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집스러운 삶
어렵게 시작한 무용이었다. 학원 하나 다니지 않고 학교에만 매달렸지만 그것은 나의 행복이었다. 원하는 고등학교, 원하는 대학까지 과정이야 쉬웠겠냐 마는 결과적으로 나에게 즐거운 삶이었다. 누가 뭐라 해도 고집스럽게 춤을 추고 있었다. 무용실에서 혼자서 뛰어노는 시간도, 친구들과 지지고 볶는 시간도 그저 즐거움이었다. 없는 살림에 등골 휘도록 고생하는 엄마, 아빠는 안중에도 없었다. 내가 교원자격증을 취득하기 전까지.
원하는 삶을 살고 있는데 상이 주어진 느낌이었다. 비사범대였지만 나는 상위 10%의 학생이 되어 있었다. 아니 나름 지고 싶지 않았을 터. 결국 교생실습을 마치고 돌아온 학교의 분위기는 너는 공부하는 무용인. 졸업 공연의 작품을 짜고 무대에 오를 때까지도 몰랐다. 내가 무용을 그만두게 될지, 마지막 공연은 그저 무대장치 뒤에 가려진 무용수가 될지.
아마 그때 내 마음이 다르게 움직인 듯하다. 그래, 카지노 게임 돈이 없지 패기가 없는 사람이 아니다. 열정이 없는 사람이 아니다. 꼭 내 스스로 이 가난을 이겨내서 다시 돌아오리라!
엄마의 말씀대로 나는 대학원보다 임용의 길을 선택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대학을 다니는 동안 카페나 식당 아르바이트를 해본 적이 없다. 선배들의 땜빵을 시작으로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생각해 보니 고등학교학교 때부터 늘 후배들을 가르치는 일을 해왔었다. 임용을 하고자 마음을 먹고 나니 내가 다르게 보이기도 했다. 새로운 도전의 시작이었다.
두 마음으로 가는 도전은 역시나 나의 고집만큼 나를 쉬이 가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아직도 가끔 춤추는 내가 꿈에 나타나곤 한다. 지금 생각해 보니 미련하기 그지없었다. 간절함으로도 절박함으로도 이겨낼 수 없는 이 카지노 게임 생활에서도 그렇게 느긋하게 고집스럽게 춤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이 글을 쓰며 나의 두 마음을 다시 들여다보게 된다. 과연 내 고집스러운 삶은 앞으로 어디를 향해 나아갈까?
나는 삼 남매의 엄마이다. 열네 살 딸, 아홉 살 딸, 다섯 살 아들. 연년생이 없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역시나 고집스럽다. 첫 째를 낳기 전에도 낳은 후에도 나는 카지노 게임생을 택했다. 어려운 길이지만 내가 살길이기도 했다. 2014년 다행히 1차는 합격했지만 아킬레스건이 끊어지는 사고로 나는 결국 실기시험장을 나와야 했다. 고집으로 마지막 실기시험까지 강행했지만 원하는 결과는 얻지 못했다. 그리고 재활을 하고 셋 째를 낳기까지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열심히 달려왔다. 그리고 다시 엄마는 카지노 게임생이 되었다.
엄마의 두 마음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육아도 브런치도 카지노 게임생도 춤도 마음 한 켠에 자리하고 있다. 이제 이 마음들을 어떻게 나누고 매 순간 열정을 다하느냐에 달렸다. 어느 하나 놓치고 싶지 않지만 여전히 느리다. 더욱 간절히 바라며 더욱 열심히 내 삶을 피우는 피오나의 길을 통해 세상을 보다 넓고 깊게 바라보며 내 마음이 향하는 곳으로 내달려볼까 한다.
이 새벽 카지노 게임 우리 슈퍼 사장님이 계신 엄마 집에 와 있다. 역시 부산이 좋다. 엄마가 새벽 4시 반 택시일을 가시는 아버지 식사와 도시락을 챙기시러 내려간 사이에 엄마의 컴퓨터를 켜고 어제 함께하지 못한 브런치 송년회를 아쉬워하며 연신 써내려 왔다. 아무 말이나 쓸까 봐 걱정했던 내 자신을 또 반성하며 고장 난 핸드폰은 오늘 시내에 나가 서비스를 받아야겠다. 오늘 만큼은 나도 도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