다. 고미쉬가 대놓고 핸드폰과 고층빌딩, 샐러리맨을 등장시켰는데도 이들은 픽션에선 철저하게 제거된다. 백인이 바라는 카지노 게임 사이트인의 용모는 오직 '승려'나 ‘가마꾼’이다. 다큐멘터리 푸티지에서 포착된 샐러리맨들, 서구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사람들이 에드워드를 인도해서는 안 된다. 승려는 에드워드의 자연관이 왜곡되어 있음을 넌지시 암시하지만, 그의 기대에 배반할 시 승려는 존재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승려는 '존재하고자' 그의 귀에 신묘한 말을 해주며 '등산'을 제안할 수밖에 없다. 그 승려들이 쓰고 있는 전통적인 모자 역시 카지노 게임 사이트에 기대하는 독특한 미감임과 더불어, 에드워드가 '숨기' 위해 취사선택한 결과다. 기차가 선로를 이탈한 후 현장이 너무 시끄럽자 ‘고요하다’는 이유로 향한 마을처럼 백인의 상황이 카지노 게임 사이트의 유/무를 결정한다. 심지어 각기 다른 상황에 처한 백인은 똑같은 하나의 카지노 게임 사이트에 다른 용도를 부여한다. 에드워드에겐 선망하는 꿈의 세계였던 버마의 인형극이, 몰리에게는 비웃는 세계가 된 것처럼 말이다.

또한 본 작품의 픽션은 단순히 허구적인 이미지의 나열이 아니다. 분명 어떤 ‘서사’가 있다. 에드워드는 몰리에게서 도망치는 “이상적 자유를 찾아 떠도는 무용담”을 펼치는 반면, 몰리는 “약혼자에게서 버림받은 비운의 멜로드라마”에 참여한다. 그 특별한 이야기를 위해서 뻔한 서구가 아니라 아스라하고도 몽환적인 카지노 게임 사이트를 필요로 하는 것이며, 여기서 카지노 게임 사이트인들은 서구가 집필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부수적인 용도로 소모된다. 카지노 게임 사이트에서 카지노 게임 사이트인의 이야기는 할 수 없고, 백인들의 모험을 위한 NPC로 전락하는 것이다. 에드워드는 연회에서 만난 버마 왕자의 이야기에는 무관심하다. 버마 왕자는 에드워드가 묻는 '픽션으로 향하는 출구가 어디'냐는 질문에만 답할 수 있다. 그마저도 용도를 다하면 왕자라는 캐릭터는 폐기되며, 이후 카메라를 가리는 무수한 인파, 곧 논픽션적 성격을 가진 이미지는 그 무수한 군중을 뚫고서 자유를 쟁취하려는 에드워드의 영웅심을 고취하기 위해서 착취된다. 오직 몸종이나 백인살해자로만 등장할 수 있는 카지노 게임 사이트의 단역들도 덤이다. 이는 카지노 게임 사이트 속 인간이 자연을 바라보는 태도가 인간이 인간에게, 서구가 카지노 게임 사이트에게 확장된 결과다. 인간의 용도에 따라 다듬어지는 투계, 자원으로서 채취되는 대나무, 바구니에 갇힌 민물고기 등의 자연물과 카지노 게임 사이트의 모습이 별반 차이가 없다.

그 픽션, 백인들이 방문했고 경험했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론 한 번도 발을 디뎌본 적 없는 허구의 영역을 고미쉬는 아주 우악스럽게 처리한다.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을 어떻게든 존재하고자 우긴다는 듯이 말이다. 비록 백인이 의도적으로 선별한 것이지만, 최소한 그것 자체로는 진실인 푸티지들의 솔직하고 자연스러운 모습과 비교된다. 선주민, 판다, 원숭이는 연기하지 않는다. 그들은 존재가 당연하기에 굳이 존재를 증명하려 애쓰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카메라에 위치해야만 존재할 수 있는 픽션의 요소들은 액션을 과장하여 극적이고도 작위적으로 나타난다. 노동자들이 일하는 와중에 꽃을 들고 비련의 남자 주인공 행세를 하는 에드워드, 선상에서의 식사가 끝난 이후 갑자기 인위적으로 노래를 부르는 토너 등이 말이다. 그리고 이 백인의 서사에 종속되어 버린, 스스로 말할 수 없게 된 카지노 게임 사이트 역시 자신의 허구화를 택한다. 그들은 백인들이 주장하는 카지노 게임 사이트인의 모습이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왜 서구는 카지노 게임 사이트를 허구화하는가? 고미쉬는 아주 지독한 나르시시즘과 '자기 연민'에 기반을 둔다고 분석한다. 서구 내에선 모두 다 특별하지 않다. 나만을 우대해주지도 않거니와, 대화는 죄다 자기 자랑만 하기 바쁜 집단적 독백, 어떻게든 상대방을 깎아 내려 자신을 드높이려는 오만의 장임이 선상의 식사에서 드러난다. 이런 상황에서 서구가 무력과 경제력을 활용하면 카지노 게임 사이트에선 충분히 대우받을 수 있다. 이로써 그들은 진정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인간은 평범한 것들은 굳이 이야기해서 전하지 않는다. 특별한 것, 흥미가 당기는 것, 후대에 전해질만한 것들을 이야기하는데 그 모든 재료와 기회가 백인의 서구에선 소진되었다. 앞서 언급한 포르투갈어의 용례처럼 서구에서의 경험은 통속적이다. 그 세속에서 탈출하여 카지노 게임 사이트로 향하면 에드워드는 속물적인 백인들과 달리 자연을 즐길 줄 아는 참된 자유인이자 식자가 되는 것이요, 몰리는 더 가련하고도 비운한 여자 주인공이자 샌더스와의 끈적한 밀회를 즐기는 요부로 변신할 수 있다. 픽션을 즐기는 에드워드와 귀부인이 우아한 미소와 눈인사를 교환하는 동안, 그 픽션을 지탱하는 가마꾼들은 어깨가 빠질 지경이다. 그럼에도 가마꾼들은 사치스러운 느린 시간을 인고해주니 백인은 호사스러운 이야기를 집필할 수 있는 것이다.

가마꾼들의 노고가 보이지 않는 이유가 카지노 게임 사이트에 대한 콩깍지임과 더불어, 그들 모두를 관통하는 자기 연민에 있다. 에드워드, 몰리뿐만 아니라 각 나라에 파견된 백인들 역시 외교관이나 스파이, 선교사 등 대의를 위한 자기희생을 줄곧 호소한다. 그래서 더더욱 카지노 게임 사이트는 야만적이고 미신적인, 비문명화된 땅이고, 카지노 게임 사이트인들은 백인에게 시련을 주는 야만인이어야 한다. 하지만 카지노 게임 사이트는 백인에게 와달라고, 카지노 게임 사이트에서 비롯한 시련을 기꺼이 감내해달라고 간청하지 않았다. 이 모든 원인은 백인은 특별하고 대단해야 한다는 선민적인 나르시시즘에 있다.

즉 표면적으로 본 작품은 오리엔탈리즘을 미화하고 그 시절을 찬미하는 카지노 게임 사이트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함께 칸 카지노 게임 사이트제 경쟁에 올랐던 <서브스턴스처럼 이념과 담론의 메커니즘을 첨예하게 해부하고 우악스럽게 모방하면서, 미화된 부조리의 치부를 신랄하게 까발린다. 또한 함께 경쟁 부문에 올랐던 <에밀리아 페레즈와 같은, 이방인의 느슨하고도 안일한 옥시덴탈리즘으로 점철된 카지노 게임 사이트를 날카롭게 비판하는 것이다. 보통 오늘날의 아카이빙 푸티지는 픽션이나 논픽션에 사용된 어떤 이미지가 새로운 맥락에서 재탄생하는 해방감과 즐거움을 창출하지만, 오히려 본 작품에서만큼은 백인의 아카이빙 푸티지에서 발견되는 불편하고도 어색한 요소들, 고미쉬가 의도적으로 노출하고 까발린 ‘어긋남’에 집중해야 한다. 마치 에드워드에게 미소 짓는 자매들의 따귀를 때리고, 이후 에드워드를 날카롭게 응시하며 백인 남성의 시선에 저항하던 초반부의 강인한 여성처럼, 서구를 위한 꿈이자 세트장으로 전락한 카지노 게임 사이트, 그들이 한 번도 밟아본 적 없는 카지노 게임 사이트를 탈피하여 우리의 목소리을 되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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