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마지막 글로 무얼 쓸까 고민하다, 인간이 감내할 수 있는 시련의 한계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그 모든 역경에도불구하고 삶을 지속시키는 힘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졌다. 운 좋게도, 이 질문의 답을 찾는 데 실마리를 줄 한 인물의 삶을 들여다볼 기회가 생겼다.
-6세, 소아마비로 오른쪽 다리가 얇아지고 평생 후유증에 시달렸다.
-18세, 버스 사고로 치명적인 부상을 입어 일생동안30여 차례 수술을 하였고, 출산의 꿈을 잃었다.
-22세, 스무 살 연상의 남편과 결혼했지만, 끊임없는 불륜과 갈등 속에서 정신적 고통을 겪었다.
-40대 초반, 발가락 절단과 척추 문제로 침대에 누워 지내다 결국 오른쪽 다리마저 절단했다.
-47세,끝없는 고난을 뒤로하고 세상을 떠났다.
이것은 단순히 한 사람이 겪은 고통의 나열이 아니다. 그의 인생과 예술을이해하기 위해열쇠가 되는 사건들이다. 바로 멕시코를 상징하는 예술가이자 고통과 열정의 화신, 프리다 칼로(Frida Kahlo)의 삶이다.
프리다칼로 1907-1954
성남큐브미술관에서 전시 중인프리다 칼로 레플리카전을방문하면서, 나는 카지노 쿠폰의 삶과 작품에 더욱 밀착하게 되었다. 카지노 쿠폰의 그림은 인생의 절망과 애증으로 가득 차 있다. 가혹하다는 말로도 다 설명할 수 없는 역경에 처절하게 맞서기도 했지만, 그 끝없는 굴레 속에서 절규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끝에서 만난 것은 카지노 쿠폰의 강렬한 외침이었다.
“Viva La Vida”
“삶이여, 만세!”
프리다는 6세에 소아마비를 앓은 후 오른쪽 다리가 얇아지고 짧아지는 후유증에 시달렸다. 카지노 쿠폰는 콤플렉스였던 자신의 다리를 가리기 위해 늘 긴치마를 입었다. 그러나 신체적 어려움 속에서도 학업에 몰두한 카지노 쿠폰는 멕시코의 명문 학교인 국립준비학교에 입학했다. 그곳에서 멕시코의 철학, 정치, 예술을 접하며 독창적인 세계관을 형성해 나갔고, 첫사랑도 만났다.
첫 작품 <사고, 1926
그러나 그것도 잠시, 카지노 쿠폰를 덮친 끔찍한 사고는 한 송이 꽃처럼 고왔던 열여덟소녀의 삶을 짓이겨 놓았다.프리다가 타고 있던 버스가 전차와 충돌하며척추와 골반, 다리 등 온몸이 부서졌다. 철근이 척추에서 생식기까지 관통하는 치명적인 사고였다. 사는 게 기적인 몸과 마음의 상태로 어린 소녀는 죽음이 도사리는 제일 밑바닥까지 떨어져야 했다.
그러나 카지노 쿠폰는 코르셋 모양의 온몸 깁스를 하고 침대에 누워서도 씩씩하고 밝은 사람이었다.
늘 "미래 계획이 뭐냐"라고 묻던 프리다의 아버지는 더 이상 딸에게 계획을물을 수 없었다. 전 재산을 들여 카지노 쿠폰를 치료하는 아버지의사랑을 아는 카지노 쿠폰는능청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나는 자급자족하는 장애인이 될 거예요!"
일어서지도 못하게 된 어린 소녀가 참혹한 운명을 수용하고, 주체적으로 살아가려는 의지를 보여주는 이 말은 카지노 쿠폰가얼마나 강단 있는 사람인지 잘 보여준다.
벨벳 드레스를 입은 자화상, 1926
사진작가였던 아버지가 화구를 선물한 것은 운명적 사건이었다. 거울을 천장에 매달아 자신을 그리기 시작한 카지노 쿠폰는 28년 동안 55점 이상의 자화상을 남겼다. 침대에서 시작된 카지노 쿠폰의 그림은 단순한 자기 묘사를 넘어, 고통과 치유, 삶의 절규를 담은 강렬한 예술로 승화되었다.
이런 카지노 쿠폰의 자화상이 예술사에서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는 것이아이러니하면서도 감동적이다.침대에 갇힌 육체적 한계가 오히려 카지노 쿠폰의 예술적 무한함을 열어주는 계기가 되었다니 역시 절망보다 희망을 가까이두어야하는 이유이다.
프리다 칼로와 디에고 리베라, 1931
수술과 재활로 2년을 보낸 끝에 기적처럼 다시 걸을 수 있게 된 칼로는 21세에 천재 벽화가이자 국민화가로 칭송받던디에고 리베라를 만났다. 카지노 쿠폰는 사상과 그림에서 스승이 되어 준거장 디에고와 사랑에 빠졌다. 용감한 카지노 쿠폰는스무 살의 나이 차이와 그의 여성편력에도아랑곳하지 않고이듬해디에고와결혼하였다.그러나 그는 카지노 쿠폰의 삶에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긴 인물이 되었다. 남편의 무수한 외도, 심지어 여동생과의 불륜은 프리다의 영혼을 완전히 파괴해 버린 사형선고와도 같았다.
"내 삶에는 두 번의 끔찍한 사고가 있었다.하나는 버스에서 사고가 났을 때,다른 하나는 디에고 리베라와 만난 것이다. 첫 번째 사고는 나를 거의 죽였지만, 두 번째 사고는 내영혼을 죽였다."
두 명의 프리다, 1939
디에고와 이혼한 후, 프리다는 "디에고의 아내"라는 꼬리표를 떼고 독립된 예술가로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1938년, 뉴욕에서 열린 첫 전시회는 대성공을 거두었고, 카지노 쿠폰는 단숨에 세계 예술계의 중심에 섰다. 초현실주의의 선구자 앙드레 브르통은 카지노 쿠폰의 작품을 두고 "순수한 초현실적 요소로 충만하다"라고 극찬했다.
그러나 카지노 쿠폰는 자신을 초현실주의자로 규정하지 않았다.
"나는 결코 꿈을 그리지 않았고, 나 자신의 리얼리티를 그렸을 뿐이다. 나는 그림 그리는 일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림을 그린다는 사실이며,어떤 다른 생각과 심사숙고함 없이 단지 나의 머릿속을 스쳐가는 것이 무엇이건 간에 그린다."
헨리포드 병원, 1932
프리다의 독창적이고 대담한 그림은 보그와 타임 같은 세계적인 언론에 소개되며명성을 얻었다. 카지노 쿠폰는 뉴욕에 이어파리에서도 성공을 거두었고, 심지어 피카소마저 카지노 쿠폰의 작품에 매료되어 이렇게 말했다.
"리베라도, 드랭도, 나도 프리다 칼로처럼 얼굴을 그리지 못한다."
가시 목걸이를 한 자화상, 1940
여러분은 떠오르는 여성 화가가 있는가?
프리다 칼로는 남성과 백인 중심의 유럽 예술계라는 장벽 속에서완전한 비주류로 출발했다. 그러나 카지노 쿠폰는 자신만의 예술세계로 그 유리천장을 뚫으며독보적인 입지를 스스로 쟁취했다. 카지노 쿠폰가 걸어간 길은 단순히 예술가로서의 성공을 넘어, 시대와 구조적 편견에 맞선 치열한 투쟁의 역사이기도 하다.
잇따른 성공에 기뻐할 새도 없이, 카지노 쿠폰는 끝나지 않는신체적 고통과 싸워야 했다. 발가락 괴사로 절단수술을 받았고, 이어 오른쪽 무릎 아래 부분도 잃게 되었다. 카지노 쿠폰의 그림보다 더 초현실주의라는 카지노 쿠폰의 일기에 그 괴로움은이렇게 적혀있다.
"발이 왜 필요하지? 내게는 날개가 있는데."
카지노 쿠폰는 사망하기 몇 년 전부터는 거동이 불가능했다. 애증의인물 디에고는 프리다의 말년에 다시돌아와 임종을 지키는 마지막 사랑이 되었다.이 정도면 세기의 바람둥이에게 프리다는 true love인 걸까. 아니면 프리다 말처럼 그들은 최고의 동지이자 동료이며 친구로 관계의 완성을 이룬 걸까.
사망 1년 전 멕시코에서 열린 첫 번째 개인전 당시칼로가침대에 누운 채로 전시회에 참석한 일화는 유명하다. 카지노 쿠폰는 그 자리에서도"Where is the music?”을호기롭게 외친 상여자였다.
평생을 침대에서 보낸 시간이 길었던 프리다는 "죽어서도 눕고 싶지 않다"며 화장을 원했다. 그리고 47세에 몸과마음을 극한의 고통으로 짓눌렀던 통증과 드디어 작별을 고했다. 일기장에마지막으로이렇게 남겼다.
“나는 즐겁게 떠나며 돌아오기를 희망하지 않는다.”
Viva La Vida, 1954
프리다 칼로는 평생에 걸쳐 겪었던 육체적, 정신적 고통과 싸운 기록을 200여 작품에 담아냈다. 카지노 쿠폰의 작품은 단순한 아픔의 기록이 아니라, 그것을 치유와 해방으로 바꾼힘의예술이다. 쉴 새 없이 몰아치는운명의 파도 앞에서, 카지노 쿠폰는 예술을 통해 스스로를 구원했다.
1948년, 멕시코 정부는 카지노 쿠폰의 작품을 국보로 지정해 국외 반출을 법으로 금지했다. 카지노 쿠폰의 얼굴은 멕시코 화폐 중 최고액권인 500페소 지폐에 새겨졌고,다른 한쪽 면에는 디에고 리베라가자리 잡았다. 이 부부는 죽어서도 함께하는 존재로 화폐에 박제되었다.
프리다 칼로의 전기를 그린 2002년도 영화 ‘프리다’의 관람평 중 “삶은 고통, 그림은 탈출구, 죽음은 해방”이라는 문장이 오래도록 내 마음에 남아있다. 이 짧은 글귀만큼 카지노 쿠폰의 삶을 잘 축약시킨 표현을 못 본 것 같다.
고통 속에서도 "Viva La Vida"를 외치고마지막 작품명에 새긴 프리다 칼로. 그가 남긴 메시지를 2025년다이어리 제일 앞머리에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