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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대웅 Mar 31. 2025

과학의 자력갱생

1921년 일본 이화학카지노 게임 추천

카지노 게임 추천는 꿈의 조직이라고 할 수 있다. 누구도 상상 못 할 지식의 새 지평을 개척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래서 처음 만들 때의 이상은 매우 진취적이다. 이미 누구나 아는 걸 찾겠다며 만들어지는 카지노 게임 추천란 세상에 없다. “한 알의 모래에서 우주를 본다”라는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구처럼, 모든 카지노 게임 추천는 현실 너머의 먼 미래를 전망한다. 그래서 세상에 이상주의자들이 가장 많이 모인 집단이 카지노 게임 추천일 것이다. 물론 이상을 현실에서 구현하는 일은 쉽지 않다. 문을 여는 그 순간부터, 카지노 게임 추천는 온갖 악재와 변수와 불운과 직면해야 한다.


학계, 재계, 정계가 힘을 모아 만든 이화학연구소도 그랬다. 이 연구소가 겪은 첫 번째 악재는 리더의 부재였다. 1917년 8월, 초대 소장 기쿠치 다이로쿠가 임기 시작 5개월 만에 사망했기 때문이다. 1855년생인 그는 도쿠가와 막부와 메이지 정부가 두 번에 걸쳐 영국 유학을 보낼 정도로 뛰어난 인재였다. 케임브리지대학의 첫 동양인 졸업생이 된 기쿠치는 귀국 후 도쿄제국대학 교수가 되었다. 그러면서 서양의 수학도 일본에 들여왔다. 일본 최초의 근대적 수학자인 셈이다. 공직 경력도 화려했다. 도쿄제국대학 총장, 문부성 장관, 제국학사원 원장을 두루 지냈다. 그러니 갓 출범한 이화학연구소에 그만큼 소장으로 어울리는 사람도 없었다. 뒤이어 도쿄 지하철을 설계한 토목공학자 후루이치 코이가 2대 소장이 되었다. 하지만 그 또한 지병으로 4년밖에 임기를 채우지 못했다. 이제 막 조직을 키우고 연구에 집중해야 할 이화학연구소로서는 불운한 일이었다.

카지노 게임 추천1922년 일본 이화학연구소를 방문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왼쪽 두 번째). 맨 왼쪽의 인물이 ‘리켄의 세 타로(理研の三太郎)’ 중 한 명인 재료공학자 혼다 고타로다.




인재난, 조직난, 재정난

두 번째 악재는 내부 불화였다. 이화학연구소를 구성한 두 거대 조직, 물리학부와 화학부는 틈만 나면기싸움을 벌였다. 당시 두 조직의 수장은 일본 과학을 대표하는 석학들이었다. 물리학부장 나가오카 한타로는 독창적인 원자 모델을 제창하여 양자역학 태동에 기여한 이론물리학자였다. 또 화학부장 이케다 기쿠나에는 ‘감칠맛’으로 알려진 우마미를 내는 글루탐산나트륨을 조미료로 제품화했다. 즉 물리학부가 순수기초연구의 성격이 강했다면, 화학부는 일상생활과 밀접한 산업기술을 주로 개발했다. 이러한 연구 성격의 차이 때문인지, 두 부서는 주요 의사결정에 좀처럼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 따라서 연구소 조직이 안정되지 못하고 자주 파행을 겪었다.


세 번째이자 가장 심각한 악재는 재정난이었다. 이화학카지노 게임 추천는 초기 예산을 800만 엔으로 확정하고 출범했다. 그러나 실제 확보된 금액은 518만 7천 엔(정부 보조금 200만 엔, 황실 하사금 100만 엔, 민간 기부금 218만 7천 엔)에 불과했다. 이렇듯 계획에 미치지 못하는 예산으로 인해 초기 사업이 상당한 차질을 빚었다. 가장 큰 문제는 건축 비용이 부족했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4년간 카지노 게임 추천 건물도 없이 지내야 했다. 그나마 이화학카지노 게임 추천는 대학의 교수들이 연구원을 겸직해서, 근무 중인 대학에 임시로 연구실을 꾸릴 수 있었다. 1921년 우여곡절 끝에 화학 연구동이 지어졌다. 그러나 계속되는 재정난으로 물리 연구동은 그보다 4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다만 물리학부장 나가오카는 “연구에서 중요한 건 연구자이지 시설이 아니”라며 별 신경을 쓰지 않기는 했다.


이렇게 악재가 겹치자 새로운 소장을 임명하기가 쉽지 않았다. 일본 최초의 물리학 박사이자 3개 제국대학(도쿄, 교토, 규슈)의 총장을 지낸, 원로 중의 원로 야마카와 겐지로도 고사했다. 그러다 의외의 인물이 소장직에 응했다. 도쿄제국대학 물리학 교수였던 오코치 마사토시다. 당시 42세의 젊은 과학자였던 그는 이화학연구소를 맡으며 이렇게 선언했다. “과학 연구와 실용을 결합해 발전시키고, 산업의 기반을 구축하겠다.” 1921년, 설립 4년 만에 세 번째로 맞는 소장이었다.




과감한 구조개혁

흔히 개혁이 혁명보다 어렵다고 한다. 기존 체제를 완전히 바꾸는 것보다, 유지하면서 개선하는 일이 더 많은 내부의 저항을 받기 때문이다. 젊은 소장 오코치가 직면한 문제도 그러했다. 그는 이화학카지노 게임 추천를 덮친 여러 악재를 해결하지 않는 한 미래가 없다고 보고, 구성원들의 반발을 무릅쓰고 구조개혁을 단행했다. 그것은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나타났다.


첫째로 주임연구원 제도를 도입하였다. 이것은 물리학부와 화학부의 고질적인 갈등을 해소하려는 조치였다. 이에 두 거대 부서를 해체하여 14개의 주임연구원실로 쪼갰다. 주임연구원은 이화학연구소가 수행하는 각 프로젝트의 책임자다. 이들 자체가 조직의 기본 단위가 되게 함으로써 유연성과 책임성을 높인 것이다. 즉 소장은 주임연구원에게 연구에 관한 모든 권한을 일임하고, 주임연구원은 자율과 책임에 따라 연구를 수행하는 체제다. 후일 이화학연구소의 명성을 높이는 과학자들 – 니시나 요시오, 유카와 히데키, 도모나가 신이치로 – 이 모두 주임연구원 출신이다. 이는 장인에 대한 존중과 도제식 교육이 보편적인 일본의 문화와도 잘 부합했다. 주임연구원 제도는 100년이 지난 지금도 이화학연구소의 근간으로서 유지되고 있다.


둘째로 개발 기술을 적극적으로 상품화했다. 이화학카지노 게임 추천는 설립 4년 만에 파산 위기에 몰릴 정도로 자금난이 심각했다. 하지만 정부에 추가 예산을 요청할 수도, 민간 부문에서 더 이상의 기부를 기대하기도 어려웠다. 이에 오코치는 자체 개발한 기술을 산업계에 팔아서 운영자금을 확보한다는 자구책을 마련했다. 다만 직접 제품을 제조 및 판매하는 행위는 법적인 문제가 될 수 있었다. 이화학카지노 게임 추천는 사단법인으로서 공익을 위해 운영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오코치가 묘안을 냈다. 1927년 카지노 게임 추천와는 별도로 이화학흥업이라는 회사를 설립한 것이다. 이 회사는 이화학카지노 게임 추천의 기술을 판매하는 창구 역할을 했다. 그러니까 요즘 말로 하면 기술지주회사다. 처음에는 낯선 시도로 여겨졌지만, 개발된 기술의 품질이 워낙 좋아 사업이 크게 번창했다. 그 수익은 고스란히 이화학카지노 게임 추천의 운영비로 환원되었음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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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학카지노 게임 추천 100주년 기념 사진전에 전시된 오코치 마사토시(왼쪽)와 그의 리더십을 조명한 책(오른쪽). 그는 붕괴 위기의 이화학카지노 게임 추천를 재건한 개혁적 소장이었다.


최초로 성공한 기술은 에어컨 제습제 아드솔(adsole)이었다. 화학부장 이케다의 발명품으로, 다공성 점토로 만들어 건조 효과를 높이는 기능을 했다. 마침 20세기 초 발명된 에어컨이 보급되던 때라 아드솔의 인기도 좋았다. 아드솔은 보존 기술로도 수요가 높았는데, 특히 전쟁 기간 중 군수물자나 의약품의 방습 보관에 아주 유용했다. 오코치는 일찌감치 이 기술의 사업화 가능성을 알아보고, 1922년 도요가스실험소라는 회사를 설립했다. 이 회사는 이화학카지노 게임 추천에서 스핀오프한 첫 번째 회사로 기록된다. 이 밖에도 많은 신기술이 쏟아져 나왔다. 알루미늄의 부식을 막는 표면 코팅 기술인 알루마이트, 자동차의 엔진 효율을 높이는 균일한 피스톤 링, 고품질 사진 인화지 등이 그 예다. 이중 사진 인화지 제조 회사는 1936년 이화학카지노 게임 추천에서 스핀오프했는데, 이 기업이 오늘날 카메라, 복사기, 프린터 등 사무기기로 유명한 리코다. 리코(RICOH)라는 이름도 ‘리켄 광학공업주식회사(RIken Optical COmpany)’에서 유래한 것이다.




비타민의 발견

이화학연구소의 최대 히트상품은 무엇보다 비타민이라고 할 수 있다. 비타민은 인체에서 거의 생성되지 않지만, 물질대사와 건강 유지에 필수적인 영양소다. 이것은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음은 물론 의학에서도 중요한 발견이었다. 이 발견을 주도한 이가 스즈키 우메타로다. 그는 이론물리학자 나가오카 한타로, 재료공학자 혼다 고타로와 함께 ‘리켄의 세 타로(理研の三太郎)’라고 불릴 정도로 초창기 이화학연구소를 대표한 과학자였다. 다만 물리학과 화학으로 양분된 이화학연구소에서는 비주류였는데, 그의 전공이 농학이었기 때문이다.


본래 스즈키는 일본인이 서양인보다 체격이 작은 이유를 연구했다. 일본인의 왜소한 체격은 근대화가 지상과제였던 메이지 시대의 화두이기도 했다. 당시 지식인들은 일본과 서양의 발전 정도가 신체적 차이에서도 기인한다고 보았고, 따라서 서양을 추격하려면 영양 개선을 통해 국민의 덩치를 키워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스즈키는 그 원인이 쌀 중심의 식문화에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쌀을 활용한 여러 실험을 했는데, 이 과정에서 쌀겨에서 나온 추출물이 각기병의 치료 효과가 있음을 발견했다. 20세기 초 각기병은 아시아에서만 매년 수십만 명의 사망자를 내는 무서운 질환이었다. 스즈키는 이 추출물을 벼의 학명(오리자 사티바)을 따서 ‘오리자닌(Oryzanin)’이라고 명명하고, 각기병 치료 효과는 물론 이제껏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영양소라고 확신했다. 이것이 오늘날의 비타민 B1이다.

세계 최초로 비타민 B1(오리자닌)을 발견한 스즈키 우메타로(오른쪽)와 오리자닌 발견을 보도하는 신문 기사(왼쪽)


다만 스즈키의 발견은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과학사에 기록된 비타민의 발견자는 네덜란드의 크리스티안 에이크만이다. 그런데 에이크만은 이론적 예측만 했을 뿐, 1910년 실제 추출에 성공한 건 스즈키다. 그럼에도 스즈키의 공로가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이유는 임상 실험 데이터가 부족했다는 데 있다. 일본 최고의 병원이 있던 도쿄제국대학 의학부가 스즈키의 임상 실험에 비협조적이어서였는데, 그 이유가 황당하다. 스즈키는 도쿄제국대학 농학부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의학부 교수들은 각기병이 전염병이라고 했고, 그래서 (의사도 아닌) 스즈키의 연구는 엉터리라고 비난했다. 노벨생리의학상 후보로도 스즈키의 라이벌인 영국의 프레데릭 홉킨스를 추천했다. 아마도 의학부는 차라리 일본이 노벨상을 못 받으면 못 받았지, 농학부가 의학부보다 먼저 받는 상황을 용납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런 파벌 문제가 없었다면, 스즈키가 이미 1920년대에 일본의 첫 노벨상을 받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비타민 B1에 이어 비타민 A도 스즈키의 연구실에서 발견했다. 스즈키와 함께 연구한 다카하시 가쓰미가 대구의 간유에서 추출하는 데 성공했다. 이로써 현대 영양학이 크게 발전할 수 있었는데, 이화학연구소가 그 기원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오코치는 현대인의 영양 개선에 한 획을 그은 이 성과들도 재빨리 사업화를 했다. 그렇게 설립된 회사가 리켄 비타민이다. 이 회사는 오늘날에도 일본을 대표하는 식품 첨가물 제조사로 유명하다. 쌀을 화학적으로 활용한 스즈키의 연구는 비타민 외에도 다방면에 걸쳐 있었다. 대표적인 분야가 일본 전통주인 사케였다. 1918년 일본에서는 주식인 쌀의 가격이 폭등해서 사회 문제로 비화했다. 이 일대 혼란 속에서 스즈키는 쌀 없이도 사케를 제조할 수 있는 합성법을 고안했다. 저렴한 알코올에 아미노산과 향료를 첨가해 전통적인 사케 맛을 내는, 서민들의 식생활에 혁명을 가져온 기술이었다.




발명의 공업화

이렇듯 이화학연구소는 국민의 일상에 유용한 신기술을 앞세워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것은 오코치 소장이 핵심 연구사업으로 장려한 결과이기도 했다. 이화학연구소로부터 기술 사용권을 이전받은 기업들도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다. 이 기업집단을 ‘리켄 콘체른(理研コンツェルン)’이라고 했다. 그 1호 기업이 1927년 설립된 이화학흥업이다. 이후 리켄 콘체른 기업들은 식품, 의약품, 금속, 기계 등 다양한 업종에서 급증했다. 이들은 1939년 63개까지 늘어났고, 생산공장만 전국 121개에 이르렀다. 즉 이화학연구소를 중심으로 일종의 재벌그룹이 형성된 셈이다. 덕분에 파산 위기의 이화학연구소는 금전적으로 풍족해질 수 있었다. 전체 예산의 75%를 이 기술료 수입으로 충당할 정도였다.

리켄 콘체른의 대표 상품인 비타민(왼쪽)과 피스톤 링(오른쪽) 광고. 이화학연구소는 이 기술들을 사업화해서 재벌그룹으로 성장했다.


이화학연구소의 재벌화는 일본의 산업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화학연구소가 급성장한 1930년대는 일본 중화학공업의 고도화 시기와 겹친다. 닛산, 모리, 닛치츠 등의 신흥재벌들이 바로 이 시절 등장했다. 리켄 콘체른 역시 지주회사를 중심으로 한 기업집단이라는 점에서 이들과 비슷했다. 그리고 일본이 군국주의로 경도되면서 군수산업이 중시되자, 중화학공업 기반의 이 재벌들도 일대 호황을 맞게 되었다.


오코치는 이러한 경영 기조를 ‘발명의 공업화’라고 했다. 즉 연구소만의 기술 개발을 넘어 국가의 산업에도 공헌한다는 의미다. 일례로 이화학연구소의 주력 제품이었던 피스톤 링과 특수철강은 항공기와 탱크 등의 핵심 부품으로써 육군에 대량 납품되었다. 이렇게 군수산업을 매개로 한 연계는 일본의 제2차 세계대전 참전과 함께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을 맞게 되었다. 이화학연구소는 일본 전시 경제의 브레인이 되었고, 결국 원자폭탄 개발까지 수행하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1945년 일본의 패전은 이화학연구소에도 심각한 타격이 되었다. 미군은 리켄 콘체른을 전시 군수산업의 핵심 재벌로 간주하여, 다른 기업들과 함께 해체하도록 명령했다. 이화학연구소 역시 폐쇄되었음은 물론이다.

1930년대 리켄 콘체른의 구성도. 이화학카지노 게임 추천와 이화학흥업이 기술지주회사 역할을 하고, 각 산업 분야에 총 63개에 달하는 기업집단이 되었다.


다만 그러면서도 미국은 내심 이화학연구소를 높이 평가한 듯하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연합국 점령 하의 일본 과학기술을 연구한 보웬 디즈는 이화학연구소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미국의 비슷한 연구소들이 더 오래 존재했지만,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전까지 약 30년 동안 이화학연구소가 이룬 성과에 비견할만한 곳은 단 하나도 없다.” 실제로 20세기 초반 많은 국가가 연구소를 설립했지만, 이화학연구소처럼 자체 수익 모델을 갖고 있던곳은 거의 없었다. 이러한 전통은 전쟁 후에도 지속되어 일본의 고도성장을 뒷받침한 원동력이 되었다. 오늘날에도 일본의 과학 연구는 연구소와 기업 간의 긴밀한 연계, 즉 ‘산업화된 과학’에 기반을 두고 있다. 기업인 출신 노벨상 수상자가 다른 나라보다 유독 많은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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