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동안 거울 없이 살아간다고 상상해보자.
아무런 반사면도 없이, 그저 사람들의 말로만
자신의 카지노 게임을 짐작하며 살아가는 삶.
“너 카지노 게임이 참 시커멓다.”
“왜 그렇게 칙칙하니?”
“넌 원래 그런 카지노 게임이야.”
그 말들이 쌓일수록,
나는 점점 그 카지노 게임을 내 것으로 받아들이게 됐다.
그건 더 이상 타인의 말이 아니었고,
‘나 자신에 대한 내 인식’이 되었다.
내 카지노 게임은 보이지 않는데,
내가 사는 방식은 그 보이지 않는 카지노 게임에 의해 결정되고 있었다.
나는 그렇게 **타인의 언어로 구축된 나**를 살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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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수년이 흘렀다.
주눅들고, 불안하고, 어딘가 왜곡된 자의식 속에서
나는 점점 더 무언가를 잃어가고 있었다.
무엇을 잃은지도 모른 채.
그러던 어느 날,
어느 바닷가의 늦은 오후,
조용히 사암 위에 앉아 있던 순간,
햇빛이 비스듬히 내려오며
잔잔한 파도에 흔들리는 사암 위에
무심히 내 카지노 게임이 비쳤다.
그 카지노 게임을 몇 초간 멍하니 바라보다가,
나는 그대로 몸을 멈췄다.
그건 내가 알고 있던 그 어둡고 칙칙한 카지노 게임이 아니었다.
의외로 맑고, 부드럽고, 투명한 기운이 배어 있었고
그 순간 나는 이상하게도… 눈물이 났다.
나는 거기서 오랫동안 앉아 있었다.
아무도 없는 바닷가, 바람과 파도,
그리고 그 조용한 반사면 속에서
나는 **처음으로 ‘외부가 아닌 나로부터의 나’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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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로 나는 많은 것을 달리 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만의 렌즈를 가지고 있고,
그 렌즈를 통해 나를 해석한다.
심지어 사랑하는 사람들조차도—
그들의 말은 본인의 상처, 기대, 두려움이
섞인 **‘감정이 묻은 거울’**이다.
그런 말들이 아무리 선의라 해도,
그건 결국 **나를 해석한 타인의 시선**일 뿐이었다.
나는 이제 그 렌즈를 조심하게 되었다.
특히 가까운 사람의 말일수록 더 조심하게 되었다.
어머니의 말,
친구의 충고,
상사의 평가,
연인의 위로조차도
내 안에 **‘진실’처럼 저장될 가능성**이 있다는 걸
나는 이제야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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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는 결심했다.
더 이상 누구의 해석도, 누구의 진단도
내 존재의 중심에 두지 않기로.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그게 진심이든, 아니든,
**내 존재의 축은 외부에 둘 수 없다.**
내가 어떤 카지노 게임을 하고 있는지,
어떤 생각을 품고 있는지,
그 모든 해석의 시작은
**오직 나로부터만 흘러나와야 한다.**
그 누구도 내 카지노 게임을 대신 살아줄 수 없고,
그 누구의 언어도 내 존재를 완전히 담아낼 수 없다면,
나는 오직 나 자신에게 책임을 지는 삶을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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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은 말한다.**
우리는 거울 속의 자기 이미지를 통해 자아를 형성한다고.
**언어학은 말한다.**
언어는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구성한다고.
**철학은 말한다.**
진실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해석하는 존재로부터 비롯된다고.
**신경과학은 말한다.**
뇌는 반복되는 감정적 경험에 따라 자아를 재배선한다고.
**종교는 말한다.**
너 자신을 알라고.
그리고 나는 안다.
**나는 이제 어떤 말에도, 어떤 시선에도 휘둘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는 그날,
모래사장에 비친 내 카지노 게임을 본 사람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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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은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선택한 해석의 리듬 위에 세워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