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들어내는 세계는 오늘날 어떤 특성을 띠고 있는가? (…) 오늘날의 예술가들은 점점 태그와 해시태그와 카테고리 자체가, 혹은 적어도 그 비슷한 것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유운성-
씨네21이 제30회 영화평론상을 공모했다. 사실적시에 불과하므로 뭔가 더 적지는 않겠다. 다만 씨네리의 평론상이 갖는 상징성을 두고서는 이야기해볼 게 있다. 그건 바로 씨네리가 평론상을 운영하는 이유에 관해서다. 씨네리는 영화평론 문화의 형성과 지속에 기여하고 있을까? 이는 사실이다. 만화평론가 타이틀을 달고 있는 입장에서 만화평론가의 ‘탄생’이 단순히 평론 공모전이 부재하기 때문이라는 걸 잘 안다. 과거에 만화평론상을 운영하던 곳이 모두 평론상 운영을 접었기 때문에 꿋꿋하게 공모전을 이어가는 만화영상진흥원이 유일한 권위자로 남은 것이다. 단순히 ‘만화’가 ‘영화’보다 활동할 수 있는 영역이 좁아서라고도 볼 수 있지만, 여기서는 잠시 접어두도록 하자. 여하튼 씨네리는 30년 동안 평론상을 운영해왔기에 그만큼 출신자로 활동하는 이가 많고, 이들의 이름 자체가 오늘날 씨네리 평론상의 권위를 입증한다. 동문이라고도 볼 수 있겠고 카르텔이라고도 적을 수 있겠지만, 평론상이 유지돼야 한다는 점에는 이견 없이 공감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 일이 마치 태그와 해시태그를 달고서 씨네리 평론가라는 카테고리를 설정하는 일로 번진다는 점에 있다.
유운성의 말을 빌려 이걸 ‘만들어내는 세계’의 문제의식으로 칭해보자. 언젠가 김신은 KMDB에서 시네필 집단이 하나의 거대한 군체처럼 느껴진다고 지적한 바 있다. 요즘 말로 하면 ‘알고리즘’이라 볼 수 있을텐데, 알고리즘은 이용자가 무언가를 ‘좋아한다’고 직접 추론하는 게 아니라 무언가에 대한 확신편향을 갖고서 해당 방향으로 이용자를 몰아넣는 쪽에 더 가깝다. 양치기견이라는 비유를 사용할 수 있겠는데 그말인즉 이용자가 용기를 내 양치기견의 포위망을 뚫어버리면 언제든지 초원 너머로 도주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진격의 거인에서 엘런이 하늘을 향해 팔을 뻗는 모습을 상상하곤 한다. 요 몇 년 동안 줄곧 ‘바깥’을 상상하는 일에 매달려왔다. 이런저런 이야기가 가능하지만 여기서 설정하려는 전제는 단 하나다. 인간은 자아를 유지하려고 ‘바깥’을 만들어냈다. 마치 세포가 생존을 위해 특정한 정도의 ‘농도’와 ‘기압’에 대응하듯 우리는 무언가를 계속해서 짊어지고 그에 압박받지 않으면 안 된다. 시네필에겐 바로 이 바깥이 존재한다. 시네필은 영화를 보는 이유로서 어떠한 ‘바깥’의 문제들을 상정하고, 이를 토대로 자신을 특정한 방향으로 몰아넣는다.
모든 것에서 자유로워지고 싶다. 특정한 방향으로 자신이 내몰리고 있다면 눈을 내리깔고 앞쪽을 조용히 돌파하고 싶다. 시네필은 영화를 보기 위해 바깥의 것을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영화를 보는 자기를 견디려고 ‘바깥’을 설정했다. 항상성을 위해 내부의 척력만큼 외부의 인력을 설정한다. 그러면서 어쩔 수 없다고, 외부에는 거대한 끌림과 질서가 있으니까 이를 따를 수밖에 없다고 자조한다. 하지만 당신은 자유다. 보기 싫으면 보지 않아도 된다. 보고 싶으면 그냥 보면 된다. 영화를 보면서 무언가 중요한 걸 잊고 있는 건 아닌지를 고민하지 않아도 좋다. 영화를 보는 일이 정작 바깥 세계를 등한시할 뿐이라고 여기지 않아도 된다. 외부에서 카테고리화되는 자기란 남들이 다 집고 남은 것을 주워먹는 ‘선택권을 박탈당한 상태’에 다름없다. 이런 상황에서 시네필은 부유하는 마음을 붙잡아두려고 태그와 해시태그 같은 것으로 카테고리화를 시전한다. 이것들은 방향을 제시하기만 할 뿐 자기를 내면에서부터 바로 세우지는 못한다. 그래서 하늘을 향해 팔을 뻗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이 있을 곳을 위해 세계를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자신이 살고 싶은 세계를 만들어가야 한다.
문득 위치짓기라는 말을 떠올려본다. 90년대에는 라깡 붐이 일었는데, 문화에 관심있던 사람 중에선 영향을 받지 않은 이가 없었다. ‘위치짓기’도 그런 문화적 흐름의 산물이다. 계급에 따라(혹은 영향받아) 자신의 태도가 결정된다고 보았던 이 이론은 시네필이 되어가는 과정을 쉽게 설명했다. 90년대에 문화를 공부했던 이들은 이를 거울에 빗댔는데, 특정한 계급끼리만 향유하는 문화 자본이 곧 문화적 ‘가치’를 형성한다고 보는 이 관점은 영화라는 장소 앞에 쉽게 무력화됐다. 거울효과는 자기 앞에 한 개인을 세울 뿐, 이것을 보기 위해 무언가를 요구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거울 앞에 서면 우리는 누구라도 혼자가 된다. 거울은 자신을 세계에서 분리해 내어 있는 그대로 자기를 목격하게 한다. 그러니 90년대 한국에서 타르코프스키의 영화가 인기를 끌었던 것도 무리는 아니다.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를 두고서 가장 많이 나왔던 언급이 바로 거울의 영화라는 점이었으니까. 어쨌거나 이전까지 소수의 폐쇄된 인원을 필두로 이뤄졌던 시네필 모임이 대외적인 공론장 안에 편입된 건 영화에 그와 같은 장소성이 부여됐기 때문일 공산이 크다. 자신이 있을 곳이 되어주는 게 영화의 기능이었다.
아마도 영화는 이렇게 ‘혼자’의 계급성을 부여했던 것 같다. 이전까지 계층은 자신이 어떤 것에 속해있음을 ‘발견’하게 했고 이를 따라 운동성(Activism)이 부여됐다. 반면 영화는 이 세계에 속한 ‘자신’을 발견하게 했고 이를 따라 자신에서 운동-이미지를 찾아냈다. 즉 영화는 자신을 사로잡는 모든 것에서 관객을 해방했다. 자크 랑시에르는 이를 두고서 ‘해방된 관객’이라는 표현을 썼다. 허구는 무언가를 새로 상상하는 일이 아니라 현실과의 불일치에서 관계를 재정립하는 운동이라고 그는 말한다. 그리고 영화가 허구인 이유가 그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현실에서 말하는 반복은 아무런 변화가 없고, 그래서 발전하고 있지 않다고 말이다. 반면 영화가 말하는 반복은 언제라도 다시 돌아올 수 있다는 재시동에 더 가깝다. 영화를 보며 자신이 갖고 있던 생각이 공공연해지는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영화가 보여주는 현실이 불만족스러우면 영화보기를 관두지 영화를 고치러 들지는 않는 것이다. 반면 한 영화가 개인의 삶을 뒤집거나 또는 눈을 번쩍 뜨이게 하는 일은 종종 일어난다. 이 경우에도 역시 영화는 여전히 불가침의 영역으로 남지만, 이제 그 영화는 당신을 구했다.
일종의 사회적인 안전망이라고나 할까. 만약 영화가 꿈이라면, 자리를 떠날 때를 말해주는 그런 꿈을 아무도 본 적이 없을 테다. 영화는 자신이 떠나야 할 때를 안다는 점에서 도리어 삶의 선택과 깊숙이 연결된다. 자신이 떠날 때를 선택하는 것일 수도 있고, 그저 자신을 운명에 맡기는 것뿐일 수도 있다. 아무렴 영화를 보는 순간만큼은 자신이 어디에서 출발했고 또 어디로 가야할지를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이 순간만큼은 자신을 설명하는 유일한 게 바로 자기 자신에만 불과하다. 사회 계급이나 구조에 의해 자신을 위치짓는 게 아니라 나 자신은 무엇에도 포섭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일, 영화가 우리에게 남긴 건 “세계에 대한 믿음”이었다. 이곳이라면 ‘나’라고 확실히 안심할 수 있을 만한 세계를 구성하는 일, 영화는 우리가 사는 이곳이 한 차례의 소동극이 벌어졌던 ‘실락원’이라고 전한다. 무언가를 잃어버렸으니까 그에 수반해 ‘과오’를 받아들인다. 무엇보다 이렇게 아픈 기억에 사로잡힌 이도 끝내 앞으로 나아가게 됨은 영화 매체가 지닌 시간성의 가장 강렬한 특장점일 것이다. ‘거울’은 한 세계를 정직하게 재현하는 도구가 아니라 우리가 바라는 이상이 불가능함을 공공연히 선언무료 카지노 게임 ‘환상살’이다.
누군가 인용하는 텍스트를 보면 이 사람이 뭘 좋아하고 어디서 공부했는지를 왠지 알 것만 같은 기분에 사로잡히고는 한다. 김신의 말대로 아마 이건 자신이 같은 업계 안에 속해있다는 점을 방증하는 것일 테다. 우리는 이를 ‘문’이라 불렀다. 일본의 만화 도라에몽에 나오는 도구인 ‘어디로든지 문’은 자신이 가고 싶은 곳에 연결되는 신비한 존재다. 이런 상황에서 게이트 키핑은 마치 등단만 하면 자신이 어떤 세계로든 갈 수 있을 것만 같은 환상을 제공한다. 그러나 영화는 무언가가 되어가는 과정이 아니라 당신이 바로 그 무언가라고 말한다. 영화의 결말과 마찬가지로 우리 자신은 항상 한 세계의 지향점으로 제시된다.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게 자신이 받아들인 이 세계의 최종 판본이다. 여기서 영화는 다른 무언가에 빗대지 않고서 자기 자신을 설명할 수 있게 되는 것, 즉 ‘자아’를 세계로 구축하게 해준다. 당시 문화 자본이 마땅치 않던 이들에게 누구라도 시네필이 될 수 있다고 말하는 이 이론은, ‘영화’를 사랑하는 일에 따로 계급 구분을 두지 않는다는 점에서 하나의 공론장이 됐다. 이런 상황에서 ‘등단’은 세계를 만들어가고 싶은 창조 욕구를 반영한다.
씨네리는 왜 도전(盜電)의 대상이 될까. 상을 받은 이들이 자신이 ‘평론가’라고 말할 만큼 그 상에 권위가 있다고 느끼지 않아서일 수도 있다는 걸 염두하고 싶다. 중학교 백일장에서 당선된 걸 두고 등단했다고 하지는 않듯 자신이 바라는 이상이 더 높은 곳에 있을 수 있다. 그래서 문학계에는 지방지에서 등단한 이가 중앙지로 재등단하는 일도 흔하다고도 한다. 사람들은 “상을 어디서 받았든 노력이 중요했던 게 아니냐”고도 하지만, 대개 활동하다 보면 결국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걸 몸소 체감할 뿐이다. 학벌과도 비슷하다고 볼 수 있을까? 낮은 등급으로 인식되는 평론상으로 등단한 이들은 결국 다른 무언가로 그런 콤플렉스를 지우려고 하는데 그중 하나가 평론상에 대한 반복적인 공모라는 점을 지적해볼 수 있겠다. 어쨌거나 평론상에 글을 낼 정도라면 씨네리가 아니면 자기만족에 이르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이 (영화 평론) 세상엔 쿨투라도 있고 영화평론가협회도 있고 부산영화평론가 협회도 있고 꽤 다양한 곳이 있지만 사람들은 자신이 만족할 때까지 행동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과 우리 모두 자유를 위해 태어난 존재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