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대 미혼부 로미와 모범생 카지노 쿠폰의 비극이 아닌 사랑과 삶
연극 <로미오 앤 줄리는 2023년 2월 영국 National Theatre(NT)와 Sherman Theatre가 공동 제작하여 런던 NT Dorfman Theatre에서 초연된 작품으로, 한국에서는 2024년 12월 초연을 맞이한다. 연극은 셰익스피어의 <로미오 앤 줄리엣을 모티프로, 웨일스의 작은 마을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케임브리지대학 물리학과를 지망하는 줄리와 미혼부 롬이 우연히 사랑에 빠져 벌어지는 일들을 담고 있다.
연극 <로미오 앤 줄리는 셰익스피어의 희곡 <로미오와 줄리엣을 모티브로 삼는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원수인 두 가문이 겪는 갈등으로 희생당하는 젊은 두 남녀. 그리고 그들의 죽음으로써 화해하는 가문의 이야기이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비극의 역사적 전형을 충실히 따른다. 비극은 단지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보다는 모순으로 인한 죽음들 위에 맞이하게 되는 화해와 해소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다. 한편 <로미오 앤 줄리에서는 누구도 죽지 않는다. 의도를 담아 오해를 해보자면, 그 누구도 죽지 않는다는 것은 어떤 것도 해소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로미와 줄리가 놓이는 갈등 상황 역시 가문 간 적대처럼 절대적이지 않다. 로미와 줄리는 모두 영국의 소도시에 거주하는 노동계급의 아이들이다. 그러나 둘의 구체적인 처지는 다르다.
로미는 알코올 중독 엄마와 온전히 자신이 돌봐야 하는 딸이 있는 10대 미혼부이다. 엄마는 로미를 집에서 내치지는 않으나, 오랜 시간 방임해 온 것으로 보인다. 로미가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않아 어린이책도 읽지 못한다는 점이나 종종 술을 먹고 실종되는 엄마를 찾기 위해 온 밤을 거리에서 보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당장 아이를 키워야 하므로 직업훈련을 받거나 학업을 이어갈 수 있는 처지도 아니다. 로미는 하루를 사는 것 외에 아는 것이 없어, 줄리가 가고 싶어 하는 케임브리지대학교가 지역에 있는 대학교보다 더 좋다는 사실도 모른다. 로미는 옷도 없고, 버스 탈 돈도 없어 반나절 정도의 거리는 걸어 다녀야 한다. 한편 줄리는 성실히 일하는 정비공 아버지와 사회복지사 어머니와 함께 산다. 줄리는 물리학을 사랑한다. 물리학자가 되고 싶은 영리한 딸을 위해 두 부모는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다. 케임브리지 대학에 다니거나 지원하는 아이들에 비해 턱없이 못 미치는 지원이겠지만, 줄리는 동네에서 가장 좋은 학교에 다니며 가장 공부를 잘하는 아이이다.
그러니까 이건 줄리는 공부를 하기 위해 카페를 가지만 로미는 육아가 지쳐 잠시 졸고 싶을 때 카페를 간다는 말이다. 그 둘의 격차는 줄리가 사랑하는 우주만큼이나 넓다는 말이다. 서로의 우주가 어느 카페에서 우연히 겹친 어느 날 그 둘은 사랑에 빠진다. 줄리는 로미의 딸을 돌보는 방법을 배우고 로미는 줄리에게 글을 읽는 방법을 배운다. 시간을 함께 보내던 중, 줄리는 임신을 하게 되고 출산을 결심하며 집을 가출해 로미 집에 머물게 된다. 둘은 서로에게 설레고 각자에게 배운다. 그러나 글 읽기와 애 돌보기를 평가하는 세상의 무게가 다른 만큼 임신과 출산에 대한 로미와 줄리의 무게도 같을 수 없었다.
임신과 출산은 필연적으로 여성의 신체를 관통하여 진행된다. 이 분명한 사실을 우리는 그다지 잘 알지 못한다. 임신과 출산이 협박과 차별의 근거가 되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여성이 출산하거나 출산하지 않을 권리, 양육하거나 양육하지 않을 것이 각각의 권리로써 온전히 보장되는 것뿐이다. 입이 마르도록 경탄하는 새 생명의 탄생 따위 어떤 인간의 육신이 찢기는 결과라는 명징한 사실을 외면할 것이라면 경탄하는 그 입을 다무는 것이 나을 것이다.
<로미오 앤 줄리에는 세 명의 여성이 등장한다. 줄리, 줄리의 엄마, 그리고 로미의 엄마. 이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출산하거나 출산하지 않으며 양육하거나 양육하지 않는다. 줄리는 로미를 사랑하는 만큼 로미의 딸도 사랑한다. 그들의 데이트에서 로미의 딸은 빼놓을 수 없는 존재이다. 줄리는 자신의 임신 사실을 알았을 때, 임신중절을 곧바로 고려했다. 대학 입학을 코앞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로미의 설득으로 이후 학업과 자녀 양육을 동시에 할 방법을 고민했으며, 결과적으로는 임신중절수술을 선택하고 케임브리지대학으로 향한다. 줄리의 엄마는 줄리를 낳지 않았다. 줄리의 아버지와 결혼하면서, 젖먹이 줄리의 엄마가 되는 일에 대해서도 알아가기 시작한다. 그녀에게 줄리는 언제나 딸이었고, 줄리에게도 엄마는 언제나 엄마였다. 로미의 엄마는 배우자 없이 출산을 선택해 로미를 양육했다. 양육을 포기한 적은 없지만, 그녀는 삶을 술에 기대는 와중에 로미를 방임했고 로미는 글자도 제대로 못 읽는 청소년이다.
줄리의 임신에 대하여 우울해하고 죄책감을 느끼는 로미에게 줄리는 단호하게 말한다. ‘내가 너를 위로까지 해줘야 하는 비참한 상황을 만들지는 마. 가장 힘든 건 나니까.’<로미오 앤 줄리에 등장하는 여성 인물들은 자신의 생애과정과 처지 속에서 임신과 출산, 양육의 방식과 대상을 선택하고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 분투한다. 관객은 서로 일치하지 않는 선택들을 바라보며 그것이 모두 각자를 위한 최선의 선택이기를 바라게 된다. 연극은 ‘이성적’이고 ‘최선의’ 선택을 하는 각 여성이 본인의 현명함과 별개로 안고 살아야 할 무너짐과 불안 역시 그대로 노출한다. 극 초반 임신 중절 결정을 철회하기 위해 고군분투하지만, 마지막 장면에서 대학으로 향하는 줄리의 발걸음을 우리는 다르게 이해하지 않는다. 내가 낳지 않은 아이를 키우고 싶은 마음과 출산하고 싶은 마음, 임신중절을 하는 마음이 그다지 다르지 않음을 우리는 알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너를 위해 죽지는 않을 거야. 내가 너를 사랑하더라도 그 방법이 죽음이 되지는 않을 거야. 그리고 너를 사랑하니까 나는 죽지 않을 거야.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로미오는 줄리엣이 죽었다고 생각하여 죽음을 선택했고, 약에서 깨어난 줄리엣은 이미 죽은 그를 보고 단도로 자신의 가슴을 찌른다. 사랑의 정도가 생사의 결단으로 그려지는 비극의 세계관에서 나온 로미와 줄리는 더 이상 서로를 위해 죽지 않는다. 극히 괴로워도, 살아감은 지속되므로.
로미에게는 물리학이 있고 줄리에게는 딸이 있다. 로미는 대학으로 향하는 길이 줄리뿐 아니라 자신의 계급성과 지역으로부터 멀리 떠나는 일임을 알고 있다. 그래서 기약할 수 있는 것은 없지만, 어색한 웃음으로라도 로미에게 작별 인사를 건넨다. 둘은 서로 사랑하기 이전에 각자가 존재했던 세계로 다시 향하는 듯하다. 그러나 우리는 알지 않는가. 이미 모든 것이 달라졌음을, 동시에 그 무엇도 변하지는 못함을, 그러니 우리는 사랑을 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