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카지노 게임의 기원, 프로이트적 관점에서 본 <데미안
오랜만에 <데미안을 다시 펼쳐 읽는 도중 기이한 경험을 했다. 묘하게도 책의 글자 하나하나가 나의 세포를 자석처럼 강하게 끌어당기는 느낌이었다. 마치 점성이 강한 물체와 붙어있는 것처럼 내가 책이 되고 책이 내가 되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같은 시기 함께 읽고 있었던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입문과 <데미안이 많은 부분에서 일치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동안 대부분의 문학비평에서 데미안은 융의 ‘개성화’ 개념으로 읽혀왔다. 그의 해석에서 싱클레어는 ‘자기’가 되어가는 주체로, 데미안은 ‘그림자’이자 ‘안내자’로, 에바 부인은 ‘아니마’로서, 싱클레어 내면의 여성성, 창조성, 직관의 상징으로 분석된다. 그러나 정작 많은 부분에서 더 합리적인 해석은 프로이트적 관점이다. 싱클레어가 실제로 겪는 성적 욕구에 대한 죄책감과 갈등을 극복해 나가는 과정들은 융적인 관점보다프로이트의 리비도적 관점에서 본 해석이 더 직관적이고 분명하다.
융과 프로이트적 관점에서 싱클레어가 자아를 찾는 과정은 자신의 무카지노 게임에서 떠오른 의식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결과다. 그렇다면 무카지노 게임은 어떻게 형성되는가?무카지노 게임에 관한 융과 프로이트는 다른 입장을 보인다. 그리고 진화생물학적 관점과, 현대 뇌과학의 관점에서 살펴보면, 데미안은 프로이트적 관점에서 더욱 설득력 있게 해석할 수 있다.
먼저 무카지노 게임에 대한 관점부터 살펴보자.
프로이트는 무카지노 게임을 억제된 충동의 저장소로 보았다. 이 관점은 인간이 사회적 규범과 도덕에 의해 성적 욕망이나 공격성과 같은 본능적 충동을 억누르게 되면서 무카지노 게임이 형성된다는 전제를 가진다. 융도 개인적 무카지노 게임은 후천적 경험의 축적으로 생긴다는 점에서 프로이트와 의견을 같이한다. 그러나 융에게는 하나의 개념이 추가된다. 바로 집단 무카지노 게임이다. 그는 무카지노 게임의 가장 깊은 층에 개인의 삶과는 무관한, 인류 전체가 공유하는 보편적 심리 패턴이 존재한다고 보았다. 다시 말해, 무카지노 게임은 단지 삶을 통해 축적된 것이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인간 안에 새겨져 있는 어떤 구조라는 것이다.
융은 집단 무카지노 게임 속에, 인간이 자기(Self)를 향해 나아가도록 이끄는 자연스러운 방향성이 존재한다고 보았다. 그는 이를 ‘미래를 지향하는 목적론적 에너지(teleology)’라고 불렀다. 인간이 단지 본능적으로 생존하거나 욕망을 추구하는데서 그치지 않고, 내면의 혼란, 억압, 갈등을 통합하여 완전한 자기를 실현하고자 하는 방향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자아를 통합하려는 방향성을 타고났다는 융의 견해는, 인간의 본성을 설명하기에는 다소 낙관적이고 추상적인 면이 있다.
인간은 자아를 통합하기 위한 방향성보다 생존과 번식을 위한 방향성을 갖고 있다. 이는 진화심리학과 생물학에서도 인간 본성의 주요 동기로 지적되어 왔다. 따라서 싱클레어가 겪는 성적 욕망과 죄책감, 내적 갈등의 극복은 융적 통합의 과정이라기보다, 억압된 리비도를 수용하고 승화하려는 프로이트적 관점에서 더 명료하게 설명된다.
융이 말한 자기(Self)를 향한 심리적 방향성은, 실증적 증명에 기반한 과학이라기보다, 인간이 성장과 통합을 지향한다는 형이상학적 믿음에 더 가깝다. 마치 성선설처럼, 그는 인간 본성 안에 고차원적 통합을 향한 가능성과 경향이 ‘내재’되어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전제는 과학적 근거보다는 인간에 대한 신념에 가까우며, 인간 심리에 대한 비판적 탐구 태도를 약화시킬 수 있다.
프로이트는 <정신분석 입문에서 성충동이 모든 욕구의 기본적 속성이라 말한다. 그리고 모든 전제가 성충동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그의 이론이 원론적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성충동’ 자체가 아니다. 프로이트가 강조한 것은 ‘성적인 것’을 언급하는 것조차 금기시하는 사회분위기로 인해 발생한 ‘억압’이다. 프로이트는 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말하지 못하도록 만든 억압을 문제 삼았다. 그는 무카지노 게임이어떻게 억압 속에서 작동하며, 그것이 인간의 심리에 어떤 방식으로작용하는지를 정신분석의 출발점으로 삼았던 것이다.
헤세가 데미안을 집필하던 시기는 1차 세계대전 직후로, 당시 유럽사회는 전반적으로 도덕적 아노미를 겪고 있었다. 전쟁은 중세적 가치관을 뒤흔드는 가장 강력한 계기가 되었고, 사람들은 더 이상 종교적 신성함을 바탕으로 한 선과 악의 이분법적 개념에 설득되지 않았다.이미 전쟁으로 인간의 마음은 황폐화되었으며, 신에 대한 회의감이 강해진 것이다.
헤세는 ‘아브락사스’라는 상징을 통해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을 해체하고, 기존 도덕과 규범을 새롭게 바라보도록독자를 이끈다. 이는 도덕적 기준의 해체와 재구성을 위한 일종의 변증법적 실험인것이다. 그는 사회적, 규범적으로 억압된 세상을 <데미안이라는 작품으로 승화시킨 것이다.
어떠한 관점에서 본다 하더라도, 궁극적으로 데미안은 ‘자아를 찾아가는 진실된 여정’이라는 사실만은 변함이 없다. 헤세가 싱클레어를 10대 소년으로 설정한 것도 인간의 ‘성장’을 더욱 극대화시켜 주는 장치로 작용한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세계다.”
인간은 세계에 속하지만 여전히 세계를 깰 수 있는 존재다.내면의 억제된 감정과 충동성을 무절제하게 드러낼 것인가 승화시킬 것인가.
그것은 인간의 선택에 달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