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리우드의 전설적인 배우 루스 엘리자베스 데이비스는 1908년 4월 5일 유난히 천둥 번개가 요동치던 날 미국 매사추세츠주 로웰에서 태어났다. 눈이 크고 입이 작은 얼굴은 1930년대 미국 사회에서 트렌디한 마스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기의 베티는 예쁘지 않고 섹시하지 않다고 할리우드에서 외면을 당했다. 그녀와 비슷하게 눈이 큰 조앤 크로포드가 훨씬 근사한 모습으로 선점하고 있던 것도 작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훗날 미국영화협회 선정 가장 위대한 배우로 캐서린 햅번 다음으로 2위에 선정된다. 극장에서 짧은 경력을 쌓은 후 할리우드에 진출하여 죽기 전까지 100여 편의 영화에 출연하면서 미국 영화계의 영부인이란 호칭과 함께 할리우드의 전설적인 아이콘으로 지금까지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그녀는 조앤 크로포드와 앙숙으로도 유명했고, 할리우드에서 악명 높기로 유명한 베티 데이비스는 성질이 불같고 오만할 정도로 콧대가 높았다. 캐서린 헵번과 더불어 여성의 인권 신장에 목소리를 높여왔기에 당대 남자 배우들 사이에선 고약한 암캐로 불렸다고 한다.
이렇게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기질은 일뿐만 아니라 이성 문제에도 적용되어 말년에 그녀는 아무도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며 고독을 한탄했다고 한다. 혹자들은 그녀가 중세시대에 태어났다면 벌써 마녀 사냥을 당해서 화형에 처해졌을 거라고 한다. 흥미로운 사실 하나는 어린 시절 카지노 게임로 불린 그녀는 배우 활동을 하면서 그 이름을 썼지만 스펠링을 미국식 카지노 게임(Betty)에서 프랑스식 베트(Bette)로 바꾼 것이다. 이는 발자크 소설 '사촌 베트'의 이름을 따라서 사용한 것인데, 소설 속 베트는 못생긴 외모로 절세미인 사촌을 질투하여 평생 저주와 복수로 원한을 해소하는 다소 섬뜩한 캐릭터이다. 물론 극 중 진정한 악인은 따로 있지만, 그런 개성 있는 캐릭터를 오마주 하여 이름으로 사용한 그녀의 세계관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베티의 아버지는 하버드 로스쿨을 졸업한 변리사였다. 하지만 그는 베티가 7살 때 이혼하고 그녀의 엄마는 베티와 바바라 자매를 홀로 키우게 된다. 베티의 엄마는 인물 전용 포토그래퍼로 활동했기에 이사도 잦고 출장이 많아 두 자녀를 소위 스파르타식 교육으로 유명한 버크샤 기숙학교에 보내고 이후 남녀공학인 쿠싱 아카데미를 졸업하게 했다. 이후 그녀는 뉴욕으로 건너가 존 머레이 앤더슨 연극 학교에 입학했고, 마사 그레이엄에게 무용을 배웠다.
학창 시절부터 베티는 지는 것을 싫어해 항상 선두에서 리더십을 발휘하였고 독립적이고 매력 있는 성격으로 학교 스타였다고 한다. 하지만 데뷔 초에는 그녀의 열정과 재능보다는 외모가 더 중요하게 작용했던 터라 당시 베티의 얼굴은 선호하는 미인형이 아니었다. 그녀의 신체 비율도 좋은 편이 아니었고 무엇보다 할리우드에서 추구하는 섹시함이 보이지 않았다. 세련됨과도 거리가 멀었지만 그녀는 대신 아름다워 보이게 연기할 줄 아는 배우였다. 그러니까 아름다움을 연기할 줄 아는 최초의 배우였다.
우여곡절 끝에 베티는 1929년 브로드웨이의 한 연극 무대에서 기회를 잡는다. 그리고 그해 말 21살의 나이에 코미디 장르 영화 '깨진 접시(Broken Dishes)'에 출연하면서 빅 히트를 친다. 이후 그녀는 스크린 테스트를 거쳐 할리우드의 유니버설 픽쳐스와 계약을 맺고 1931년 영화 'Bad Sister'에서 작은 배역을 맡는 것을 시작으로 이렇다 할 주목을 받지 못하다가 1932년 워너 브라더스로 옮기면서 명성을 얻게 된다. 이 무렵 고교 동창인 하몬과 첫 번째 결혼도 한다. 하지만 베티는 조앤 크로포드처럼 30대 이후에 더욱 잘 나가게 된다. 1934년 서머셋 몸의 소설 '인간의 굴레'를 원작으로 한 영화에서 천박하고 차가운 웨이트리스인 밀드레드 역을 맡아 첫 아카데미상 후보에 오른다.
이후 그녀가 좋은 반응을 얻은 캐릭터는 이처럼 사회부적응자 모드의 심지 굳은 불량 여성 역할 일색이었다. 그리하여 1935년 영화 '댄저러스(Dangerous)'에서 말썽 많은 젊은 여배우 역할로 첫 아카데미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소속사에 부당한 대우에 돈 적게 준다며 법적 소송을 거는 등 일련의 문제를 겪다가 1938년 두 번째 아카데미상을 받는다. 이후로 그녀는 승승장구의 연속이었다.
인연 없는 아버지가 그해 2월에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는데 그녀는 아는지 모르는지 일과 사생활로 바쁜 나날을 보냈다. 더군다나 돈을 많이 벌지 못하는 남편의 무능과 여러 번의 낙태 등 원만하지 못한 결혼 생활로 인해 둘은 이혼의 수순을 밟게 된다. 이혼 전 불륜도 있었을 것이다. 베티는 그녀에게 두 번째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안겨준 영화 '제저벨'의 감독 윌리엄 와일러와 깊은 사랑에 빠졌고 아마도 그녀의 마지막 낙태는 와일러의 아이였을 거란 소문이 돌 정도였다. 물론 촬영이 끝나고 감독과의 관계도 끝이 났다. 같은 해 8월에는 하워드 휴즈도 베티에게 접근한다. 당시 반려견 보호 협회 같은 행사에서 만난 두 사람은 서로 호감을 가졌고 말리부에서 데이트를 즐기면서 이혼 소송에 대응하고 있었다.
남편 하몬은 그녀에게 위자료를 청구했고 베티는 하워드가 돈을 지불해 주길 내심 기대했으나 응하지 않았고 그렇게 흐지부지 관계도 끝나고 하몬과도 헤어진다. 불행한 사생활과는 별개로 1940년대 베티는 미국에서 가장 돈을 많이 버는 여성이었다. 30년대까지 일부 여배우들이 발명가를 부업으로 했다면 베티는 상업과 공익에 눈을 뜨게 된다. 2차 세계 대전 동안 베티는 배우 존 가필드와 함께 할리우드 캔틴을 공동 설립했다. 그녀는 전쟁통에 버려진 나이트클럽을 식당으로 운영하며 군인과 연예인들이 많이 찾게 하였고 군인들에게는 무료로 제공된 클럽이었다고 한다. 또한, 그녀는 전쟁 채권을 팔아서 전쟁을 위한 수백만 달러를 모으는 것을 도왔고 그 공을 인정받아 1980년에는 국방부로부터 최고 훈장까지 받았다. 물론 그보다 몇 년 전인 1977년에는 여성 최초로 영화 협회에서 공로상을 받았다.
카지노 게임는 뛰어난 연기력으로 그 어떤 여배우들보다 대중의 사랑과 찬사를 받으며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다졌다. 그만큼 사석에선 까탈스럽고 싸움닭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악한 사람이 악인 연기를 잘한다는 말이 있듯이 카지노 게임는 선한 사람은 아니었다는 평판이 지배적이었다.
당대 최고 배우조앤 크로포드와 지독한 앙숙으로도 유명하였는데, 믿기지는 않지만 양성애자 조앤이 카지노 게임에게 호감을 표시했는데 그녀가 정색하자 카지노 게임가 당시 좋아하던 배우 톤을 꼬셔 결혼하면서 약을 올린 후 불구대천 앙숙이 되었다는 말이 있다. 어쩌면 카지노 게임 입장에서 톤처럼 멋진 남자가 어쩌자고 저런 여편네를 만났을까 하며 안타까워한 것이 와전된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어쨌거나 시작은 카지노 게임의 질투로 비롯되었다고 한다.
카지노 게임가 힘들게 오디션을 보면서 배역을 따는 무명 배우 시절에 조앤 크로포드는 가장 잘 나가고 있었다. 카지노 게임 생각에는 자신과 별 차이도 없는 것 같은데 조앤은 예쁘게 보고 자신은 왕눈이라고 비하하는 걸 참지 못한 것도 있었을 것이고, 미천한 댄서 출신 조앤보다 자신은 엘리트 코스를 제대로 받은 오리지널 양키 성골인데 세상이 알아주지 않아 원통했던 모양이다.
카지노 게임가 잘 나가기 시작하면서도 조앤에 대한 험담은 끊이질 않았는데, 입버릇처럼 조앤은 스타지만 자신은 배우라며 자부심을 드러냈다고한다. 그 외 여러 번 악연이 겹치면서 조앤에 대한 앙심을 품은 것도 이해가 가지만 훗날 밝혀진 정황을 보았을 때 조앤은 착한 척하는 악녀였고 카지노 게임는 솔직한 악녀였기에 조앤의 예쁜 척하는 가식적인 태도가 못마땅해서 그런 것 같다는 생각도 들게 한다. 물론 카지노 게임가 앙숙으로 지낸 배우는 조앤 크로포드뿐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카지노 게임는 배우로서 외형이 예뻐 보이려는 노력을 하지 않고 캐릭터를 정할 때 더욱 고약하고 무자비하고 차가운 캐릭터를 찾는 데 노력했고 그러한 재능과 노력이 대중의 마음을 훔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조앤과 카지노 게임 둘 다 경력의 쇠퇴기에 조앤의 제안으로 '제인의 말로'라는 작품을 같이 찍게 되었는데, 이 작품은 조앤이 맡은 배우로 성공한 언니 블렌치를 제인이 질투하여 괴롭히고 학대하는 공포영화이다. 둘이 그렇게 사이가 안 좋았음에도 수락한 이유는 그녀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오마주 캐릭터를 연기하게 되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카지노 게임의 사악한 에피소드 하나를 더 얘기하자면 같은 작업을 촬영하면서 펩시콜라 사장과 결혼하여 미망인이 된 조앤 크로포드를 괴롭히기 위해 촬영장 부스에 조앤이 설치해 놓은 펩시콜라 자판기 대신 코카콜라 자판기로 교체한 사실이다. 조앤도 카지노 게임의 허리를 다치게 하는 등 가만히 있지는 않았지만 이들의 앙숙은 오히려 흥행에 도움이 되었고 작업에 임할 때 둘은 굉장히 프로페셔널했다고 한다.
영화배우로 최고의 삶을 누렸지만 베티의 사생활은 당대 다른 여배우처럼 평탄하지는 못했다. 고교 동창이던 남자와 첫 결혼을 한 이후 두 번째 남편은 길을 걷다가 쓰러져 죽었고, 나중에 밝혀진 사실은 이주 전에 생긴 두개골 골절이 원인이었다고 하는데, 누가 머리를 때렸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그리고 1945년에는 예술가 셰리와 결혼해 딸을 낳았지만 수입 격차 등 여러 가지 문제로 1950년 7월 초에 헤어졌다.게다가 이 딸은 훗날 조앤 크로포드의 입양녀를 따라 엄마를 까는 책을 냈다가 베스트셀러도 못 되고 엄마한테 욕만 실컷 먹고는 나중에 유산 상속을 한 푼도 못 받게 된다. 제 딴에는 엄마에 대한 애증의 감정을 썼다고 하는데, 기가 막힐 노릇이었을 것이다. 세 번째 남편과 이혼하자마자 카지노 게임는 7월 28일 배우 게리 메일과 결혼해서 남자 아기와 여자 아기를 입양했다. 하지만 여자 아기 마고는 얼마 후 정신지체 진단을 받아 특수학교에 보내진다.
네 번째 결혼 역시 평탄치 못해서 1960년에 이혼으로 끝이 났다. 이혼할 때도 카지노 게임가 남편의 불륜 정황을 포착하기 위해 당시 유명한 사립탐정 오태쉬를 고용해 불륜 증거를 잡아서 끝을 냈다고 한다. 그리고 같은 해 카지노 게임는 미래의 대통령 존 F. 케네디를 열렬히 응원하러 다녔다.
그밖에 텔레비전 인터뷰나 각종 프로그램에 참가하면서 왕성한 활동을 지속했고, 1983년에는 유방암 진단을 받고 유방 절제 수술을 받았을 때 그녀는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연기를 하고 있었다. 수술 후 2주 만에 그녀는 얼굴 오른쪽과 왼쪽 팔에 마비를 일으키는 4번의 뇌졸중을 겪었고 말을 흐리게 했다. 그녀는 장기간의 물리치료를 시작해서 회복을 했으나 이미 죽음은 문턱에 서 있었다. 1989년 '사악한 계모'를 마지막으로 찍고 10월 6일 스페인의 영화제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81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그녀 사후 그녀의 입양아들 마이클이 유망한 젊은 배우들에게 재정적인 지원을 제공하는 베트 데이비스 재단을 만들었고 메릴 스트립은 1998년 보스턴 대학에서 첫 카지노 게임 데이비스 공로상을 받았다. 포레스트 론에 안치된 그녀의 묘비명은 그녀의 삶을 요약한다. "그녀는 힘든 방법으로 그것을 얻었습니다"라고 쓰여 있고 그녀는 확실히 그렇게 했다. 모든 여배우들이 꺼려하는 악역을 독식하며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한 그녀의 치열한 노력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