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에 관해 숙의를 나누는 일에서 항상 언급되는 건, 만화의 진지함에 관한 이야기다. 이를테면 만화를 분석하는 일에서 영화의 방법론을 채택하는 일은, 영화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시점으로 만화를 멋대로 재단해버릴 뿐인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있다. 이는 만화를 두고서 영화의 하위분과인 것처럼 오인하게 하므로 잘못된 태도라는 지적이 있다. 실제로 이는 합리적인 추론인 것으로 보이는데, 당장 서브컬처의 대가인 오스카 에이지부터가 ‘멋진’ 만화 만들기 방법론으로 ‘영화’의 방법론을 참고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그의 책 중 하나는 이름부터가 『영화식 만화 만들기』다. 만화를 그럴듯하게 보이게 하려면 영화에서 말하는 촬영구도나 컷 구성 등을 참조하라는 게 이 책의 주요 논지다. 그러니 이런 논의를 보고 있으면 “왜 만화는 영화의 시점으로 설명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의구심이 드는 것도 당연하다. 그건 마치 가만히 있었는데 친구랑 비교하는 어린 시절의 부모님을 떠올리게 하니 말이다. 이를 따라 만화를 만화만의 방식으로 설명하는 것을 늘상 생각해보고는 하지만, 그걸 할 때면 머릿 속이 뒤죽박죽되어버려서 별다른 썩 좋은 생각을 해내지 못한다. 단지 만화라는 매체가 아니라, 그걸 향유하는 이들의 문화 등에서 힌트만을 얻을 뿐이다. 만화를 만화답게 하는 건 무엇보다 만화를 향유하는 이들의 문화다. 그렇게 여기면 외부적인 시선에 구애받지 않고서, 자체적으로 유지되는 생태계를 논하는 게 가능하다.
어쨌거나 만화를 좋아하는 집단을 소위 ‘오타쿠’라고 가정할 때, 이 단어의 의미범주가 확장된 오늘날에는 아무쪼록 향유자 집단 정도로 단어가 축약되는 감이 없지 않다. 가령 시네필은 영화 오타쿠, 삼국지의 팬은 삼국지 오타쿠 정도로 축약해볼 수 있다. 향유할 수 있는 문화의 가짓수가 점점 늘어나는 상황에서, 어느 한 곳에 집중하는 일이 특이하게 여겨지는 것으로 보인다. 선택지가 다양해질수록 사람들은 점점 더 외부에 자기를 확장하고 또 개방하게 되지만, 도리어 열린 결말에 불만을 갖고서 어느 한 장소와 개념 등에 천착해볼 수도 있다. 이를 따라가면 오타쿠 집단에서 어떠한 정치적인 행동이나 강령 등을 발견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음악 축제, 영화제, 게임 행사, 코스프레 카페, 팝업스토어 등. 오타쿠 문화는 무엇이든 엮고, 연성하지만 반대로 그것들을 다루는 자기만큼은 확고하고 싶어한다. 이는 물론 사물이나 대상을 감각하는 주체가 바로 자신이어서도 하지만, 바라보는 시점을 고정하는 것은 자기 존재의 불변성이라는 걸 누구보다 더 잘 알기 때문이다. 소위 덕질을 하면서 땅을 파고들려면 드릴이 있어야 하고, 드릴 비트가 뭉개지지 않으려면 그만큼 심지가 굳어질 수밖에 없다. 오타쿠의 정치성은 이런 면에서 장소의 채굴하는 광부의 면모에 빗대어진다. 자신은 이곳에 사는 게 아니며, 단지 항해를 하고 싶은 어느 외딴 광인일 뿐이라고. 바다와 하늘에 구역을 나눌 수 없다. 단지 더 높이, 더 깊이라는 두 가지 한계만이 있다.
한국에서는 만화 비평이 일본 만화의 비평론을 빌려 온 게 많으므로, 아무쪼록 만화 비평의 정치성도 그런 흐름으로 바라볼 여지가 있다. 두 나라를 일대일로 비교해보려는 게 아니라 왜 하필 영화에서 답을 얻으려 했는지를 생각해보고 싶다. 이른바 “왜 만화는 영화의 방법론을 도입하려 했는지”를 가정하면 문제는 생각보다 간단하다. 단순히 영화 매체의 좋은 면을 도입하려 했을 수도 있겠지만, 영화가 갖는 개척의 가능성을 확보하려 했을 수도 있다. 당시로서 영화는 영상문화의 최전선에 자리한 매체였으므로 자연스레 영화는 개척의 끝자락에 자리했을 테다. 영화는 예술이 추구하는 궁극의 이데아에 가장 근접한 매체로 여겨졌다. 동시에 영화는 그동안 서로 끊겼던 매체 간의 교류를 가능케하는 은하열차(*뤼미에르 갤럭시)처럼 여겨졌을 테다. 은하열차는 오래도록 끊겼던 예술계의 교류를 끌어냈다. 그 여정은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처럼 긍정적인 역할만을 한 건 아니었고, 어쩌면 영화의 타매체화 식민지화를 지지하는 여정이기도 했지만, 한 세계를 영구적으로 가로막던 하늘을 열어 항로를 개척한 것이기도 했다. 만화가 영화를 닮으려 했던 건, 그런 뜻에서 은하열차를 닮으려 했던 것이다. 만화가 만화로서 존속하려면 자신이 지닌 형식적인 틀과 완고함을 벗어던지고서, 앞으로 나아가며 열린 세계를 안으로 받아들이는 식의 진보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이다. 그것이 개척이든 간에 파멸이든 간에, 천외로의 가능성을 보여준 것은 은하열차의 몫이었다.
만화 비평에서 현실 정치를 논하려는 시도도 같은 비슷한 맥락인 듯 보인다. 영화가 만화에 남긴 흔적이 다른 매체로 가는 통로를 여기저기 만들어둔 것이었다면, 이제 남은 건 이를 통해 어디로 갈 것인지의 문제이며 많은 경우 그런 논의는 현실로 향할 수밖에 없다. 영화가 만화에 남긴 건 만화가 현실의 자리를 바라볼 수 있다는 것, 마찬가지로 만화 오타쿠는 만화만의 방식으로 현실과 연결될 수 있었다. 단지 만화가 현실을 향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열린 가능성들이 칸 만화 사이에 열린 우주를 메워주었다. 이제 칸만화의 형식은 사이를 간극으로 사유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와 같은 사이에서 어떠한 목적도 갖지 않는 정치체를, 정치적 삶이 발생하는 공간을 형성한다(한나 아렌트). 이 공간은 사이를 벌려 현실에 침투하기 때문에 그와 같은 예외 상태를 비현실에서 현실로 돌려놓는다. 이 점에서 영화가 만화에 남긴 유산은, 그와 같은 사이가 무대에서의 암전이 아니라 일시적인 깨어남과 명멸의 반복이라는 점을 말하는 것이었다. 세계는 단 한 번의 폭발로 끝나지 않는다. 만화를 덮어버리면 이야기는 그걸로 끝나지 않는다. 영화가 이례적인 상황 속으로 독자를 끌고 간다면 만화의 역할은 양쪽 시야의 간극에서 현실의 눈속임(Trompe L'œil)을 설계하는 일이었다. 이 눈속임은 그럴듯한 환영을 우리에게 제공하면서, 반대로 만화가 품은 세계의 가능성이 현실의 법칙에 위배되지 않음을 말해주었다.
*
어떠한 담론을 논카지노 게임 일에서 간과되기 쉬운 건, 지루한 숙의를 건너뛰고 싶어카지노 게임 일이 이야기 전체에 대한 본질을 흐리는 일로 오용이기만 한 건 아니라는 점이다. 이는 물론 시간 들여 설명하지 않아도 될 만큼 자명한 사실일지도 모른다. 앞 뒤 맥락을 생략하고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여줄 때 정보의 왜곡이 일어나는 것 말이다. 그러나 정보가 제약되는 일이 도리어 한 개인의 세계를 확장했던 사례는 무척 많다. 이를테면 카메라 옵스큐라라는 초기 광학 장치는 빛이 너무 많은 세계에 가림막을 두어 적절한 정도로 광량을 축소 및 제한한 사례이다. 여러 정보로 넘쳐나는 세상에서는 도리어 어둠 속으로 들어가야만 비로소 한 세계를 손 안에 ‘획득’할 수 있다고, 가시화할 수 있다고 이 사례는 말카지노 게임 듯하다. 한 세계에 접속하려면 반드시 어둠 속을 지나쳐야만 했다. 혹은, 어둠에 소속될 필요가 있었다. 어둠 속에서만 반딧불의 명멸을 관측할 수 있다는 조르주 디디-위베르만의 말은 그와 같은 의견에 힘을 실어준다. 요는 세상을 밝히는 일은 단순히 폭탄을 터트려서 한 세계의 시야를 백야에 내모는 일이 아니라는 점, ‘어둠’에서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곳과 모여야 할 장소를 찾는 등대의 역할을 해줄 때 비로소 가치 있다는 점이다. 지루한 숙의는 이야기의 전후와 내막을 밝히는 데 필수적인 파트지만, 그것이 오용될 때는 무엇이 진짜로 가치 있는 정보인지를 숲에 숨겨버리는 백야로 기능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건 뭘까? 야간 투시경이나 적외선 카메라?
“중요한 부분이에요. 뒤에 나오는 씬을 돋보이게 하는 파트니까.” 어떤 매체든 간에 이야기는 곧바로 절정부에 진입하는 법이 없다. 절정부를 더 재밌게 보여주기 위해 풀이되는 숱한 이야기가 전면에 있다. 이 전방의 이야기를 굽이굽이 돌아와야만 비로소 정상에 보이는 절경이 있다. 작가들은 이후의 이야기를 위해 여러 떡밥을 곳곳에 숨겨놓는다. 나중에 가서야 독자는 그게 떡밥이었는지를 알아채면서, 절정부에 다다른 이야기가 이전까지의 전개 모두를 품는 일을 목격한다. 아마도 독서의 환희는 이 대목에서 주로 찾아오게 될 것이다. 절정부에서 뒤를 돌아보는 연출은 그동안 보고 들어왔던 경험들이 헛된 것이 아니었노라고 말하기 때문에, 작품이 요구하는 ‘인내’를 어느 정도 받아들일 만한 동인이 된다. 이는 ‘참고 견디면’ 좋은 날이 올 것을 확신할 수 없는 현실 때문에 더욱 굳건해진다. 현실에서는 참고 견뎌도 뭔가 좋은 날이 오리라고 확답 받지 못한다. 현실은 결말이 없고, 결말의 순간은 적어도 살아있는 동안에는 눈을 뜬채로 통과할 수 없다. 하지만 소설이나 만화, 영화 등에서는 이야기가 끝나는 순간이 물리적으로 명확히 ‘제시’되기 때문에, 그 순간을 통과해서도 영속하는 우리는 이 이야기의 결말을 ‘목격’했다고 느끼게 된다. 즉, 결말이라는 것은 무언가 ‘끝’을 조우했다기보다는 그것을 뒤돌아보는 쪽에 더 가까우며 이를 따라 ‘결말’은 그것이 실제로 발생한 지점보다 이후의 지점에서만 관측된다고 볼 수 있다.
이게 의미카지노 게임 건, ‘결말’이 사후판단적인 개념이라는 점이다. 결말이라는 게 항상 경험 이후에만 감각되는 현상이라면, 우리는 ‘결말’이 적어도 ‘선험적’이라고밖에는 판단할 수 밖에 없다. 그게 실제로는 어떻든 간에 이미 우리에 ‘앞서’ 있으므로 그를 따라잡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를 따라 존재는 두 개의 선택지를 받아드는데, 첫 번째는 이를 등진 채로 살아가는 것 즉 끌어안는 일이며, 다른 하나는 좁혀지지 않는 간극을 따라가면서 그것을 한계가 아닌 반(反)의 에너지로 응용카지노 게임 것이다. 전자의 경우 결말은 일종의 공리와도 같은 역할을 한다. 이곳에서는 지금을 있게 한 모든 자리가 굳건해서, 이를 하나라도 해치는 일이 불가능하며 이를 따라 주체에게는 거인의 어깨에 오르는 일만이 가능하다. 비유하자면 아무리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가도 이미 일어난 사건을 바꿀 수 없다. 어떤 과정을 거쳐서라도 결말은 ‘수행’되고야 만다. 결말의 이후를 살아간다는 건 이미 그런 결말을 전제한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달리 표현해서 이미 그 결론을 아는 사람에게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판단카지노 게임 일이 중요하지 않다. 자신의 존재원리가 이미 선험적으로 제시되었다면 그 이후의 삶 전체가 후일담이다. 이를 따라 한 존재가 뒤를 돌아보는 과정은 자기 존재의 불가침성에 대해 묻는 일이 된다. 결말은 실제로 발생한 지점이 사건의 최전선에 자리하지만, 정작 관측은 이후에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신체를 전선에 밀어낸다.
사람들은 우리가 포스트 아포칼립스의 시대를 살아간다고 말한다. 모든 게 끝장난 이곳에서는 단지 아픈 몸을 부여잡고서 비루한 삶을 이어가는 것만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여기서 사건을 끌어안는다는 것은 곧 ‘사로잡힌다는 것’과도 같다. 어차피 바꿀 수 없으니 안에 개입해보려 시도하지 않는다. 도리어 그것들에 고정되어 행동과 사고를 제약받는다. 이미 불가침의 영역이 되어버린 현실에서 우리는 항상 결말 이후의 존재로만 제시된다. 다음 장으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세계를 한번 꺼트렸다가, 다시금 일어나야 할 필요가 있음에도 단순히 결말이란 것을 마지막에야 제시되는 무언가로만 파악한다. 심지어는 사람들은 자신이 짊어진 삶의 무게가 이 세계의 바꿀 수 없는 대전제라고 착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이 끌어안고 있는 사건일 뿐, 그 자신이 나아갈 길을 가로막는 최후가 될 수는 없다. 현실에 드리운 그림자를 걷어내는 건 거리에 나가 행진하는 것만은 아니다. 영화나 만화와 현실이 갖는 결정적인 차이 중 하나는 곧바로 결말에 뛰어넘을 수 없다는 점이다. 자리를 옮겨 곧바로 결말을 읽으면 이 이야기가 어떻게 끝날지는 손쉽게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해버리면 우리가 현실로 돌아왔을 때 여전히 잔존하는 이 현실이 아무런 영향도, 의미도 갖지 못한다. 이런 세상에 만화를 읽는다는 건 쏟아지는 별빛 아래에서도 세상이 밝게 빛날 수 있다는 깨우치는 일이다. 지루하다는 건 우리가 의식이 아직 세상과 이어져 있음을 말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