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시민
쉬는 동안,책을 읽는 능력이 약간 돌아온 듯 하다. 전에는 앞부분을 읽다가 머리에 잘 들어오지 않아서 그만 두었던 책을 이번에 다 읽게 되었다. 사실어려운 책이 아니었음에도, 글자는 읽혀도 내용을 깊이 머릿 속에서 이해하며 읽지는 못했었다. 이번에는 그래도 읽으며 나의 인생에 대해서도 생각해보며 읽을 수 있었다.
작가는 몇 가지 주제로 나누어 사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죽을 것인가, 놀고 일하고 사랑하고 연대하라, 삶을 망치는 헛된 생각들. 그리고 마지막 에필로그에서는 본인은 어떻게 삶을 마감하고 싶은지(혹은 어떻게 죽을지)를 말하고 있다.
아직도 나는 살아가는 것에 대해 오감을 충만히 느끼며, 혹은 사람들과 만나고 대화온라인 카지노 게임 즐거움을 느끼며, 어떤 신념을 가지며 살아가지는 못하고 있다. 항상 그렇게 생각을 하니 어쩌면 죽을 때까지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가끔씩, 예전에 모임을 나가고 무언가를 배우고 했던 것처럼, 이렇게 책을 읽거나 누군가의 일깨움으로 가끔씩 다시 시도를 할 수 있게 된다. 말은 이렇게 해도, 자연이나 풍경을 보며 아름다움을 느끼고 바람이나 식물의 촉감을 느끼는 것은 좋아한다. 여전히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잘 못하지만.
그래서 책의 몇 가지는 아직도 나에게는 멀게 느껴진다. 자식에 대한 것이나, 연대에 대한 것이나. 책의 후반부에, '가족사를 탐색해보라. 당신의 내면이 훨씬 더 풍요로워질 것이다.' 라는 말은 마음에 들었다. 매년 시제를 지내러 부여에 가도, 생전에 아버지가 우리 김씨에 대해 이야기해도 깊게 생각해보질 않았었다. 나에게는 너무 먼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그래도 아버지가 젊었을 땐, 다들 같은 마을에서 지냈으니 그 시절엔 중요하고 의미있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 가족사를 어떻게 알아볼 수 있겠냐만은, 슬쩍 한번 찾아보면 내 삶이나 생각이 조금은 더 의미있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내용들이 많은 책이었다. 내 삶의 방식을 바꾸지는 못하겠지만,더 적극적으로 살아야겠다는 마음을 조금이라도 남겨주었으니, 가끔씩 떠올려야겠다.
아래는 좋았던 부분들.
평범한 삶이 아름답고 행복할 수 없다는 게 아니다. 평범해도 평범하지 않아도, 인생은 훌륭하거나 비천할 수 있다. 인생의 품격은 평범함이나 비범함과 상관없는 것이다. 내 문제는 꿈이 없다는 것이었다. 내게는 무엇인가 꼭 이루고 싶은 목표가 없었다. 인생을 어떤 색조로 꾸미고 싶다는 소망도 없었다. 그저 현실에 잘 적응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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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살 것인가? 이 나이에 아직도 이런 질문을 껴안고 있는 내가 한심해 보인다. 그러나 이것이 여태껏 살아온 내 삶의 결과임을 인정한다. 만약 지금까지 살아온 그대로 계속해서 살면 좋겠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의 인생은 이미 훌륭한 인생이다. 그대로 가면 된다. 그러나 계속해서 지금처럼 살 수는 없다고 느끼거나 다르게 살고 싶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의 삶은 아직 충분히 훌륭하다고 할 수 없다. 더 훌륭한 삶을 원한다면 지금이라도 무언가를 바꾸어야 한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들고 능동적으로 세상과 부딪치지 못했다. 번민하면서 주저하는 내게, 세상이 먼저 부딪쳐 왔다. 세상은 나더러 체념하거나 굴복하라고 했고, 나는 거절하고 저항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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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결정권’을 행사하는 일이다. ‘자기 결정권’이란 스스로 설계한 삶을 옳다고 믿는 방식으로 살아가려는 의지이며 권리이다.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J. S. Mill의 표현을 가져다 쓰자. “사람은 누구든지 자신의 삶을 자기 방식대로 살아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 방식이 최선이어서가 아니라, 자기 방식대로 사는 길이기 때문에 바람직한 것이다.”사람마다 인생을 다르게 산다. 평생 공부하는 사람, 노래하고 춤추는 사람, 돈을 버는 데 골몰하는 사람, 일만 하는 사람, 권력을 좇는 사람, 신을 섬기는 사람 등 백 사람이 있으면 백 가지의 삶이 있다. 어느 것이 더 훌륭한지 가늠하는 객관적 기준은 없다. 스스로 설계하고 선택한 것이라면 어떤 삶이든 훌륭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화려해 보여도 자유의지로 만들어낸 삶이 아니면 훌륭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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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곧 죽음이다. 살아 있는 것은 다 죽는다. 지금 책을 쓰는 나도 이 책을 읽는 독자도 모두 죽는다. 생각할 능력이 아직 부족한 어린아이들, 어떤 이유에서 생각하는 능력을 잃어버린 사람들만 이 사실을 모른다. 실존주의자를 흉내내서 말하면, 이것이 바로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부조리이다. 인간은 태어난 바로 그 순간부터 숨을 한 번 들이마시고 내쉴 때마다 한 걸음씩 죽음을 향해 나아간다. 다 살면 그때 죽는 게 아니다. 살아 있는 모든 순간, 우리는 조금씩 죽어 간다. 죽음은 단지 삶의 이면裏面일 뿐이다. 삶과 죽음은 처음부터 끝까지 동행하며 함께 완성된다. 쉰다섯 해를 산 나는 이미 쉰다섯 해 죽은 것이다. 어차피 죽을 것이기 때문에 삶은 허무하다고 말하지 말자. 그것은 틀린 말이다. 그 역逆이 옳다. 죽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삶은 아름다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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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지 않고 영원히 산다고 상상해보았다. 과연 행복할까? 그런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다. 영생永生은 축복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의 의미를 말살한다. 영원히 산다면 오늘 만난 사람들, 그들과 나눈 대화와 교감, 함께한 일들이 의미가 없어질 것만 같다. 그 모든 것이 다 굳이 오늘 하지 않았어도 좋았을 일이 된다. 어디에도 굳이 열정을 쏟아야 할 필요가 없다. 오늘 다하지 못온라인 카지노 게임 일은 내일 하면 그만이다. 오늘 무엇인가 잘못해도 상관없다. 다음에 다르게 하면 된다. 영생은 삶을 시간의 제약에서 해방시킨다. 그런데 시간이 희소성稀少性을 잃으면 삶도 의미를 상실한다. 유한성有限性의 속박에서 풀려나는 순간, 가슴을 설레게 온라인 카지노 게임 모든 것들이 무한 반복의 쳇바퀴를 도는 지루한 일상으로 변해버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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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받지 않는 삶은 없다. 상처받지 않고 살아야 행복한 것도 아니다. 누구나 다치면서 살아간다. 우리가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은 세상의 그 어떤 날카로운 모서리에 부딪쳐도 치명상을 입지 않을 내면의 힘, 상처받아도 스스로 치유할 수 있는 정신적 정서적 능력을 기르는 것이다. 그 힘과 능력은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다는 확신, 사는 방법을 스스로 찾으려는 의지에서 나온다. 그렇게 자신의 인격적 존엄과 인생의 품격을 지켜나가려고 분투하는 사람만이 타인의 위로를 받아 상처를 치유할 수 있으며 타인의 아픔을 위로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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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셀리그만Martin Seligman이라는 임상심리학자가 수많은 관찰과 상담 사례에서 얻은 결론과 일치한다. 삶의 ‘위대한 세 영역’은 사랑, 일, 놀이이다.이것은 당위가 아니다. 이 셋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게 아니다. 사람들이 실제 이 셋으로 삶을 채우며, 여기에서 살아가는 의미를 찾는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위대한 세 영역’이라고 온라인 카지노 게임 것이다. 나는 셀리그만의 견해를 보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이 셋 말고도 ‘연대solidarity, 連帶’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다. 넓은 의미에서 보면 이것도 사랑의 표현 형식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쓰는 사랑과는 의미가 다르다. 좁게 보면 연대란 동일한 가치관과 목표를 가진 누군가와 손잡는 것이다. 넓게 보면 기쁨과 슬픔, 환희와 고통에 대한 공감을 바탕으로 삼아 어디엔가 함께 속해 있다는 느낌을 나누면서 서로 돕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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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다음에 무엇이 있을까? 만약 내일 죽는다면 오늘 무엇을 할까? 잘 죽으려면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 것일까?’ 혼자 이런저런 대답을 생각해본다. 답을 꼭 찾아야 할까?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 남은 삶이 달라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죽음은 단순히 삶의 끝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죽음은 삶의 완성이다. 소설도, 영화도, 연극도 모두 마지막이 있다. 마지막 장면을 어떻게 설계하느냐에 따라 스토리가 크게 달라진다. 어떤 죽음을 준비하느냐에 따라 삶의 내용과 의미, 품격이 달라진다. 남아 있는 삶의 시간이 길수록 죽음에 대한 생각은 더 큰 가치가 있다. 아직 젊은 사람일수록 더 깊이 있게 죽음의 의미를 사유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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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 살 새 아침에 찾아든 자각 때문에 독일 유학을 중단했다. 막 시작한 경제학 박사학위 논문 집필을 그만두었다. 외환 위기 이후 한국에서 오는 인세 수입을 독일 마르크로 바꾸자 반 토막이 된 현실도 한몫을 했지만 그게 결정적인 이유였던 것은 아니다. 아직 어디에도 삶의 뿌리를 깊이 내리지 못했기에 크게 어려운 결정은 아니었다. 어디선가 오래 한 우물을 팠다면 그럴 수 없었을 것이다. 서울로 가는 편도 탑승권을 끊어 프랑크푸르트 공항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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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에 대한 평가는 살아 있는 동안만 내게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 먼 훗날, 또는 긴 역사 속에서가 아니라 지금 바로 여기에서 내 스스로 의미를 느낄 수 있는 활동으로 내 삶을 채우는 것이 옳다. 그러니 내가 기쁨을 느낄 수 있는 방식으로 살자. 타인의 시선이나 평가에 얽매이지 말자. 내 스스로 삶에 가치를 부여하는 꼭 그만큼만 내 죽음도 의미를 가질 것이다. 나는 이렇게 생각하며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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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는 죽어야 하고 잊혀질 수밖에 없는 것이 숙명이라면,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오직 하나이다. 살아 있는 동안, 지금 바로 여기에서, 나를 ‘나’로 인식하는 철학적 자아가 삶의 기쁨을 누리는 것이다. ‘나는 왜 자살하지 않는가? 무엇을 할 때 살아 있음을 황홀하게 느끼는가? 지금 하고 있는 이 일이 내가 진정 하고 싶은 것인가? 내 삶은 나에게 충분한 의미가 있는가?’ 스스로 이렇게 물어야 한다.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없다면 인생의 의미도 삶의 존엄도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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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떤 사람일까? 도대체 왜 이렇게 살아온 것일까? 계속 이렇게 살아가도 괜찮은 걸까?’ 긴 시간 내 자신을 들여다보았다. 나는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누구를 사랑온라인 카지노 게임지 잘 안다. 내 삶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별할 수 있다. 주어진 환경 속에서 나름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았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스스로 결정하고 선택한 것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든다. 내 스스로 선택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내 선택이 아니었던 것이 있을까 생각해 본다. 분명하지가 않다. 나는 종종 내가 나를 마음대로 하지 못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무엇인가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몸이 거부할 때가 있고, 다르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렇게 할 수 없을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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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는 매순간 미래의 삶을 새로 설계하고 새로운 도전을 할 권리가 있다. 물론 욕망을 충족온라인 카지노 게임 것보다는 규범을 따르는 삶이 더 훌륭할 수 있다. 개인을 중심에 놓고 생각할 때 최고의 도덕적 이상은 이타성unselfishness이라는 라인홀드 니버의 말이 옳다고도 본다.그러나 이타성이라는 이상을 추구온라인 카지노 게임 것도 스스로 세운 준칙에 따른 행위일 때 기쁨이 되지 않겠는가. 욕망을 억압하면서 규범을 따르는 일이 참기 어려울 만큼 어색하고 불편하고 고통스럽게 느껴진다면 욕망을 표출할 수 있는 문을 더 넓게 열어주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규범은 자기 자신이 기쁜 마음으로 자연스럽게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따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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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교수’와 호킹 박사가 서로 다른 선택을 한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그들은 모두 존엄尊嚴, dignity을 지켰다. 삶과 죽음은 다르지만 둘 다 존엄할 수 있다. 사람은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한다. 그것이 인간이다. 존엄이란 무엇인가? 이 단어의 어원은 라틴어 ‘디그니타스dignitas’이다. 존엄은 일상 언어생활에서는 존경과 고귀함을 의미한다. 철학적 정치적 학술적인 토론에서는 개념을 명확하게 규정하지 않은 채 사용한다. 존엄성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는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의 견해를 길잡이로 삼을 만하다. 칸트에 따르면 존엄한 것은 ‘가치value’를 따질 수 없다. 어떤 것의 ‘가치’는 사람들이 가치를 인정하는지, 인정한다면 얼마만큼 높게 평가하는지에 좌우된다. 그러나 ‘그 자체가 목적인 것’은 가치를 따질 수 없다. 도덕적 차원을 가진 것, 옳은 것과 그른 것 사이의 선택을 나타내는 것만이 그 자체로 목적이 된다. 인간다움humanity, 존엄성dignity이 그런 것이다. 인간 존엄성의 필수 조건은 자유의지free will이다. 살든 죽든, 인간의 존엄은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결정하는 능력과 관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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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몬 삼페드로의 삶을 지배한 감정은 기쁨과 고통, 그리고 두려움이었다. 그는 기쁨을 잃었으며 다시는 되찾을 수 없다고 판단했다. 두려움은 삶의 의미를 천착하는 사유 과정을 통해 극복했다.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자유를 잃은 고통은 살아 있는 한 결코 벗어날 수 없었다. 그는 이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자살은 라몬 자신의 의지에 따라 세운 규범이었다. 이것이 보편적 법칙이 될 수 있을까? 그렇지는 않다. 호킹 박사는 라몬보다 더 심한 전신마비 장애를 얻었지만 씩씩하게 살고 있다. 그렇다면 라몬은 왜 자신의 규범이 보편적 법칙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일까? 그것은 라몬이 감각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우주의 기원과 운행 법칙에 대한 연구에서 삶의 기쁨을 얻은 호킹과는 달리 라몬은 사랑에서 기쁨을 찾는 사람이었다. 그에게는 육체의 감각이 너무나 중요했다. 감각이 없이는 사랑을 느끼고 표현할 수 없다. 사랑하지 못하는 삶에는 기쁨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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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과 재능의 불일치는 회피하기 어려운 삶의 부조리이다. 재능이 있는 일에 열정을 느끼면 제일 좋다. 그러나 열정을 쏟을 수 있는 일이기만 하다면, 재능이 조금 부족해도 되는 만큼 하면서 살면 된다. 경쟁은 전쟁이 아니다. 져도 죽지는 않는다. 이겨서 꼭 행복한 것도 아니다. 사람은 저마다 가진 것으로 인생을 산다. 가진 것이 많다고 꼭 행복한 건 아니다. 적게 가져도 행복할 수 있다. 끝없는 경쟁 속에 살아야 하지만, 즐기면서 경쟁에 임하면 이겨도 이기지 못해도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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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어난 기능을 갖추었다고 해서 반드시 일을 잘온라인 카지노 게임 건 아니다. 남들과 소통하면서 호흡을 잘 맞추는 것이 기능 못지않게 중요하다.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서 다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 남들과 잘 소통하면서 우호적인 관계를 맺는 것은 그 자체가 좋은 일일 뿐만 아니라 직무를 잘온라인 카지노 게임 데도 매우 중요하다. 일 자체는 재미있다고 해도, 함께 일온라인 카지노 게임 사람들과 사이가 나쁘면 재미가 반감된다. 일이 잘 되지도 않는다. 직장 동료, 상사, 고객, 거래처 사람들과 잘 지내려면 서로 좋은 기운을 주고받을 수 있도록 인간관계를 잘 가꾸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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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 즐겁다는 것은 목표를 이루었을 때 성취감이나 보람을 느끼는 것과는 다르다. 일을 온라인 카지노 게임 구체적인 과정 그 자체가 즐겁다는 뜻이다. 나는 정치의 일상을 즐기는 국회의원을 많이 보았다. 대선 패배 이후 민주당 원내대표가 된 박기춘 의원은 초선의원 시절, 아무리 늦은 시간이라도 지역구 유권자를 한 사람이라도 만나지 않고는 집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자기만의 원칙을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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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려면 함께 살아봐야 한다. 그러나 짝짓기를 하기 전에는 같이 살 수가 없다. 짝짓기와 관련된 제도와 관습, 문화가 그렇게 되어 있다. 우리는 보통 살아보지도 않고서 평생 함께 살겠다고 공개 서약을 한다. 실망과 배신, 갈등과 결별의 씨앗은 바로 이 모순의 틈새에서 싹을 틔우고 뿌리를 내린다. 숫총각 숫처녀가 한번 자보지도 않고 결혼온라인 카지노 게임 것은 가장 위험한 짝짓기 행동이다. 마음이 움직이면 먼저 함께 살아보고, 상대방에 대해서 확신을 가졌을 때 혼인온라인 카지노 게임 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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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자식이 행복한 삶을 살기를 바란다면 두 가지를 가지도록 도와줄 수 있다. 첫째는 행복을 느끼는 능력, 둘째는 원온라인 카지노 게임 것을 성취할 수 있는 능력이다. 행복을 느끼는 능력을 가지려면 삶을 스스로 설계하고 자신이 원온라인 카지노 게임 삶의 방식을 찾아야 한다. 자녀가 스스로 이것을 할 수 있도록 격려하고 시행착오를 경험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 자식은 부모의 꿈이나 희망을 실현온라인 카지노 게임 수단이 아니다. 자신의 소망을 자녀에게 투사하지 말아야 한다. 자기가 옳다고 믿거나 좋다고 생각온라인 카지노 게임 삶의 방식을 강제해서도 안 된다. 자녀들은 부모가 그렇게 할 경우 그것을 거부할 수 있어야 한다. 삶의 중요한 문제를 스스로 선택하지 못온라인 카지노 게임 사람은 행복을 누리는 능력을 기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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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늙어가고 있다. 그러나 나이를 먹어도 삶은 똑같이 귀한 것이다. 여기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결정권이다. 자기 힘으로 삶을 꾸려가야 존엄과 품위를 지킬 수 있다. 자식이든 친구이든 타인에게 의존하면 삶은 존엄과 품격을 상실할 수 있다. 늙어도 젊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자기가 원하는 대로 인생을 설계하고 스스로 옳다고 여기는 방식으로 살아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몇 가지를 제대로 준비해야 하는 것이 있다. 돈, 건강, 그리고 삶의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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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디까지 참여해야 할까? 누구나 다 목숨을 바쳐야 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인간은 이타 행동을 하는 이기적 존재이다. 이타 행동의 한계는 정해진 것이 없다. 어디까지 해야 바람직한지 객관적 기준이 있는 것도 아니다. 마음이 움직이고 스스로 감당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죽음까지도 감당할 수 있다면 그럴 수 있고, 그저 작은 성금을 보내는 정도만 감당할 수 있다면 그래도 좋을 것이다. 사람은 그 무엇을 위한 도구가 아니다. 누구도 타인에게 어떤 이념이나 공동선을 실현하는 도구가 되라고 강요해서는 안 된다. 스스로 느끼는 만큼, 그리고 자기가 할 수 있고 또 옳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참여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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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념에 따른 삶과 죽음이 훌륭하려면 먼저 그 신념이 훌륭해야 한다. 신념 자체가 훌륭하지 않으면 그 신념을 따르는 삶도 훌륭할 수 없다. 그런데 신념이란 어디까지나 머리에 든 생각이다. 어떤 신념도 완벽하게 옳다거나 훌륭하다고 할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완전히 잘못되었거나 사악하다고 단정할 수 있는 신념도 흔치는 않다. 사상이나 이념, 가치관은 완전하지도 않으며 고정된 것도 아니다. 사람들은 때로 신념을 버리기도 하고 바꾸기도 한다. 훌륭하게 살기 위해서는 훌륭한 신념을 가지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삶에서 더 중요한 것은 신념 그 자체보다는 그것을 대하는 태도이며 그 신념을 실천하는 방법이다. 신념이 잘못된 것이 아닌 경우에도 그것을 실현하는 방법을 잘못 선택하면 삶이 죄악의 구렁텅이에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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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색이 글쟁이이면서 아버지의 삶을, 어머니의 삶을 한 번도 제대로 듣고 기록한 적이 없었다. 이 글을 쓰다 보니 사진조차 한 번 제대로 본 적이 없는 할머니에 대해서 알고 싶은 욕구가 차오른다. 나 자신을 제대로 알려면 할머니의 삶을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평지에 솟아오른 돌멩이가 아니다. 숱한 고비를 넘기며 이어져온 가족사의 굴곡 어디엔가 놓인 존재이다. 그 굴곡을 알아야 내가 진짜 누구이며,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한 것인지 더 잘 알 수 있다. 가족사를 탐색해보라. 당신의 내면이 훨씬 더 풍요로워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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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와 행성의 생애 주기에 비추어 보면 인간의 삶과 하루살이의 삶은 양적인 차이가 없다. 둘 다 찰나의 시간을 살 뿐이다. 그러나 질적으로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인간은 자신의 삶이 찰나에 불과하다는 것을 안다. 하루살이는 그것을 모른다. 이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이 바로 호모 사피엔스의 특별함이다. 그 특별함을 지성이라고 한다. 삶이 찰나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사람다운 삶을 제대로 살 수 있다. 그것을 모르는 삶은 그저 조금 더 길기만 할 뿐 하루살이의 삶과 근본적으로 다를 것이 없는지도 모른다. 영원한 것은 어디에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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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진지하게 죽음을 생각할수록 삶은 더 큰 축복으로 다가온다. 죽음이 가까이 온 만큼 남은 시간이 더 귀하게 느껴진다. 삶은 준비 없이 맞았지만 죽음만큼은 잘 준비해서 임하고 싶다. 애통함을 되도록 적게 남기는 죽음, 마지막 순간 자신의 인생을 기꺼이 긍정할 수 있는 죽음, 이런 것이 좋은 죽음이라고 믿는다. 주어진 삶을 제대로 살면서 잘 준비해야 그런 죽음을 맞을 수 있을 것이다. 때가 되면 나는, 그렇게 웃으며 지구 행성을 떠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