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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llu Mar 29. 2025

모든 아름다움은 이미 때 묻은 것-폭싹 카지노 게임 보고

폭싹 카지노 게임, 사나운 애착, 모든 아름다움은 이미 때 묻은 것을 보고

*이 글은 <폭싹 카지노 게임 3막까지 보고 작성된 글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 금명이, 자전거는 꼭 타게 해줘. 자전거도 못 타면 평생 아궁이 앞에만 있다가 죽는 거야."


성황리에 방영 중인 화제작 <폭싹 카지노 게임가 최근 12회까지 공개되며 시청자들의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다. 1960년대, 애순은 제주라는 작은 섬에서 대통령이 되겠다는 거대한 꿈을 품고 자란다. 그러나 단단히 뿌리내린 가부장제의 질서 속에서 몇 안 되는 선택지만을 허락받은 채, 어느덧 어린 엄마가 되어 아궁이 앞에 선다. 그런 애순이 “여자애가 자전거 타서 뭐에다 쓰냐”는 시댁의 비난을 무릅쓰고, 딸 금명이만큼은 자전거를 꼭 타게 해달라고 남편 관식(박보검)에게 간곡히 부탁하는 장면은, 그녀가 결국 가지 못했던 세계에 딸만은 다가갈 수 있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에서 비롯된다.


자전거를 타고 멀어지는 자그마한 딸의 뒷모습에 웃으며 손을 흔드는 애순의 모습을 보며, 필자는 자연스레 비슷한 시대, 다른 대륙의 한 집안 풍경을 떠올린다. 바로 비비언 고닉의 회고록 『사나운 애착』 속, 뉴욕의 아파트 부엌에서 칼질을 멈추고 창밖을 바라보던 어머니의 모습이다.


카지노 게임는 사람들 사이에 오가는 눈치 싸움에 밝았고 누가 누구와 사이가 틀어졌는지도 대번에 파악했다. 카지노 게임가 그 골목에서 일어나는 세상사를 직감적으로 이해하고 평가하는 걸 듣고 있으면 인생은 조금 더 풍부해지고, 다채로워지고, 더 흥미로워졌다. 나는 우리 모녀와 창문 밖의 세상이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곤 했다. 그 부엌, 그 창문, 그 안뜰. 그것은 카지노 게임가 뿌리를 내린 대기였고 카지노 게임가 서 있던 배경이었다. 이곳에서 카지노 게임는 똑똑하고, 웃기고, 활기 넘쳤고, 권위와 영향력이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카지노 게임는 당신을 둘러싼 환경을 경멸했다. "여편네들이란, 으이구!" 입버릇처럼 말했다. 빨랫줄 앞에 모여가지고 이 집 저 집 욕이나 하고.

엄마는 여기 아닌 다른 세상, 진짜 세상이 있음을 알았다. 그리고 기품은 당신이 그 세상을 원한다고 생각했다. 아주 열렬하고 절실하게. 엄마는 집안일에 열중하다가도 갑자기 카지노 게임 동작을 일제히 멈추고, 한없이 길게 느껴지는 몇 분 동안 싱크대를, 바닥을, 스토브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 세상이 어디 있는데? 어떻게 가야 하는데? 그게 대체 뭔데?

<사나운 애착, 비비언고닉

누군가의 엄마로서 살아가며, 때론 원수 같고 때론 이웃 같은 징글징글한 주변인들과 얽히고 섥히며 가사노동을 수행해온 여성들에겐 시공간을 초월하여 미묘하게 닮은 구석이 있다. 도움을 주고받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어, 들키고 싶지 않은 집안의 불행을 별 수 없이 공유하게 되는 이웃집 여자와는 칼날 같은 말들을 서로 주고 받다가도, 결국 서로를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으로서 깊은 위로와 연대의 손길을 건넨다. 여성과 어머니라는 이름에 사회가 덧씌운 시선들 속에서 그들이 먹은 눈칫밥은 어느새 세상사를 단박에 꿰뚫는 직관이 되고, 안뜰에서의 위엄이 된다. 그 모든 일은 가장 사적인 동시에 가장 정치적인 부엌이라는 장소에서 벌어진다.


그들에게 부엌은 전부인 동시에 전부가 아니었다. 사실 그들은 이곳이 전부가 아님을 이미 알고 있었다. 누군가의 어머니가 아닌 온전히 자기 자신으로 살아갈 수 있는 다른 세상, 개인적 욕망이나 야망을 '이기적'이라며 낙인찍지 않는 사회—제약 없는 말, 눈치 보지 않는 결정, 자신의 꿈을 당당히 밝힐 수 있는 공간이 존재함을, 그들은 본능적으로 감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을 둘러싼 환경을 경멸한다. 집안일에 몰두하다가도 문득 카지노 게임 동작을 멈춘 채, 한없이 길게 느껴지는 몇 분 동안 불꽃이 일렁이는 아궁이를 바라본다. 그 불 속 어딘가에 자신이 닿지 못한 세상이 있다는 듯이.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딸이 사랑하는 사람과의 결혼을 앞두고 마주한 상견례 자리에서는 혹여 딸에게 피해가 갈까 염려되어, 하고 싶은 말을 꾹 눌러 담은 채 절절매는 사람이다. 또한 딸의 학업을 위해서 작은 아파트로 이사하는 결심마저 기꺼이 감내하기도 한다.


싱글맘이자 일하는 여성으로서, 임신과 출산, 양육을 경험한 레슬리 제카지노 게임슨도 일에 대한 욕망과 육아에 대한 죄책감 사이에서 갈등하며 이런 문장을 썼다.



-며칠 전 나는 편집자에게 수정고를 보내며 추신을 덧붙였다. "두 시간 전에 양수가 터졌어요." 나는 비몽사몽인 상태였고, 결의는 확고 했고, 수치심과 자부심카지노 게임 눈앞이 흐렸다. 내가 병원에서 잡지 기사를 마감하고 있다니! 아기를 낳은 직후에! 그러면서, 복도 끝 신생아실에서 황달기 있는 몸에 조그만 기저귀를 차고 이상한 푸른 태양 아래 빛을 받으며 잠들어 있을 내 어린 딸을 상상했다.

나중에 이 이야기를 쓸 때, 내가 노트북을 펼치기 전 머뭇거렸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들이 아기 요람을 밀고 떠나자, 나는 울었다. 어쩐지, 나는 아기가 떠날 때 울었던 버전의 나 자신이, 아기가 떠나자마자 노트북을 향해 손을 뻗었던 버전의 나보다 좋았다.

-그 애를 사랑한 건 순수한 감정이 아니었다. 카지노 게임 감정이었다. 그 감정은 그 애와 완전히 하나가 되고 싶은 마음과 도망치고 싶은 마음을 끊임없이 오갔다.

<카지노 게임 아름다움은 때 묻은 것, 레슬리 제이미슨



<폭싹 카지노 게임 보며 비비언 고닉과 레슬리 제이미슨을 떠올린 건 우연이 아니었다. 모성에 관해 이야기할 때, 그들은 마냥 '엄마 되기'의 약자성, 소수자성을 부각하는 서사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제이미슨은 좋은 엄마가 되고 싶지만 좋은 엄마가 아닌 방식으로 그것을 욕망하며 갈팡질팡했고, 그토록 사랑했던 글쓰기를 하는 자신의 모습보다도 아기와 함께하는 버전의 자신을 사랑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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훗날 딸 금명은 과거의 더욱 보수적인 남성중심사회에서 입에 풀칠하기 바빴던 시절에 관해 "카지노 게임는 저런 시절에 어떻게 살았어?"라고 묻는다. 그런 딸에게 애순 역시 그토록 원하던 대학 진학이 아닌, 엉겹결에 카지노 게임 되기를 선택했지만 생각만큼 불행했던 건 아니라고 답한다. 행복한 순간도 있었다며, 아궁이 앞에서 불을 때며 목격한, 따사로운 햇볕 아래에서 꼬마 금명이 자전거 페달을 밟기 시작하는 순간을 추억한다.


그들에게 임신, 출산, 양육이란 마냥 순수하고 성스러운 사랑은 아니었지만, 고통스럽고 후회스럽기만 한 기억도 아니었다. "카지노 게임 감정"이었던 것이다.



죽어도 카지노 게임처럼 살진 않겠어


이 드라마에 유독 공감하는 사람들이 많은 이유에는 애순과 관식의 장녀인 양금명이라는 캐릭터의 역할이 클 것이다. 금명은 넉넉하지 않은 형편에서 부모를 착취하여 서울대에 입학했고, 부모가 단단히 지은 요새에서 부조리한 상황에 침묵하기보단 목소리를 낼 줄 아는 아이로 성장했다. 명문대 입학 증명서가 아니더라도, 부모의 희생으로 학업을 지속하며 운 좋게도 페미니즘과 빈곤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언어를 획득한 2030 여자들이라면 공감하지 않을 수 없는 이야기다.


신발장을 정리하며 "지네야? 왜 이렇게 신발이 많아. 그것도 맨 싸구려."라고 말하는 애순에게 금명은 쏘아붙인다. "그 허영이 다 허기래, 없어 커서 그런가 그냥 계속 뭘 사고 싶어. 샘은 많은데 돈은 없고, 죽어라 갖고는 싶은데 죽어도 못 가지면서 크니까 지금은 조금도 참기가 싫어." 그런 금명의 속도 모르고 애순은 한 마디를 덧붙인다. "그럼 회사 그만두고 결혼해." 그런 애순의 가벼운 제안에 금명은 "절대로 카지노 게임처럼 살진 않겠다"며, 부모의 가치관을 보란듯이 배반하고 살겠다고 다짐한다.


해당 씬에서 금명은 오래되어 삐걱이는 창문을 애써 움직이려 이리저리 애써보지만 야속하게도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따사롭게 집안을 밝히는 남향의 집은 제 것이 아니라는 듯, 집안은 좁은 창 틈카지노 게임 들어온 한 줄기 햇살 외에는 온통 어두컴컴하다.


금명의 오랜 남자친구인 영범이 등장하는 장면 역시 가난의 디테일을 보여준다. 부잣집 아들로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가 귀국한 영범은 금명의 하숙집으로 가던 중 달동네의 쪽방촌을 카지노 게임 할렘가와 다름없다며, 너가 서울이 얼마나 위험한지 몰라서 그렇다며, 당장 이사를 가라고 외친다. 그에 금명은 되받아친다. "진짜 서울을 모르는 건 너겠지."


그녀에게 서울은 기회의 땅이 아니라, 버텨내야만 했던 공간이며 선택이 아닌 생존이었다. 금명의 한마디는 단순한 반박이 아닌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 대한 선언이자 사랑마저 밀어낼 만큼 단단한 경계를 그리는 일이었다. 죽어도 카지노 게임처럼 살지 않겠다고 했던 금명 역시 가난에 치이고, 여전히 남성 중심적인 사회 구조에 맞서서 그럼에도 다른 삶을 상상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섬이라는 공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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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맥락에서 바라보자면 <폭싹 카지노 게임는 단순한 개인 서사를 넘어 제주도라는 변방에서 진행되는 공간과 역사, 젠더가 겹겹이 쌓인 정치적 텍스트다. 제주도라는 비수도권, 식민과 수탈의 역사, 그리고 강인한 ‘어머니’상은 이중의 억압 구조를 보여준다. 육지와 단절된 섬이라는 지리적 특성은 물리적 고립을 만들고 그로 인해 전통과 공동체 문화는 더 강력하게 유지된다.


또한 자급자족과 상호의존, 유기적인 관계망이 생존의 조건이 되기 때문에, 어제의 원수를 오늘의 이웃으로 삼고 동고동락하며 살아가야 한다. 드라마는 순환하고 호흡하는 여성 공동체의 역할을 정밀하게 펼쳐보인다.


맨몸으로 바다로 맞서며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던 해녀들은 생존의 최전선에서 주체적으로 움직여 왔지만 동시에 집안일과 돌봄노동, 가부장제의 기대까지 짊어져야 했다. 경제적 주체이면서도, 사회적으로는 종속된 존재. 이러한 모순은 곧 <폭싹 카지노 게임의 애순이라는 인물에게 고스란히 투영된다. 똑똑하고 강력한 욕망을 가졌던 애순은 섬이라는 물리적 고립, 여성이라는 젠더의 경계, 가난이라는 계급의 굴레 속에서 자신의 삶을 조율하고, 꺾고, 다시 일으킨다.



4.3 사건 이후의 이야기


김원석 감독은 드라마가 1960년부터 시작한다며, 4.3 사건 이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고 밝힌다. 제주 4·3 사건은 제주도 현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비극적인 사건이기에, 많은 시청자들은 제주를 배경으로 한 작품에서 이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 직접적으로 다뤄지지 않은 것에 대해 역사적 맥락의 부재를 느낄 수 있다. (그 뒷 이야기가 풋풋한 학생 커플을 그리며 아름다운 향수로 묘사된다는 지점에서.. 더더욱 그럴 것이다....)


그러나 또다른 시의성을 찾을 수가 있다는 점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드라마는 비극을 직접 묘사하기 보다는 사건 이후 제주 사회의 변화와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물들의 삶을 조명하고, 상처받은 공동체의 회복 과정을 암시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국가 폭력과 진압이라는 사건 중심의 작품이 아닌, 사건 이후의 시간적 거리감을 통한 '비극 이후에도 살아야 하는 사람들'의 개인적인 이야기는 여성 공동체와 어머니의 목소리를 꺼내어 사람들의 공감을 이끌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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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싹 속았수다는 많은 이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드라마이지만, 모순적인 부분도 존재한다. 필자는 이 드라마를 보며 매번 기묘한 소외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는데, 첫번째는, 필자의 친부는 박보검 같지 않았다... 이며 두번째는 필자가 금명이처럼 서울대에 입학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마지막으로는 자꾸만 '귀하게 자란 자식'을 너무나 강조한다는 것이었다. (대체 왜!!)


애순이에게 헌신하는 관식의 모습을 편집한 유튜브 영상의 댓글창엔 모두 관식이 같은 남자를 만나야 한다는 사람들의 의견으로 가득했다. 드라마는 그럴 의도가 아니었겠지만, 허구 속 관식은 너무나 판타지 같은 존재였기에 어쩔 수 없이 이 서사 역시 '좋은 남자'가 존재해야 완결된다는 구조로 진행되는 것이다. 남성 중심 사회에서 어린 가장으로서 가족을 부양해야한다는 책임감을 갖고 있던 관식은 일을 하다 다쳐도 말없이 묵묵히 일하며 아픔을 내색하지조차 못한다. 가정의 중심으로 우직하게 서서 그 무게를 오롯이 혼자 감당해야 했던 관식의 내면에는 말하지 못한 고단함이 흐르고 있다.


당시 시대적 상황에는 사실 양관식 같은 캐릭터 못지않게 부상길과 같은 가부장적인 아버지의 전형을 보여주는 남자들이 많았을 것이다. 양관식 같은 남자가 얼마나 된다고.. 그를 무조건적으로 '좋은 신랑감'으로 여기며, 이런 세상에서 이렇게 좋은 이야기를 해놓고 마치 백마 탄 왕자를 ‘덜 불편하게’ 재해석하는 것은 남성의 성역할에 대한 또다른 억압으로 느껴져 조금 아쉽다. 드라마는 당대의 역사를 그저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시청자의 이러한 반응은 어쩌면 진보된 이성애 로맨스의 한계 지점이자 그냥 코리아의 한계일지도 모른다.......하지만 그게 그 시절의 현실이기에 어떤 정답 같은 전개를 기대하는 건 아니다. 그냥...그래도 말해보고 싶었음..


또한 애순을 괴롭히는 이에게 애순에게 호감을 갖고 있던 동료가 "너는 농업고등학교지? 얘는 서울대야."라고 말하는 전형적인 '참교육' 서사의 전개는 학벌과 사회적 지위를 통해 타인을 평가하고 서열화하는 한국 사회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위근우 작가는 "참교육 서사에서 쾌감의 본질은 정의의 구현이 아니라, 감히 자기보다 강한 나를 약자인줄 알고 건드렸다가 망한 상대방의 어리석음을 비웃어주는 것에 있다. 강하다고 약자를 건드리면 안된다는 도덕 원칙이 중요한 게 아니라, 자기 주제를 모르는 것에 대한 괘씸함이 중요하다. 정의로 포장한 우회적인 약자혐오"(*뾰족한 마음)라고 말한 적이 있다. '참교육'을 통해 학벌 중심주의와 사회적 서열화의 문제점을 부각시키는 이 장면은 시청자들에게 학벌이 아닌 개인의 진정한 가치와 능력을 재고하게 만든다.


덧붙여, 드라마에서 유독 자주 등장하는 말은 '귀하게 자란 자식'이다. (그쪽 보니까 귀한 집 자식인 것 같던데, 사실 그게 뿌리 깊은 깡이잖아요. 저도 좀 귀한 자식이거든요? 나는 나 기 안 죽고 사는게 우리 엄마 아빠 기 안 죽이는 거라고 생각은 하고 살아요. )가정환경과 개인의 성격 형성 간의 관계를 강조하는 이 단어는 애정 넘치는 가정에서 성장한 사람이 더 당당하고 자신감 있는 성격을 가질 수 있다는 일반적인 믿음을 반영한다.


그러나 이러한 묘사는 가정환경이 개인의 성격을 결정짓는 유일한 요인이라는 편견을 강화할 수 있다. 실제로 개인의 성격 형성은 유전적 요인, 사회적 경험, 교육 등 다양한 요소의 복합적인 결과다. 물론 귀하게 자란 자식은 오지는 깡카지노 게임 살아남는다는 말은 맞는 말일 수도, 틀린 말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확실한 건 가정에서의 지원을 받으며 성장하지 못한 많은 사람들은 이 서사 속에서 자꾸만 조용히 밀려나게 된다는 점이다.


<폭싹 속았수다는 어찌 됐든 참 많이 울었고.... 좋았던 부분이 많았던 드라마다. 하지만...

너무 하고 싶은 말이 많아서 결국 다 하지 못했고 그래서 결코 마음에 들지 않음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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