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우리 집에는 지구본이 하나 있었다.내 머리통보다 조금 더 크던 그것은 보통의 지구본이 그러하듯 살짝 기울어져 있었고 마치 진짜 지구처럼 자전축을 중심으로 회전을 했다.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할 길은 없지만 실제로 나와 내 가족과 나아가서는 지금의 인류가 살아가는 터전이라는 그 둥근 물건이 신기하고 재미있어서 나는 그것을 종종 살펴보곤 했다.
아빠가 말씀하시길 지구본에 푸른색으로 표시된 부분은 바다요 갈색이며 녹색으로 표시된 것은 육지라 했다. 내륙지방에 사는 터라 바다 볼 일이 참으로 드물었던 나의 눈에 바다는 너무 넓어서 지구본에 입혀진 푸른 빛깔을 바라보다 보면 문득 무서운 기분이 들기도 했다. 예상했던 것보다 거대하던 바다와는 반대로 육지의 면적은 생각했던 것보다 작았다. 게다가 육지 중 우리나라가 차지하는 비율은 충격적일 정도로 작아 아쉬울 지경이었는데 서울이나 바로 옆, 대전도 아닌 충청남도 공주에 살던 어린아이였던 나는, 공주는, 그리고 나의 집은 카지노 게임에 점 하나로라도 표시될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 걱정이 되기도 하고 서운한 마음이 들기도 했더랬다.
동생과 나는 지구본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그것을 함께 바라보기도 했다. 그러다가 질릴 즈음이면 한 명이 온 힘을 다해 손으로 지구본을 탁 쳐서 돌리고 나머지 한 명은 눈을 감은 채 빙글빙글 돌아가는 구를 향해 둘째 손가락만이 곧게 펴진 작고 통통한 손을 쭉 내밀었다. 돌아가는 지구본에 처음 가 닿을 땐 늘 손가락을 얼얼하게 만드는 통증이 느껴졌지만 잠시 후 통증은 잊혔고 손가락의 저항에 부딪힌 지구본은 회전 속도를 빠르게 줄이다가 곧이어 완전히 도는 것을 멈췄다.
"스...웨...덴? 언니! 언니 스웨덴에 간대!!"
정지되어 있는 지구본 위, 내 둘째 손톱 아래에는 길쭉한 땅덩어리가 있었고 그곳엔 스웨덴이라는 글자가 쓰여있었다. 내가 이다음에 스웨덴으로 여행을 가게 될 것이라는 의미였다. 그것은 우리 자매가 정한 지구본 여행 놀이의 규칙이었다. 그 낯선 땅들에 나를 보내주마고 약속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지만 눈을 감고 찍은 손가락 끝에서 만난 미지의 나라들은 이미 나와 특별한 인연을 맺은 것처럼 생각되었고 그것들의 이름을 읽는 것만으로도 나는 몹시도 설렜다. 언젠가는 그곳에 꼭 가게 될 거야. 언젠가는 꼭.
하도 지구본 여행을 많이 해 안 가게 될 나라보다 언젠가는 꼭 가게 될 나라들이 많았으니 한 번쯤은 오만도 내 손가락 끝에 걸린 적이 있었을 게 분명하다.
그곳엘 지난 주말에 다녀왔다. 지금 우리 가족이 살고 있는 아랍에미리트 두바이에서 오만까지는 자동차로도 오갈 수 있는 데다 아랍에미리트 하타국경을 넘어 무스카트(Muscat)쪽으로 다녀왔던 첫 번째 여행이 너무나도 만족스러웠기에 그로부터 몇 달 지나지 않아 우리 가족은 다시 한번 오만 국경을 넘게 된 것이었다.
정식 이름은 오만 술탄국(sultanate of oman)인 이곳은 아라비아 반도 동쪽 끝에 있는 나라로 국토의 80프로가량이 바위산과 사막으로 이루어졌다 했다. 바로 옆 나라인 아랍에미리트처럼 석유 덕분에 부를 누리게 된 산유국이지만 알고 보면 최근에 급부상한 아랍에미리트와는 달리 이미 19세기에 유럽과 인도양 지역까지 영향력을 미치고 아프리카에도 영토를 가지며 전성기를 누리던 해양 제국이었다. 흥미로운 점은 석유로 큰돈을 거머쥐게 된 이후에도 그것을 활용해 온 나라를 현대화시키는 대신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켜가는 것을 택했다는 것.그래서 그런지 오만의 수도이자 가장 큰 도시인 무스카트에서도 하늘 높이 솟아오른 현대식 건물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병풍처럼 서있는 산자락 아래, 마치 엄마 무릎에폭앉아 있는 어린아이처럼 건물들이 안겨 있는 모양새인데 그 규모가 크면 대도시요 규모가 작으면 산골이나 어촌마을인 식이다.
이번 여행의 목적지는 카지노 게임(Musandam)이었다. 아라비아 반도 가장 끝에 있는 카지노 게임 반도는오만의 다른 영토와는 뚝 떨어져 오로지아랍에미리트 땅으로만 둘러싸인 신기한 지역이다. 우리가 탄 배를 따라 수 킬로미터를 헤엄치며 점프를 하던 돌고래들, 원래는 흰색이었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이제는 회색이 된 정겨운 스카프를 머리에 두른 현지인들,햇볕에 잘 구워진 마디마디가 굵은손가락이 달린 커다란 손을 우리를 향해 흔들던 이들, 산자락 아래 공원에서 맨발로 축구공을 차며 염소들과 함께 뛰어다니던 아이들, 그리고 온 세상을 붉게 물들이던 바닷가의 노을까지.
카지노 게임엘 다녀오는 길,우리 가족은 벌써부터 세 번째 오만 여행을 꿈꾸기 시작했다.그러고 보니 내가 꼭 한번 가보고 싶었던 축제가 마침 1월 중순부터 2월 중순까지 진행된다네. 일 년에 딱 한번 진행되는 축제라던데!? 이번 주말에 다시 한번 국경을 넘자고 하면 울 낭군이 너무 놀라려나? 그런 신나는 생각을 하며 지금 난, 카지노 게임에서의 추억을 곱씹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