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방과 대학원 때 일이다. 대학원 후배 중에 누군가가 '온라인 카지노 게임'라는 말에 담긴 사회적 함의에 대한 다큐를 만들고 싶다며 대학원 사람들에게 인터뷰를 요청했다.
다들 '온라인 카지노 게임'라고 누군가를 부르고 불릴 때 그 말의 사전적인 의미에 더해지는 비하의 의미에 대해 이야기했다. 나는 좀 다른 얘기를 하고 싶었다. 나는 온라인 카지노 게임의 마인드를 가진 내가 되고 싶다고, 그렇게 생각하게 된 계기에 대해 이야기했다.
때는 대학교 2학년인가 3학년 초였다. 당시 나는 방학이 되면 본가인 부산으로 돌아가 방학 내내 딱 두 가지를 했다. 1. 영어회화 학원. 2. 검도. 그 중에서도 열심히 했던 건 검도였다. 마침 내가 살던 집 근처에 있는 도장이 고등학교 검도 특기생들이 운동을 하는 도장이었다. 처음에는 운동을 오전이나 오후에 한 번 했다. 저녁시간 운동에는 고등학생들이 운동을 받아주러 나왔다. 그렇게 안면을 트고 도장의 관장님과 사범님이 다 이 고등학교 출신이시다보니 알음알음 알게 되고 서울에서 대학 다니는 학생이 매일 검도를 하니까 좋게 봐주셨던 것 같다.
급기야 다음 방학에는 고등학생들 운동하는 시간에 같이 운동을 하게 해달라고 부탁을 드렸다. 고등학생들이랑 오전운동 오후 운동을 같이 했다. 대학을 가려고 검도를 하는 학생들이 보기에 저 누나는 공부로 대학을 가놓고 왜 때문에 저렇게 열심히 검도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때 들었던 말이 "누나는 검도에 미쳤지요.(부산 억양으로 읽어주세요.)"였다.
그렇게 고등학교 선수들이랑 열심히 운동을 하고 당시 초창기였던 SBS 검도왕 대회에 나름 청운의 꿈을 품고 출전했다. 이 대회는 8강인가, 4강부터 경기를 중계해주는 대회여서 까딱 잘못하면 테레비에 나오는 거 아니냐며 설레발을 쳤다. 그만큼 열심히 준비했었다.
첫 상대는 온라인 카지노 게임였다. 딱 봐도 자세도 좋지 않고 머리를 기깔나게 잘 치는 것도 아니고 쉽게 이기고 나올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막상 시합장에 들어가보니 이건 뭐지? 키도 작고 중단 자세도 이상한데 이 당당함은 어디서 나오지? 분명히 내가 더 리치도 길고 빠른데 왜 기가 안 죽지? 뭔가 이판사판 세상 무서울 것 없는 이 배짱. 도대체 뭐지?
당황해서 헤매다가 아무튼 별 거 아닌 걸 맞고 지고 나왔다.
준비 많이 하고 출전한 대회에서 첫 경기에 꽂아칼 하고 호구를 챙기는데 얼떨떨했다.
'뭐였지? 그건?'
20대 초반 내가 내린 결론은 "온라인 카지노 게임여서 그렇구나! 내 배 아파서 낳은 아이 두어 명 세상에 내놓고 나니 무서울 게 없어져서 그런 거구나." 였다.(사실 그분이 실제로 그런지 어떤지는 알지도 못하면서 나 혼자 한 생각이다.)
그래서 나는 그런 배짱 두둑한 온라인 카지노 게임가 되고 싶다고 인터뷰를 했었다. 나중에 그 후배에게 너무 새롭고, 좋은 얘기라 꼭 싣고 싶었는데 다큐의 논리 전개상 맞지 않아서 넣지 못했다고 미안하다는 얘기를 들었다. 나야말로 다큐의 의도에 맞는 얘기를 해줬어야 되는데 나 하고 싶은 얘기만 해서 미안하다고 하고 지나갔다.
그 뒤로는 시합장에 들어갈 때마다 검도의 4계를 입으로 중얼거리면서 주문을 걸었다. 아직 온라인 카지노 게임가 안 되어서 그 마인드는 안 나올테니 일단 이걸로라도 정신을 가다듬자, 뭐 그런 임시방편이었던 셈이다. 그러고는 주로 대학연맹전 같은 경기에 나가 비슷한 젊은이들과 경기를 하다보니 어느샌가 그 생각도 기억 저편으로 사라졌었나보다.
다시 검도를 시작하고 나니 잊고 있었던 생각들이 마치 방문을 닫아 걸어 억지로 막아두었던 문이 열려버린 것처럼 이것저것 쏟아져나왔다. 그 중 어이 없게도 내 온라인 카지노 게임성에 대한 자각도 있었다.
'가만 있어봐? 내가 지금 그렇게 되고 싶었던 온라인 카지노 게임가 되었네? 십 년 넘게 검도 안 하고 뭐했나 했더니 애 둘 낳고 이제 세상 무서울 게 없는 온라인 카지노 게임가 되어 있었네.' 이제 나도 나보다 체격 조건 좋고 운동 많이 한 사람들 만나도 쫄지말고 배짱있게 해야지!
라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남이 문제가 아니라 내 몸뚱이가 문제라는 걸 깨닫는데는 4개월이면 충분했다.
내 몸을 밀어서 움직여야 하는 왼쪽 발목이 과격한 움직임에 놀라, 파업에 나서셨고...아르헨티나에서 사회인 검도대회 출전하러 왔던 젊은이랑 잠깐 연습하다가 부딪혀서 손목이 삐그덕 거린다.
온라인 카지노 게임가 되고 싶었지만 온라인 카지노 게임가 되고보니 몸뚱아리가 말을 안 듣는 슬픈 이야기지만 꼭 나아서 세상 무서울 것 없는 온라인 카지노 게임다운 검도를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