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카지노 쿠폰

“모든 종교적,도덕적,경제적,인종적 또는 그 밖의 대립은 그것이 실제로 인간을 적과 동지로 분류하기에 충분할 만큼 강력한 경우에는 정치적인 대립으로 변화하게 된다.”칼 슈미트


‘정치는 적과 동지의 구분으로 시작된다.’ 칼 슈미트의 말이다. 냉정하고 정확한 진단이다. 정치는 언제나 파벌로부터 시작되니까 말이다. ‘정치’의 반대쪽에 ‘사랑’이 있다.'정치'를통해 '사랑'을알수있다.'정치'의 시작이 적과 동지의 구분이라면, '사랑'은 적과 동지의 구분 없음이다.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 사랑의 길에는 두 가지 길이 있다.


모두의 동지가 되거나, 모두의 적이 되거나.인문주의자로서의 사랑은 둘 중에 하나의 길 밖에 없다. 내 아이·부모·연인만큼 다른 사람을 좋아하거나, 내가 싫어하는 사람만큼 내 아이·부모·연인을 싫어하거나. 사실 그 두 길은 하나의 길이다. 모두의 적이 되었기에 모두의 동지가 될 수 있고, 모두의 동지가 되었기에 모두의 적이 될 수 있는 것이니까 말이다.


‘나는 편을 가를생각이 없다’ 사람들은 쉽게 말한다. 만드는 파벌만 파벌이 아니다. 어떤 파벌은 만들어진다. 결혼을 해서 소중했던 친구들의 관계가 소원해지는 것을 생각해보라. 그는 쉽게 말한다. “나는 너희들이 싫어진 게 아니야! 결혼을 해서 그래.” 이것이 만들어지는 파벌의 논리다. 배타적 관계를 통한 유대감은 필연적으로 파벌을 만든다. 아니 만들어진다.이렇게 만들어진 파벌이 자신이 만든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나는 방아쇠를 당겼을 뿐 죽인 것은 총알이라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카지노 쿠폰


이미 만들어진 파벌 안에서 인문주의자는 어떻게 사랑해야하는가? 파벌은 반드시 배제를 만든다. 편 가르기를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소외된 자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인문주의적 사랑은, 익숙하다는 이유로, 이미 만들어진 파벌 안에도 사랑이 있다는 이유로, 그 자리에 서 있는 것 아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그 자체로 하나의 '정치'다. 편을 갈라 내 것을 챙기려는 정치.


인문주의적 사랑은 자신에게 주어진 소외된 자들을 어떻게 사랑할 것인지의 문제다.나는 알고 있다. 인문주의적 사랑 끝에는 혼자가 될 것임을. 진정한 사랑은, 모두의 동지가 되고, 모두의 적이 되는 그 위험한 횡단을 계속하는 일이니까. 이것이 세상 사람들이 배타적인 사랑의 관계에 머물려는 이유일 테다. 배타적인 사랑의 관계는 그 수가 적더라도 늘 내 편이 있으니까. 그래서 끝끝내 혼자가 될 일은 없으니까. 이것이 세상 사람들이 편을 가르는 배타적 사랑에 목을 매는 이유겠지.


의도한 혹은 의도하지 않은 파벌이 익숙한 세상이다. 내 편과 네 편을 나누는 것이 익숙한 세상에서, 인문주의적 사랑은 ‘카지노 쿠폰’에 다름 아니다. 나는 그것을 모르지 않는다. 나 역시 ‘카지노 쿠폰’가 두렵다. 나의 ‘카지노 쿠폰’가 누군가에게 슬픔이 될 것은 더 두렵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때로 모두의 친구가 되고 때로 모두의 적이 될 테다. 그렇게 편과 편 사이에서 소외된 자들 곁에 있어 줄테다. 끝내 홀로 된다고 해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