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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클로이 Jan 31. 2020

카지노 게임 향해 앞으로 나아가기

- 책 <디어 라이프를 읽고

노벨상 수상으로 처음 알게 된 앨리스 먼로의 <Dear Life라는 이 책을 처음 봤을 때 왠지 모를 강한 끌림을 느꼈다. 언뜻 보면 카지노 게임에게 편지를 쓰는 것 같기도 하며 어찌 보면 친근하게 카지노 게임을 한 번 불러보기도 하는 듯 아리송한 이 제목이 호기심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아니, 그보다는 이 책이 당당하게 카지노 게임이라는 그 두 글자를 보란 듯이 내걸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카지노 게임은 항상 나에게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단어였다. 어떨 때는 세상에서 그렇게 아름다운 단어가 없을 거야 싶다가도 어떨 때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그 두 글자를 저주하고는 했으니까, 맞붙어 싸워야할 적 같다가도 이만한 친구가 없다 싶을 만큼 기대어 울고 싶은 좋은 벗 같기도 하니까.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집어 들며 밝은 미소를 가진 노작가가 나에게 카지노 게임에 대해 한 수 가르쳐 주기를 바랐다. 적어도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카지노 게임이라는 모순된 단어에 대해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


'Dear life'는 총 14편의 단편으로 엮인 소설집으로 각기 다른 다양한 삶의 단면을 작가의 노련한 시선으로 그려낸 작품이다. 가까이서 보면 조금의 연관도 없어 보일만큼 다른 이야기들이였지만, 한 발짝 멀리서 살펴보면 사실 일관된 메세지를 담아내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것은 카지노 게임에 대한 가장 오래된 진리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혹은 갈망하는 것, 바로 '카지노 게임의 가변성'이다. 우리는 살면서 자연스레 수많은 것들을 소망하게 된다. 내 자신과 나를 둘러싼 사람들이 항상 무탈하기를 바라며, 나의 꿈을 이루기를 바라며, 그 후에도 좋은 일들이 언제까지나 계속되기를 바란다. 이렇게 변함없는 행복을 갈구하는 것은 모든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이며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알고 있다. 카지노 게임이 절대 우리의 계획대로 되지 않으며 예상 밖의 일은 누구에게나 일어난다는 것을 말이다. 흔히 '사람 일은 모른다'고 하듯이 어떠한 계기로 인해 카지노 게임이 180도 바뀌는 일은 드라마에만 나오는 얘기가 아니라 우리 도처에 존재하는 일상의 단면일 뿐인 것이다.


예를 들어 첫 번째 이야기인 <일본에 가 닿기를에서는 자신의 일상에 지루함을 느끼는 '케이티'가 파티에서 만난 낯선 남자에게 흥미를 느끼며 익명으로 그 남자에게 편지를 보내나, 그 편지가 케이티의 편지임을 알아챈 남자가 케이티를 만나러 옴으로써 자신의 남편과 딸에게 의도치 않은 배반을 시작하게 된다. <메이벌리를 떠나며에서는 자신을 구속하는 가족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아무 별 볼일 없던 여자였던 '리아'가 목사의 아들과 결혼해 신분상승을 하게 되나, 그 이후에 불륜으로 이혼과 동시에 아이들을 빼앗기고 외롭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기차에서는 역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연인을 져버리고 기차에서 뛰어내린 한 남자가 또 다른 여인과 새로운 카지노 게임을 시작하게 되지만 다시 연인을 져버리고 혼자 떠돌아다니는 삶을 선택한다. 이렇듯 카지노 게임을 바꾸는 계기는 물론 인력으로는 어쩌지 못하는 사건이 될 수도 있겠지만 사실 의외로 너무나 쉽게, 그것도 우리 자신의 선택에 의해 일어날 수 있다. 때로는 아무 생각 없이 갈겨쓴 편지가, 때로는 주어진 상황에서 할 수 있었던 최선의 선택이, 혹은 한 순간의 충동으로 인한 뛰어내림이 모든 것을 바꾸어 버린다. 차라리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다면 모르겠다. 주인공들의 카지노 게임은 그 한순간의 선택에 바뀌어버리고 그 이후의 결과들 역시 그다지 좋아보이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만약 카지노 게임이 원치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게 되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지나간 선택들에 대해 후회하며 절망해야 할까. 아니면 다시 한 번 더 나은 삶을 위해 노력해야 할까.


여느 때의 나라면 분명히 더 나은 삶을 위해 노력하자라는 희망적인 대답에 한 표를 던졌을 것이다. 하지만 웬일인지 이 책에 나오는 주인공들의 태도는 절망도 희망도 아니었다. 그것은 절망과 희망 사이 그 어딘가에 있는 '받아들임'이었다. 여기에 두 번째 메시지가 숨겨져 있다. 카지노 게임이 내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아도, 그것에 대해 어떠한 판단을 하지 않는 자세. 사실 처음에는 주인공들의 이러한 태도가 이해가 안 가는 것이 사실이었다. <자존심에서 선천적인 질병 때문에 자신의 외모에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던 주인공은 '오나이다'라는 여자와 친하게 지내다 결국 그녀를 사랑하게 된다. 그런 그녀가 자신에게 같이 살자며 제안을 하지만 콤플렉스로 인한 자존심 때문에 거절하게 되어버리고 그녀와 헤어지게 된다. 그런 두 사람이 마지막으로 작별을 고하는 장면에서 주인공은 어떠한 해명도 하지 않는다. 그녀 또한 그의 마음을 짐작하지만 어떠한 질문도 하지 않는다. 그저 두 사람은 날아가는 새떼를 바라보며 아름답다며 진심으로 감탄한다. <코리에서는 더욱 이해할 수 없는 일이 펼쳐진다. '코리'는 아버지의 직장 부하였던 남자와 불륜관계를 시작하게 되는데 자기 집에서 일을 하던 메이드에게 그 사실을 들켜버린다. 그 메이드는 매달 일정한 금액을 요구하고 코리를 그렇게 꼬박꼬박 돈을 보냈다. 그러나 진실은 남자가 코리의 돈을 목적으로 하고 모든 일을 꾸며낸 것이었다. 코리는 그 사실을 깨닫고는 남자에게 따지지도 관계를 끝내지도 않는다. 그저 '더 좋지 않은 일이 있을 수도 있었다'며 혼자 생각할 뿐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게 됐음에도, 혹은 배신의 상처를 입었음에도 그들은 행동을 취하지 않는다. 그냥 물 흐르듯이 받아들여 버린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그 이유는 그들이 용기가 없어서도, 깊은 좌절에 빠져있어서도 아니다. 절망 속에서도 삶은 계속 될 것이고, 언제나 그러하듯 또 변해갈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카지노 게임의 가변성을 기반으로 한 일종의 받아들임, 나에게는 그들의 침묵이 그렇게 느껴졌다. 그렇게 생각하니 그들의 태도가 이해가 되었다. 지나간 과거에 대해서 판단하지 않고 자신에게도 그 누구에게도 해명을 구하지 않는 다는 것, 꼭 거기에 대해 슬퍼하거나 행복할 필요가 없다는 것, 그냥 지금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된다는 것은 매력적인 제 3의 대안이라고 느껴졌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지나간 어떤 일에 대해 옳고 그름을 판단함으로써 정신적 에너지를 낭비하고 그로 인해 더욱 불행해지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과거를 뒤돌아보며 후회하는 것이 아닌, 혹은 너무 앞선 미래를 건너다보며 헛된 희망을 품는 것도 아닌 일단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하다.


카지노 게임은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임으로써 더욱 성숙할 수 있다. 그것이 카지노 게임이다.첫 번째 메시지와 두 번째 메시지를 종합하면 이렇다. 여기까지 내 나름대로 만족할 만한 교훈을 얻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꾸만 아직 책 속에 또 다른 메시지가 남아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 번째도 두 번째도 맞는 말이지만, 나는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결국에는 슬프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타는 저녁놀을 보는 것 같은 무언가 아련하고 안타까운 감정, 그것은 바로 카지노 게임에서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소중한 사람들, 삶의 순간들에 대한 슬픔이었다. 각각의 이야기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지나간 카지노 게임에서 놓친 소중한 사람들을 아마 다시는 만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삶에서 가장 중요했던, 아름다웠던 순간을 영원히 기억 속에 남겨두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한 순간이 바로 <아문센에 가장 잘 묘사되어 있었다. 젊은 시절의 첫사랑을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우연히 거리에서 스친 '비비언'은 순간 그를 사랑했던 그 '여자'로 돌아간 자신을 발견하고는 '사랑에 관한 한 정말로 변하는 것은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 한 줄을 읽는 순간 나도 모르게 소름이 돋았다.


결국에 우리는 카지노 게임의 가변성을 알고 그것을 받아들이려 노력하지만 한편으로는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로, 눈부신 과거로 항상 돌아갈 준비가 되어있는 모순되고 슬픈 존재인 것이다. 나에게도 비비언처럼 이제는 다시 볼 수 없는 사람이 있다. 앞으로 걸어 나가야지 하면서도 가끔씩은 그립고 괴로워서 봉인된 기억을 꺼내어 추억하곤 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기억은 점점 사라져가지만 그럴수록 잊고 싶지가 않다. 나뿐만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그런 사람, 그런 순간들이 있을 것이다. 사실 어쩌면 카지노 게임을 구성하고 있는 것은, 앨리스 먼로가 남긴 마지막 은밀한 메시지는 그러한 찬란한 순간의 조각들을 간직하라는 것이 아니었을까.


마지막으로 이 책을 다 읽고 난 뒤 불현듯 떠오른 소설 <위대한 개츠비의 마지막 문장을 인용하며 독후감을 끝마치려 한다. "그래서 우리는 앞으로 나아간다, 배가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듯, 끝없이 과거 속으로 물러서면서(So we beat on, boats against the currents, borne back ceaselessly into the past)." 오래전부터 이 문장을 줄곧 단순히 과거에 대한 미련으로만 생각해왔다. 그러나 <디어 라이프가 주는 메시지를 찾아낸 지금, 나는 이 문장이 아름다운 동시에 얼마나 슬픈지 조금은 알 것도 같다. 앞으로의 내 카지노 게임에는 또 어떠한 찬란한 순간들이 기다리고 있을지, 그리고 나는 그 순간들을 어떻게 추억하고 그리워하게 될는지가 궁금해지며 이 책을 읽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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