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에서 귀국할 때는 내란사태, 영국으로 떠날 때는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
오늘은 고국 방문을 마치고 다시 영국으로 돌아가는 날이다. 아침부터 부산하게 짐을 챙겨 인천 공항에 도착한다. 탑승 수속과 함께 무거운 여행가방을 부치고 나니 어깨가 가벼워진다. 이제는 기나긴 출국심사대와 보안 검색대를 통과해야 한다.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몸은 고단하지만, 오랜만에 한국 친지들과함께 귀한 시간들을 보낸 터라 카지노 게임만은 풍요롭다.
이제 모든 출국 수속을 마쳤다. 이즈음이면 허기진다.‘출국 전 마지막은 뜨끈한 국물이지’싶어 곰탕을 주문한다. 음식이나오기를기다리는 동안, 가족들에게 출국 전 마지막 전화를 돌린다. 오늘따라 히드로 공항에도착하면꼭 안전하게귀국했다는문자를 남기라는당부의 말들을 전한다. 의례 작별 인사인 줄 알았다.
탑승 시작 안내와 함께 줄을 서는데 누군가 “비행기 사고 났다”라고 말한다. 급하게 인터넷에 접속한다. 내가 인천공항에서 뜨끈한 곰탕을 먹으며 고향을 떠나는 아쉬움을 달래던 그 순간, 전북 무안 공항에 제주항공 비행기가 불시착, 폭발하는 사고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이번 사고 여객기는 태국 방콕에서 출발해 전북 무안으로 향하던 길이었단다. 겨울을 맞아 따뜻한 태국의 정취를 즐기고 집으로 돌아오던 여행객들이 많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순간 내 주위를 스쳐가는 많은 공항 이용객들이 눈에 들어온다. 해외여행을 떠나는 흥분, 한국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얼굴들. 방금 전 사고를 당한 그 여객기의 탑승객들과 다름없을 것이다. 긴 비행을 해야 하는 입장에서 슬픈 생각은 접고, 무사한 여행길을 바라며 예정된 비행기에 탑승한다.
오늘 비행은 인천 공항에서 히드로 공항으로의 직항이다. 2년여 전에는 11시간 조금 넘는 시간으로 왕래가 가능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14시간이 넘는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러시아 영토 주위를 빙 둘러 우회하는 비행 결과다.
내 자리 옆, 통로 건너편에서 들리는 대화를 보니 영국 여행길인 가족이다. 다섯 살 정도로 보이던 어린아이는 비행 중반부터 계속해서 토하고 있다. 비행 승무원은 아이 토사물이 시트에 묻자, 바로 자리 정리를 돕는다. 아이와 눈을 맞추며 괜찮냐고 묻고, 자리정리는 걱정 말라며 안절부절못하는 아이 부모를 위로한다. 거리감은 있지만, 여기저기 아기울음소리가 들린다. 어른도 힘든 비행에 아이들 고생이 많다. 예정대로 비행기는 안전하게 히드로 공항에 도착했다. 착륙하자 옆 통로, 속이 불편해하던 그 아이 얼굴에도 옅은 웃음이 스친다.
이번 여행은 시작부터 쉽지 않았다. 영국에서 한국으로 출발 이틀 전, 가방을 꾸리고 있는데 국영방송 BBC 속보가 뜬다. <대한민국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하다대통령 연설문 내용이 번안되어 나오는데, 옛 군부시절 계엄령의 문구와 다를 바 없다.
국민을 상대로 총부리를 겨눌 기세다.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계엄이라 하면 ‘이동 제한’ 같은 조치들이 떠오른다. 고향 가족들의 안녕이 걱정이다. 급하게 전화해 보니 현지 가족들이 무슨 일인지 당황하고 있기는 멀리 나와 있는 나와 마찬가지다.
몇 시간 지나지 않아 영국 정부는 대한민국을 ‘여행위험국’으로 지정, 발표한다. 요즘 한류 문화가 주목받으면서 기존 북한과 대치 상태의 안보위험국 대신 문화 강국으로 이미지를 변화하던 대한민국이다. 러시아-북한의 군사협력, 오물풍선 등 남북간 긴장상태가 다시 회자된다. 심지어 계엄 선언 이후 몇 년째 정치 불안에 떨고 있는 미얀마에 빗대어지기도 한다.
다음 날, 가족들이 출근하는 길 마주한 일상은 평소와 다름이 없다고 소식을 전해온다.아이들과 우리 내외는 예정대로 한국행에 올랐다. 내 눈으로 직접, 방송에서 보이는 위기 상황이 아닌, 고향 서울을 보고 싶었다.
연말임에도 한산한 도심 거리,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상을 묵묵히 살아가고 있는 시민들은 든든하게 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마음이 놓인다.
하루는 점심으로 순대 국밥집에 들어갔다. 식당 내 틀어놓은 텔레비전 방송에서는 대통령 탄핵안 통과, 이후 정국 불안에 대한 설왕설래가 끊이지 않는다. 빼곡하게 매운 식당 테이블마다 탄핵정국에 대한 이야기들로 가득했다. 각자 이야기들이 들려오지만, 진영을 막론하고 공통점은 또 다른 탄핵 역사를 바라보는 착잡한 마음들이었다.
앞으로 경제상황에 대한 우려 섞인 이야기들도 많았다. 오래간만에 가족들과마트장을 보니 훌쩍 오른 장바구니 물가를 실감할 수 있었다. 친지들과 외식할 기회가 많았는데, 삼겹살에 소주라도 한 잔 기울이려면 십만 원대는 우습게 넘었다.당장 나처럼 해외살이하는 입장에서는 뛰어오른 환율 때문에 환차손이 직접 피부에 와닿는다.
영국 집에 도착하니 여행 피로감이 몰려온다. 뜨거운 차 한잔으로 몸과 마음을 녹이면서 인터넷에 접속해 본다. 무안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 관련, 업데이트된 기사들이 주욱 달려 나온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대한민국에 악재가 너무 많다. 사람이 살아 있는 한, 대한민국 국민들이 일상을 든든히 버티고 있는 한, 이 모든 어려움들을 겪을지언정 다 지나가고 해결할 수 있다. 다만 인명피해를 입은 무안 제주항공 사고는 그 슬픔을다른어느 방법으로도 채울 수 없다. 진심으로 이번 사고 희생자들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