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미인 sag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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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체 Apr 20. 2025

스타보다 은둔자의 삶을 선택한 신비주의 카지노 게임 가르보

그레타 가르보는 할리우드 역사상 가장 완벽한 신비주의를 실현한 배우로 남아있다. 스크린에서는 압도적인 존재감을 발산했지만, 스크린 밖에서는 철저히 자신을 감추며 살았다. 그녀의 생전에도, 사후에도 그녀의 실제 모습과 내면에 대해서는 여전히 많은 의문이 남아있다.


역사상 가장 매력적인 여배우로 기억되는 그레타 가르보는 스크린 연기의 새로운 장을 열었을 뿐만 아니라, 할리우드 최초의 진정한 신비주의를 실현한 인물이다. 놀라운 아름다움과 독보적인 스타일로 수많은 대중을 사로잡았음에도, 그녀는 평생 고립된 삶을 선택했다. 엄청난 인기와 명성에도 불구하고 언론과 철저히 거리를 두어, 죽을 때까지 단 하나의 스캔들도 없이 신비한 아우라를 유지했다.


1920년대 이후 최고의 여배우로 대중의 열광적인 사랑을 받은 그레타 가르보는 어찌나 자신을 철저히 숨기고 살았는지, 영화 관계자가 아니면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고 한다. 시상식이나 공식 석상에서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며, 카페나 나이트클럽에서 그녀를 목격했다는 사람조차 없었다.대체 어떤 성격의 소유자가 배우라는 직업을 선택했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그녀의 삶은 철저한 은둔과 신비로 가득 차 있었다. 심지어 그녀의 고향 스웨덴에서조차 그레타 가르보는 수수께끼 같은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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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타 가르보는 1905년 9월 18일, 스웨덴 스톡홀름의 허름한 5층 아파트에서 세 자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는 환경미화원과 공장 노동자 등을 전전하는 가난한 하층 노동자였다. 그러나 가난이 그녀를 소극적으로 만든 것은 아니었다.어린 시절부터 그레타는 이웃 아이들과 어울리기보다 혼자 집에 있는 것을 선호했다. 보다 못한 어머니가 그녀를 야외로 데려가면, 홀로 구석을 헤매거나 따로 떨어져 있곤 했다. 학교에 입학했을 때도 그녀가 괴로워한 것은 공부가 아니라, 책상에 오래 앉아 있어야 하는 상황과 휴식 시간에 다른 아이들과 어울려야 하는 의무였다.그레타가 또래와 어울리지 못했던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그녀의 키였다. 남녀를 통틀어 그녀가 가장 키가 컸으며, 놀랍게도 12세에 이미 성인 키인 170cm에 도달했다. 이러한 신체적 조숙함은 그녀를 정신적으로도 또래보다 성숙하게 만들었고, 그녀는 특히 이국적인 나라와 문화에 대한 공부에 심취해 있었다. 아마도 그녀의 마음속에는 이미 어딘가로 탈출하고 싶은 열망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 같다.


14세가 되었을 때, 그레타에게 진정한 비극이 찾아왔다. 그녀가 가장 사랑했던 아버지가 당시 유행하던 스페인 독감으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가세는 더욱 기울었고, 어머니와 언니들이 생계를 위해 일하러 나간 사이, 그레타는 스스로 돈을 벌 방법을 모색했다.처음에는 이발사들의 보조로 일하며 용돈을 벌었지만, 수입이 너무 적어 만족하지 못했다.그녀는 13세에 학교를 중퇴하고 어머니를 설득해 백화점에 취직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당시에는 미성년자가 일하기 위해서는 부모의 동의가 필요했다.

1920년, 그레타는 스웨덴의 고급 백화점에서 모자 판매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성실하고 매력적인 외모 덕분에 그녀는 모자를 잘 판매했고, 특히 모자를 구매하러 오는 여배우들을 응대하는 일을 즐겼다. 그러던 중 그녀는 백화점 카탈로그 촬영을 위한 모델로 발탁되었고, 키가 크고 서툴지만 이상하게 매력적인 이 소녀를 영화계에서 주목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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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가 되기로 결심한 그레타는 스웨덴에서 무대에 서기 위한 필수 과정인 왕립 연기학교에 입학했다. 1922년부터 1924년까지 장학금을 받으며 공부한 그녀는 졸업과 동시에 유럽에서 가장 주목받는 배우 중 한 명으로 떠올랐다.1925년 말, 그레타는 미국 캘리포니아로 이주했고, 1926년에는 국제적인 스타의 반열에 올랐다. 당시 스무 살이었던 그녀는 아직 영어를 할 줄 몰랐음에도 불구하고, 압도적인 매력으로 할리우드를 사로잡았다.


그레타 가르보는 연기뿐만 아니라 패션에서도 선구자적인 면모를 보였다. 그녀는 매니시 룩의 창시자로 불릴 만큼 넓은 주름 바지, 셔츠, 스웨터 등 오버사이즈 의상을 완벽하게 소화해 냈다.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체형을 가진 그녀는 심플하고 중성적인 스타일을 선호했다.평소 그녀는 자연스럽고 실용적인 패션을 추구했다. 플랫슈즈, 터틀넥, 트렌치코트, 폴로넥 스웨터 등은 그녀의 활동적이고 편안함을 추구하는 성향을 반영했다. 이러한 그레타의 스타일은 외모가 비슷했던 마를린 디트리히부터 오드리 헵번에 이르기까지 많은 스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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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일, 외모, 연기 모든 면에서 압도적인 매력을 지녔던 그레타 가르보도 193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대중의 관심에서 차츰 멀어지기 시작했다. 1941년, 그녀는 마지막 작품을 촬영한 후 더 이상 스크린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아마도 대중에게 자신의 노화된 모습을 보여주기 싫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레타 가르보는 평생 결혼하지 않고 아이도 갖지 않은 채 홀로 살았다. 이 때문에 그녀가 동성애자 또는 양성애자라는 소문이 무성했다. 물론 그녀는 몇몇 남성들과 연애 관계를 가졌고, 당대 최고의 명사들이 앞다투어 그녀에게 청혼했지만, 그녀는 모든 청혼을 거절했다.

1945년 이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그녀는 뉴욕으로 이주했고, 생을 마감할 때까지 그곳에서 은둔 생활을 이어갔다. 이 시기 그녀가 스웨덴 친구에게 보낸 편지들은 대부분 우울한 내용으로 가득 차 있었다.1984년에는 유방암 진단을 받았고, 말년에는 신부전증으로 투석 치료를 받다가 1990년, 84세의 나이로 신부전과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3,000만 달러 이상의 재산을 남겼다.


매력적인 외모와 탁월한 연기력, 그리고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스타일로 할리우드를 정복했던 그레타 가르보. 그녀는 스타로서의 화려한 삶보다 개인으로서의 고독한 평화를 선택했다. 아마도 그녀에게 진정한 자유란, 세상의 시선으로부터 자신을 지켜내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그 어떤 스캔들도 없이, 오직 자신의 예술과 신비로만 대중에게 기억되기를 원했던 그레타 가르보. 그녀의 바람대로, 그녀는 오늘날까지도 우리에게 '신비의 여신'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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