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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지은 Apr 17.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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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티나무 아래서_.



변하지 않는 나의 하루 일상에서 함께라서 즐거운 시간은 영훈을 만날 수 있는 도서관 가는 날이다. 그래서 도서관이 휴일인 날엔 아쉬움이 많이 든다. ‘오늘 만날 일은 없겠구나’ 조금 실망한 듯한 표정으로 지영과 민경이랑 학교에서 내려가는 길. 멀리 중간 지점에서 그가 기다리고 있는 게 보였다. 영훈을 보자마자 친구들이 옆에 있다는 것도 잊어버린 채 영훈에게 달려갔다. 지영과 민경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는 건 머릿속에 없었다. 내리막 길을 있는 힘껏 달려가 영훈을 만났다.


그는 늘 그렇듯 환한 미소에 손을 흔들며 반겨주었다. 도서관도 쉬는 날인데 왜 여기에 있냐고 묻자 그가 대답했다. “중간 지점에서 기다렸다가 같이 도서관에 가려고 했죠. 열람실은 안 열지만 느티나무 아래 벤치는 갈 수 있잖아요” 대답 안에 나도 함께라는 말이 기뻤다. ‘여자는 사소한 말에 더 감동받는다는 말이 이럴 때 하는 말인가’ 싶었다. 영훈을 볼 거라는 생각을 못했는데 만나러 와준 것이 고마웠고, 일부러라도 나와 시간을 보내려 하는 그가 다정해 보였다. 친구들은 옆에서 어리둥절한 표정을 하고 나와 영훈을 번갈아 보며 ‘이게 무슨 일인가’ 하는 눈치였다.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영훈에게 지영이와 민경이를 소개해주니 쑥스러운 듯한 미소로 화답해 주었다. 첫인사를 끝내고 나는 ‘방해하지 말고 빨리 가~!’라는 눈빛으로 둘을 흘깃 쳐다보았다.

민경이와 지영은 알았다는 눈치를 주며 “저희는 이만 가볼게요. 지은이 잘 부탁드려요.”라고 하는 둘의 말에 얼굴이 붉어진 영훈이 당황했다. 나도 당황했지만 왠지 모르게 설레고 들떴다. 친구들이 가고 우리는 도서관으로 향했다. ‘쉬는 날이라 책도 못 빌리는데 벤치에 앉아서 뭘 하지?’라는 생각만 머릿속에 맴돌았다. 싹이 피어나 초록초록해진 느티나무를 신기하게 바라보며 딴생각을 하고 있는 나에게 영훈이 말했다. “책이 아니어도 얼굴 보고 이야기만 해도 좋지 않을까... 해서요” 말 끝이 흐려지는 영훈을 보고 어쩔 줄 몰라서 느티나무 이파리만 만지작거렸다. 매번 도서관에서 만나면 여러 종류의 책을 읽으며 노트 끄적이는 게 우리의 일상이었는데 처음으로 책과 상관없이 서로를 바라볼 수 있었다. 심장이 쿵쾅쿵쾅 미친 듯이 뛰고 얼굴이 붉어지고 같이 보는 풍경이 예쁘게만 보였다. 커다란 느티나무 줄기가 바람에 하늘하늘 흔들리며 잘 왔다고 인사해 주는 것 같았다. 영훈에게도 내가 마음 설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대뜸 영훈이 말했다. “우리 호칭부터 좀 바꿔요. 서로 어떻게 불러야 될지 몰라서 이름 한 번을 제대로 못 부르잖아요”


그렇다. 서로 고등학생이라 그냥 이름을 불러도 될 것 같은데 생각과 달리 제대로 이름을 불러 본 적이 없었다. 내 생각을 들키기라도 한 걸까? 영훈은 자신에게 ‘오빠’라고 불러주면 안 되냐며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이야기한다. “읔! 소~름” 나도 모르게 생각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친오빠 말고는 오빠라고 불러 본 적도 없는 데다 이제 와서 오빠라고 부르는 게 너무 닭살 돋았다. 팔에 닭살 돋았다며 이거 보라고 내밀었더니 영훈이 재밌다는 듯 웃는다. 그 모습이 너무 환해서 나도 모르게 쳐다만 보고 있었다. 영훈이 갑자기 옆에 오더니 커다란 손으로 내 목덜미를 붙잡고 말했다. “그럼 OO 씨로 합시다. 그럼 됐죠? 어차피 우린 서로 존댓말 쓰잖아요. 오케이?” 당황해서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더니 그제야 손을 놓고 내 머리를 쓰담해 준다. 어미고양이가 새끼고양이 목덜미 물면 조용해지는 것처럼 난 얌전해졌다. 얼떨결에 끄덕이긴 했는데 고등학생인데 영훈 씨~라고 불러야 하는 게 왠지 더 닭살 돋는 느낌이다.

어쨌든 도서관 느티나무 아래 벤치를 놀이터 삼아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난 틈틈이 새어 나오는 그의 밝은 웃음소리가 제일 듣기 좋았다. 무슨 이야기를 해도 빵 터트리며 웃어주는 자상함도 멋있다고 생각했다. 처음으로 책도 안 보고 서로 이야기만 주고받았을 뿐인데 시간은 왜 그렇게 빨리 가는지 모르겠다. 난 항상 가방에 시집을 갖고 다니지만 오늘은 왠지 꺼내고 싶지 않았다. 영훈과 책 이야기 말고 소소한 일상 이야기를 서로 주고받는 것이 더 좋았다. 서로의 꿈을 이야기해 본 것도 처음이었다. 나는 시인이 되고 싶어 했고, 영훈은 소설가가 꿈이라 했다. 둘 다 서로에게 “할 수 있어!”라며 의지를 불태우는 모습마저 닮아가고 있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나 우리 둘 다 꿈이 현실이 되었으면 좋겠다며 서로를 보고 웃었다.


어느덧 막차를 타러 가야 하는 시간. 왠지 아쉬움을 남았지만 가방을 메고 도서관을 나왔다. 웬일로 버스 타는 곳까지 같이 가주겠다며 영훈이 따라나섰다. “웬일이에요?” 묻는 나에게 멋쩍은 웃음을 보이며 우물쭈물거리더니 말했다. 이런 날도 있어야 안 삐치지 않겠냐며 너스레를 떠는 그의 말에 피식 웃었다. 서로에게 존댓말을 하는 게 익숙해져서 그런지 오히려 더 상냥하게 들렸다. 가끔 말꼬리를 붙들고 늘어져서 사투리 억양이 나올 때면 서로 민망한 듯 웃었다. 둘 다 억양이 센 경상도지만 경상도 억양이나 말투가 거의 없었다. 그렇다 보니 평소에는 사투리를 전혀 쓰지 않았다. 무뚝뚝한 것 같은데 은근히 배려가 몸에 배어있는 영훈이 난 좋았다. 꿈이 ‘작가’라는 공통점에서 시작해서 그런지 서로 ‘할 수 있다’며 응원해 주는 동료 같은 느낌이 나기도 했다. 처음 만난 사람이 내가 아니었어도 그는 여자 애들이 좋아할 만한 타입인 건 분명했다. 버스를 타고 영훈에게 손을 흔들며 우린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영훈과 ‘책’이라는 우연이 쌓여 처음 만난 사람이 나라는 게 행운이라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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