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장이 사라진 자리, 실력과 감각으로 무장한 건축가들의 출현
브리크 매거진이라는 건축 플래폼에 필진으로 지원해보려고 합니다. 그를 위한 샘플 글을 써보았습니다. 블로그에 먼저 공유합니다. 읽어보시고 피드백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언제부턴가 건축업계에서 ‘젊은 건축가’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다. ‘젊다’고 하면 뭔가 신선해보이기도 하고, 새로운 생각을 가지고 패기 있게 일을 해나갈 것 같아서 긍정적으로 느껴지는 경향이 있다. 통상적으로 건축가라는 직업은 비교적 늦은 나이부터 활동을 시작하기 때문에 따른 분야에 비해 ‘젊은’ 기간이 길다는 이점을 가지고 있는데, 그렇다 하더라도 몇 살까지 젊은 건축가로 봐야 할지는 사람마다 이견이 있는 것 같다. 문체부에서 수상하는 ‘젊은 건축가상’의 나이 제한이 만 45세 미만이라 그 정도까지를 ‘젊은 건축가’로 봐주는 것이 통상적인 기준으로 자리잡은 것 같기도 하다. 물론 그것보다 나이가 많아도 ‘생각이 젊기 때문에’ 은근 슬쩍 젊은 건축가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단순히 특정 나이를 기준으로 젊은 건축가인지를 판단 하기 보다, 경험이나 연륜보다는 젊고 새로운 용기 내지는 감각을 중요시하는 흐름으로 건축계가 바뀌었다고 보는 것이 좀 더 정확하지 않을까 싶다.
확실히 최근의 한국 건축의 흐름을 이끄는 것은 이 ‘젊은 건축가’들이라고 할 수 있다. 과거의 한국 건축계는 소위 ‘거장’이라고 불리는 몇 명의 스타 건축가들만이 주목받았고 그들 위주로 건축계가 흘러왔다. 광복 이후에 김수근, 김중업의 양김 건축가가 그랬고, 90년대 이후에 승효상, 민현식, 김인철 등의 4.3그룹이 그랬다. 2000년대 이후는 미국 등지에서 공부를 마치고 돌아온 ‘유학파’들의 시대라고 볼 수 있다. 조민석, 조병수, 최욱, 최문규 등이 대표주자다. 그러던 것이 2010년대 중반 이후부터 흐름이 바뀌었다. 기존 스타 건축가들의 무게감이 줄어들고 ‘젊은 건축가상’ 수상자들을 중심으로 한 일단의 젊은 건축가들이 건축계를 이끌기 시작한 것이다. 이들의 특징은 아래의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우선 활동하는 건축가의 숫자가 예전보다 훨씬 많다. 예전에는 주목받는 열 명에서 스무 명 안팎의 건축가들이 업계를 이끌었다면, 이제는 최소한 몇 십명에서 많게는 몇백 명 이상의 건축가들이 활동하고 있다. 브리크 매거진 등 주요 건축 플랫폼만 훑어봐도, ‘젊은 건축가’임을 자처하며 등장하는 수없이 많은 건축가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두 번째로는 건축가 한 명이 활동하기 보다 두 명 이상의 팀으로 활동하는 건축가들이 많다. 혼자서 사업을 시작하는 리스크를 줄이고자 하는 시도로 보이는데, 특히 부부가 함께 사무실을 하는 경우가 굉장히 많아졌다. 세 번째로는 아주 작은 리모델링이나 인테리어, 다가구 다세대 등의 소규모 작업도 마다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임한다. 이전 세대의 건축가들 같으면 규모도 작고 작품을 시도할 여지도 없어서 취급하지 않았을 법한 자잘한 일들도 적극적으로 달려들어서 건축가의 일로 편입시키고 있다. 다섯 번째로는 전체적으로 디자인 실력과 감각 등 수준이 높아져 ‘상향 평준화’되었다는 것이다. 5년제로 인해 대학의 건축교육 수준이 전체적으로 높아졌고, 인터넷을 통해 건축정보, 트렌드, 스킬들을 실시간으로 접하면서 전체적인 건축가들의 수준이 높아졌다. 여섯 번째는 예전보다 학벌에 대해 얽메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물론 예전처럼 미국 등지에서 유학을 마치고 데뷔하는 건축가들도 많이 있지만, 비교적 덜 알려진 학교를 나오고도 실무경험을 바탕으로 빠르게 독립해서 실적을 쌓으면서 자신만의 경쟁력을 갖추는 ‘토종’ 건축가들이 늘고 있다.
이상이 필자가 생각하는 최근 ‘젊은 건축가’들의 특징이다. 이 중에서 비교적 앞서나가는 사람도 있지만 대체적으로 비슷한 수준을 이루는 수많은 건축가들이 마치 구름처럼 건축계를 떠받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고급화된 하이엔드 쪽에 치중되어 있던 ‘건축 디자인’의 영역을 다세대, 다가구 등의 중간 영역까지 확장해냈다는 것이 ‘젊은 건축가’들의 가장 큰 공적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젊은 건축가들이 상대하는 건축주들은 대체로 건축가와 비슷한 나이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경제적 여건이 그렇게까지 좋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많은 돈을 쓸 수는 없지만, 그래도 디자인에 대한 안목이 있고 좋은 집을 짓고 싶은 욕심이 있는 건축주들이 이러한 ‘젊은 건축가’들을 찾게 된다. 이런 건축주들은 평생을 모은 거금을 들여 프로젝트를 진행하기 때문에, 경제성의 논리 그리고 용적률의 논리에서 완전히 벗어나기 힘들다. 그리고 획기적이고 혁신적인 시도를 적용할 만한 재정적인 여유를 가지지 못한다. 그러다 보니 ‘젊은 건축가’의 작업은 기존의 스타 건축가들처럼 대담한 메스형태나 개념, 고급재료, 디테일의 적용이 어렵다. 흔히 보는 벽돌이나 스타코로 깔끔하게 마감하고, 지붕은 거멀접기 처리한 리얼징크로 덮고, 영롱쌓기로 포인트를 주는 방식의 건물이 ‘젊은 건축가’의 전형적인 스타일이 되었다. 리모델링이나 다가구, 다세대 등을 주로 다루는 그들의 프로젝트 범위와 예산의 한계 덕분에 스타일이 획일화되고 반복적인 패턴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이를 두고 ‘기능적으로 잘 풀리고, 디자인이 깔끔하지만 그 이상이 보이지 않는다’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양적 변화’는 어느 순간 ‘질적 변화’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예전보다 훨씬 더 많은 수의 건축가가 활동하게 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저변이 넓어졌다는 이야기가 되고, 더 많은 사람들이 건축 디자인을 접하고 그 이점을 알게 되었다는 뜻이 된다. 또한 많은 수의 건축가들이 작품을 선보이다 보니 서로 자극도 되고 경쟁도 하게 되어 수준을 계속 끌어올리는 동기가 되고 있다. ‘젊은 건축가상’ 수상자들만 보아도, 최근 수상자들의 수준은 10여년 전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 기성 건축가 수준 이상의 작품을 해야 수상 후보에 겨우 이름을 올릴 수 있을 정도다. 어려운 건축 환경 속에서도 자신의 작품을 만들기 위해 악전고투하고 있는 젊은 건축가들에게 ‘그 이상의 무엇’을 강요하는 것은 달리는 말에 채찍질을 하는 ‘주마가편’을 넘어서는 게 아닐까 싶다. 그보다는 따뜻한 시선으로 지켜보고 격려해주는 것은 어떨까.
지금이 ‘젊은 건축가’의 시대임을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가혹하고 힘든 시대지만, 그들의 패기와 열정이 새로운 시대를 다시 이끌어 가리라 믿는다. 결국 건축설계란 현실적이고 세태에 민감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현실을 잊을 만한 열정과 헌신이 없이는 이 업을 계속하기는 힘들다. 그러기에 어느 시대든 ‘젊은 건축가’들이 이 업계를 이끌어온 것이다(4.3 그룹도 처음 등장한 90년대 당시에는 지금의 젊은 건축가들보다 더 젊었다). 오늘도 현실과 싸우고 있는 이 시대의 젊은 건축가들을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