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리우드 황금기를 장식한 1940년대, 로렌 바콜과 베로니카 레이크의 그림자에 가려진 채 독특한 아우라로 누아르 영화의 역사를 새롭게 쓴 여배우가 있었다. 바로 '위협(The Threat)'이라는 별명으로 불린 리자벳 스콧이다. 그녀의 차가운 매력과 독립적인 삶의 궤적은 시대를 초월한 매력으로 여전히 많은 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리자벳 스콧은 누아르 영화의 역사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녀는 단지 아름다운 외모만으로 기억되지 않는다. 당시 할리우드의 관행과 기대에 순응하지 않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삶을 살아간 그녀의 모습은 현대적 관점에서 보면 선구적이다. 비록 그녀의 경력은 불공정한 논란과 시대적 한계로 인해 조기에 막을 내렸지만, 스콧이 남긴 영화적 유산과 독립적인 삶의 방식은 오늘날에도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준다. 누아르의 여왕을 넘어, 그녀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삶을 정의한 강인한 여성으로 기억될 것이다.
1922년 9월 29일, 펜실베이니아주 스크랜턴에서 우크라이나 이민자의 딸로 태어난 리자벳 스콧(본명 엠마 메조)은 약 22편의 영화에 출연하며 누아르 장르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했다. 빛나는 눈망울과 촉촉한 입술, 날씬한 몸매와 도드라진 광대뼈, 그리고 늘어뜨린 금발은 그녀만의 트레이드마크였다.
스콧의 매력은 단순한 외모를 넘어섰다. 그녀의 이상하게 우울해 보이는 냉철한 연기, 무심하고 무관심해 보이는 표정, 그리고 저돌적인 아름다움은 그녀를 누아르의 여왕으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연기력에 대해서는 때로 비평가들의 혹평을 받기도 했지만, 그녀만의 독특한 개성과 화면 장악력은 시대를 초월한 압도적인 매력으로 평가받는다.
연극 학교를 거쳐 뉴욕에서 패션모델로 활동하던 스콧은 21번째 생일 파티에서 워너브라더스 제작자의 눈에 띄었다. 여러 차례의 좌절 끝에 1945년 영화에 데뷔한 그녀는 1946년 주연으로 발탁되었고, 당시 그녀의 소속사는 로렌 바콜의 별명 '더 룩(The Look)'에 맞서기 위해 그녀에게 '더 스렛(The Threat)'이라는 별명을 붙였다.이 마케팅 전략은 역효과를 낳기도 했지만, 스콧의 경력에 전환점이 된 것은 험프리 보가트와 함께한 작품이었다. 하드보일드 팜므파탈 캐릭터를 완벽하게 소화해 낸 그녀는 이후 반항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누아르 장르에서 독보적인 입지를 다졌다. 그러나 그녀가 맡은 비호감 캐릭터들은 로렌 바콜이나 베로니카 레이크의 인기와 관능미에 비해 대중적 사랑을 받기 어려웠다는 평가도 있다.
인기 절정의 시기에도 스콧은 독특한 행보를 보였다. 그녀는 함께 작업한 남자 배우들과 데이트를 하지 않았으며, 소속사 직원들과의 스캔들도 강력하게 부인했다. 이런 모습은 당시 할리우드에서 '이상한 여성'으로 낙인찍히는 결과를 가져왔다.
1954년, 그녀의 경력에 치명타가 된 사건이 발생했다. 한 잡지에 그녀가 레즈비언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기사가 실렸고, 이에 분노한 스콧은 해당 잡지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하여 250만 달러를 청구했다. 법정에서의 승소 여부와 상관없이, 이 사건은 그녀의 이미지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그녀의 평소 행동과 취향—남성 향수를 뿌리고, 남성 잠옷을 입고 자며, 여성스러운 프릴 드레스를 싫어했다는 점—은 당시 보수적인 할리우드 문화에서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현대적 관점에서 보면, 이는 단지 개성 있고 털털한 성격의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스캔들을 피해 영국으로 떠났던 스콧은 1957년 할리우드로 돌아와 엘비스 프레슬리와 영화를 찍은 후, 가수로 전향하며 스크린 활동을 중단했다. 그녀의 음악 활동은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으나, 이후 10년간 간헐적으로 영화와 텔레비전에 출연했음에도 그녀의 명성은 점차 희미해졌다.
은퇴 후 스콧의 삶은 놀라울 정도로 조용했다. 그녀는 거의 집 밖에 나가지 않았고, 인터뷰나, 공개 행사 출연 요청도 모두 거절했다. 대신 혈우병 연구와 기아 퇴치를 위한 기금 마련에 조용히 기여했다.한때 그녀를 발굴한 제작자 할 월리스와의 결혼설이 돌기도 했으나 그녀는 평생 미혼으로 살았다. 1986년 월리스 사망 후 그의 유산 중 상당액을 받았다는 소문이 있지만, 스콧은 이미 자신만의 방식으로 경제적 독립을 이루고 있었다. 그녀는 결혼 대신 저축과 주식 투자에 집중했으며, 1947년 구입한 집에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살았다.
스콧의 삶은 같은 시대 여배우들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로렌 바콜이 결혼 12년 만에 미망인이 되었고, 베로니카 레이크가 네 번의 결혼 끝에 50세에 빈곤한 상태로 사망한 것과 달리, 스콧은 자신만의 길을 선택했다. 그녀에게 결혼할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부유한 석유 회사 직원과 오랜 교제를 했고 1969년 결혼을 계획했으나 상대가 갑자기 세상을 떠난 후 결혼에 대한 생각을 접었다.
2014년 1월 31일, 92세로 생을 마감한 스콧은 끝까지 자신만의 원칙을 지켰다. 독서를 즐기고 진지하고 맑은 성품을 지녔다고 전해지는 그녀는 평생 자신의 삶의 방식이 옳았다고 확신했다. 죽음에 있어서도 그녀는 흔적 없이 떠나기를 원했다. 유골도, 추모식도, 비석도 남기지 않았으며, 단지 산타 바바라에 그녀의 재가 뿌려졌다는 것만이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