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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대웅 Apr 22. 2025

전통의 축적과 노벨상

1949년 일본 이화학온라인 카지노 게임소

1949년 11월, 온 일본이 흥분에 휩싸였다. 일본 최초의 노벨물리학상 수상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수상자는 교토대학 교수이자 이화학연구소 주임연구원인 유카와 히데키. 14년 전 오사카제국대학 박사과정 중에 발표한 중간자 이론이 수상의 근거였다.


중간자는 당시 물리학의 최대 수수께끼 중 하나를 푼 결과였다. 더 이상 쪼개지지 않을 줄 알았던 원자핵 안에 양성자와 중성자가 있음이 알려지자, 원자핵을 유지하는 힘에 대한 의문이 생겼다. 같은 양전하를 띠는 양성자들은 서로 밀어내는 전기적 반발력이 작용한다. 따라서 어떻게 반발력을 극복하면서 원자핵이 안정적으로 존재하는지 설명이 필요했다. 이에 유카와는 “양성자와 중성자 사이에 작용하는 새로운 힘이 존재하며, 이는 특정 입자의 교환에 의해 매개된다”라는 해답을 내놓았다. 그는 이 입자를 중간자라 했고, 불확정성 원리에 따라 그 질량이 약 100MeV/c²라고 예측했다. 1949년의 노벨물리학상은 이러한 이론적 예측이 실제로 검증된 결과였다. 이는 자연계의 4가지 기본 힘 중 하나인 강력(강한 상호작용)의 원인을 설명한 것이기도 했다.


유카와의 노벨상은 아시아에서는 두 번째였다. 1930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인도의 찬드라세카라 벵카타 라만이 첫 번째다. 그런데 라만은 영국령 인도제국 출신으로서 영국 과학계의 일원으로 분류된다. 반면 유카와는 일본에서 학‧석‧박사 학위를 받았고, 중간자 이론으로 유명해지기 전까지 해외 체류 경험도 없었다. 그랬기에 유카와는 미군정의 통치를 받던 일본의 자긍심과도 같았다. 패전 직후라서 사회는 혼란하고 사람들은 무력하던 시기였다. 이때 전해진 노벨상 수상 소식이 국민적 자존심을 다시 높여주었다. 1949년 12월 12일 자 <아사히신문의 보도다. “패전 일본은 문명의 파괴자라 불렸으나, 유카와 박사의 노벨상 수상은 일본이 세계 문화를 위해 아름다운 첫발을 내디뎠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유카와의 수상을 기뻐할 수만은 없었던 사람도 있었다. 친구이자 연구소 동료인 도모나가 신이치로다. 그는 내심 한 수 아래로 여겼던 유카와가 세계의 주목을 받자 깊이 좌절했다. 당시 그의 회고다. “정말 기쁘면서도, 내 안의 초라함을 느꼈다. 내가 걸어온 길은 과연 옳았을까?” 절치부심한 그는 이후 연구에 몰두했고, 양자전기역학에서 무한대 문제를 해결하는 재규격화 이론으로 1965년 일본의 두 번째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이때 공동 수상자가 저 유명한 리처드 파인만이다. 파인만은 선구적 이론을 제창한 도모나가에 경의를 표하면서, 노벨재단에 요청해 그를 수상 명단의 가장 앞에 올리게 했다. 이로써 이화학연구소는 노벨상 수상자이자 양자역학의 핵심 공로자 2명을 배출하게 됐다. 오랫동안 변방이었던 일본 과학이 세계의 중심으로 올라서는 순간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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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유카와 히데키의 노벨물리학상 수상(왼쪽)과 이를 보도한 신문 기사. 그의 수상은 패전으로 침울했던 일본 국민의 자존심을 다시 세우는 계기가 되었다.




모방에서 태동한 과학

유카와와 도모나가가 거둔 성공은 몇 세대에 걸친 노력의 산물이었다. 그 기원은 19세기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수백 년 동안 일본을 통치한 막부 체제를 무너뜨린 메이지 정부는 근대화 개혁을 최우선 과제로 내세웠다. 서양을 배우고 따라 하자는 것은 곧 국가의 생존 전략이었고, 모방의 대상은 정치제도부터 산업, 학문, 심지어 식생활에 이르기까지 전방위적이었다. 서양 최고의 발명품인 과학도 예외일 수 없었다. 일본의 근대과학은 서양에 파견한 유학생들이 지식과 기술을 배워오면서 뿌리를 내릴 수 있었다.


야마카와 겐지로는 그 시초격 인물이다. 그는 아이즈 번의 몰락한 사무라이 집안 출신이었다. 15세 때 메이지 신정부와 막부 세력 간 보신전쟁이 일어나자 군에 입대했지만, 결국 학문으로 선회하여 물리를 공부하기로 했다. 여기에 영향을 미친 인물이 후쿠자와 유키치다. 본래 일본 과학의 뿌리는 네덜란드에서 들어온 난학이었고, 그것은 의학과 화학이 주를 이루었다. 하지만 후쿠자와는 물질의 이치를 해명해 삼라만상의 법칙성을 규명하는 물리학이야말로 서양 학문의 왕이라고 했다. “화학은 귀중하고 의학은 유용하다. 그러나 자연법칙 전체를 다루는 물리학은 이 모두를 아우르는 왕이다.” 후쿠자와에 의하면 물리는 물질뿐만 아니라 사회에도 영향을 미친다. 물리의 세계에서는 신분의 상하와 무관하게 누구나 평등하기 때문이다.


후쿠자와에 감명을 받은 야마카와는 1871년 미국 유학을 떠났다. 막부 편에 가담하여 신정부와 싸웠던 그였던 만큼, 서양이 마냥 달갑지는 않았다. 그런데 생각이 바뀐 계기가 있었다. 그가 탄 배는 태평양에서 다른 배와 만나 일본으로 보낼 우편물을 교환했는데, 야마카와는 이 광경을 보고 서양 과학의 힘을 절감했다. 드넓은 바다 한가운데에서 배 두 척이 정해진 시간에 만난다는 사실이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다. 야마카와는 이를 통해 “서양 과학은 기계가 아니라, 시간과 약속을 통제하는 힘”이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예일대학에서 공부한 야마카와는 1875년 귀국해서 도쿄대학 조교수가 되었다. 그의 나이 21세의 일이다. 당시 조교수의 역할은 정교수를 보좌하는 것으로, 야마카와는 물리 담당 교수였던 미국인 윌리엄 비더의 조수를 맡았다. 1879년에는 마침내 정교수가 되었다. 이는 서양인들에게 과학을 배웠던 일본인들이 비로소 스스로 인재를 키우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1888년 메이지 정부는 각 분야를 대표하는 석학 25명에게 박사학위를 수여했다. 물리학에서는 야마카와가 선발되었다. 야마카와는 일본 최초의 물리학 교수이자 물리학 박사인 셈이다.


야마카와의 제자 중에 가장 뛰어났던 이는 나가오카 한타로다. 그도 스승처럼 사무라이 집안 출신이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사무라이 계급은 해체되었으나, 많은 이들이 학문, 정치, 산업 등으로 눈을 돌렸다. 그래서 사무라이 출신들은 메이지 시대의 새로운 근대 지식인으로 거듭나게 된다. 야마카와는 물리학과 어학에 뛰어났으며, 자신과 비슷한 출신인 나가오카를 누구보다도 아꼈다. 그래서 서양에 유학을 보내서 통계역학의 창시자이자 원자의 존재를 예견한 루트비히 볼츠만을 사사하게 했다. 그 영향인지 나가오카도 원자를 온라인 카지노 게임했고, 이후 토성형 원자모델을 제안했다. 이는 양자역학 등장 이전과도기적 원자모형이다. 현대 기준으로는 정확하지 않았지만, 일본인이 세계 학계에 독자적 이론을 낸 첫 사례라고 할 수 있다. 1896년 유럽에서 돌아온 나가오카는 곧바로 도쿄제국대학 교수가 되었고, 1917년에는 이화학연구소의 초대 물리학부장으로 취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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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오카 한타로(왼쪽)의 토성형 원자모델. 전자를 발견한 조지프 존 톰슨은 원자를 건포도들이 박힌 빵 모양으로 생각했으나, 나가오카가 새로운 토성형 모델을 제안했다.





학문의 전통과 축적

니시나 요시오는 야마카와와 나가오카를 잇는 3세대 물리학자다. 그리고 그의 대에 이르러 일본 물리학은 명실상부한 세계 수준에 올랐다. 니시나도 스승들이 그랬듯 서양에서 물리학을 공부했다. 그러나 세계의 석학들로부터 인정받았으며, 그들과 동등한 지위에서 연구했다는 차이가 있다.


본래 니시나의 전공은 전기공학이었다. 도쿄제국대학 전기공학과를 졸업한 그는 대기업인 도시바로 취업이 내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독창적인 일을 원해서 취직을 포기했고, 이화학온라인 카지노 게임소에 온라인 카지노 게임생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모교 대학원의 물리학과에 진학해 나가오카 한타로의 제자가 되었다. 나가오카 역시 될성부른 떡잎인 니시나를 알아보아 서양에 유학을 보냈음은 물론이다.


그 무렵 유학을 떠난 과학자들은 2년이면 대부분 돌아왔다. 일본 국립대학은 교수들의 해외 유학을 출장으로 인정해서 2년간 급여를 지급했기 때문이다. 국립대학보다 위상이 높았던 이화학연구소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니시나는 스승 나가오카의 지원으로 유학을 계속했고, 8년 동안이나 유럽에 있었다. 이때 사사한 학자들이 20세기 물리학의 거장들인 어니스트 러더퍼드와 닐스 보어다. 보어를 중심으로 한 코펜하겐 학파는 아인슈타인과 논쟁하며 양자역학을 발전시켰는데, 니시나도 그 일원이었다. 보어의 연구소에서 그는 스웨덴의 오스카 클라인과 함께 클라인-니시나 공식을 만들었다. 이 공식은 지금도 전자기학과 양자역학 교과서에 실리고 있다. 이러한 우수성을 인정한 보어는 직접 여기저기 추천서를 써줄 정도로 니시나를 신임했다.


덕분에 41세의 나이로 이화학연구소의 최연소 주임연구원이 되었다. 이후 1931년 교토제국대학의 양자역학 특별강의에서 대학원생이었던 유카와 히데키와 도모나가 신이치로와 처음 만나게 된다. 강연을 맡은 니시나는 젊은 과학자들에게 최신 물리 이론을 전수했다. 특히 핵력을 설명하려는 유카와의 착상에 공감하며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이 만남을 계기로 그의 연구실에 훗날 일본의 노벨상 1, 2호가 되는 두 사람이 들어오게 된다.


연구책임자로서 니시나는 유럽을 풍미했던 양자역학을 일본의 물리학도들도 배우기를 바랐다. 그래서 유럽에서 함께 연구했던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폴 디랙, 닐스 보어를 꾸준히 초청했다. 세 사람은 양자역학 성립의 주역들로 노벨상을 받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니까 유카와와 도모나가는 굳이 해외로 나갈 필요가 없이, 도쿄의 강의실에 앉아 석학들이 펼치는 ‘저자 직강’을 들을 수 있었던 셈이다. 그래서 니시나의 제자들은 세계 물리학의 변방이라는 콤플렉스가 없었다. 이를 대변하는 니시나의 한 마디다. “학문은 인종이나 유전의 문제가 아니다. 단지 전통의 차이일 뿐이다.”

닐스 보어의 이론물리온라인 카지노 게임소 니시나 온라인 카지노 게임팀(왼쪽)과 1937년 이화학온라인 카지노 게임소를 방문한 보어(오른쪽). 보어와 니시나는 사제이자 동료로서 평생을 교류했다.




니고온라인 카지노 게임의 시도와 실패

니시나의 시대에 일본 물리학이 서양과 동등한 수준이었음은 다른 측면에서도 드러난다. 원자폭탄의 독자 개발에 착수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1939년 핵분열이 이론적으로 규명되면서 전 세계는 충격과 공포에 휩싸였다. 그러나 그 원리를 온전히 이해하고 현실화할 수 있는 학자들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니시나를 비롯한 일본의 물리학자들도 그중 일부였다. 원자폭탄의 재료로는 지구상 우라늄의 약 0.7%만을 차지하는 방사성 동위원소 우라늄-235나 플루토늄이 쓰인다. 이것들을 생성하려면 입자를 고속으로 원자핵에 충돌시키는 최첨단 장비인 사이클로트론이 필요했다. 1937년 니시나는 어니스트 로런스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사이클로트론을 개발했다. 직경 26인치 규모로서 1932년 로런스가 개량한 27인치 사이클로트론과 거의 같은 수준이었다. 이것이 1944년에는 60인치로 더욱 대형화되었다. 1930년대 후반의 이러한 학문적 진보 덕분에, 일본은 핵분열 발견 직후 핵물리 연구 경쟁에 곧바로 참여할 수 있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니시나는 육군의 원자폭탄 개발 계획의 책임자로 낙점되었다. 세계적 핵물리학자이자 사이클로트론까지 직접 제작한 그만큼 이 일에 어울리는 사람도 없었다. 다만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니시나의 개인적 전망은 비관적이었다. 오랫동안 서양에서 유학해서 미국을 잘 알았던 그는 “일본의 참전은 미친 짓”이라며 패배를 확신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정부 방침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니시나는 육군의 의뢰를 받아 100여 명의 연구원을 데리고 원자폭탄 개발에 착수했다. 즉 미국에 줄리우스 로버트 오펜하이머가, 독일에 베르너 하이젠베르크가 있었다면, 일본에는 니시나 요시오가 있었던 셈이다.


육군에서는 이 비밀 프로젝트를 ‘니고연구(ニ号研究)’라고 불렀다. 한자로 풀이하면 2호, 두 번째 연구라는 뜻이다. 니시나의 앞 글자인 니와 숫자 2의 발음이 같아서 중의적으로 붙인 이름이다. 니시나는 연구원들을 아홉 팀으로 나누어 이화학연구소, 육군항공본부, 오사카제국대학에 배치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난관의 연속이었다. 가장 큰 문제는 역시 폭탄의 재료인 우라늄-235를 충분히 분리하는 것이었다. 일본은 그만큼의 우라늄을 확보하지도 못했고, 거기서 0.7%에 불과한 우라늄-235를 농축하는 건 더욱 어려웠다. 이제 막 존재가 알려진 플루토늄의 생산 역시 쉽지 않았다. 니시나의 팀은 이론 검토 끝에 열확산법을 사용해 우라늄-235를 분리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물론 다른 방법들도 있었지만, 이화학연구소 과학자들이 할 줄 아는 건 이것뿐이었다. 다만 이 방법만으로는 폭탄에 필요한 임계 규모의 우라늄-235에 턱없이 부족했다. 연구팀은 1945년 2월이 되어서야 겨우 극소량만 분리할 수 있었다.


그 사이 미국이 앞서나갔다. 미국은 1942년 맨해튼 계획에 착수해서 단 3년 만에 원자폭탄을 만들어냈다. 그 결과 우라늄-235와 플루토늄으로 만든 폭탄 2방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져 인류 역사상 최악의 지옥도를 만들어냈다. 일본 군부는 그 강한 섬광을 보고 처음에는 마그네슘 폭탄이라고 생각했다. 설마 미국이 그렇게 빨리 원자폭탄을 만들었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러나 현장 조사에서 강력한 방사선을 확인한 니시나가 원자폭탄임을 보고했다. 이것이 결정적 계기가 되어 일본의 항복이 결정되었다.

니시나 요시오가 이화학연구소에 설치한 사이클로트론. 세계에서 두 번째로 완성되었으며, 일본의 비밀 원자폭탄 개발 계획에도 쓰였다.


니고연구의 실패는 예견된 것이었다. 투입된 자원의 규모부터 맨해튼 계획과 비교가 되지 않았다. 니고연구의 수행 인력은 이화학연구소 니시나 연구실의 100여 명이 전부였다. 반면 맨해튼 계획은 박사급 인력 4천여 명을 비롯해 총 10만여 명을 투입했으며, 20억 달러가 넘는 예산을 썼다. 이는 양뿐만 아니라 질적으로도 어마어마했다. 나치를 피해 건너온 유대인 과학자를 비롯해 노벨상 수상자만 20명 넘게 참여했기 때문이다. 이런 역대급 천재들이 미국 전역에 실험 시설을 짓고 물량을 쏟아부었으니, 일본이 당해낼 재간은 애초에 없었다. 일례로 우라늄-235의 분리‧농축만 해도 그렇다. 일본은 열확산법 한 가지만 시도했지만, 미국에서는 전자기분리법, 기체확산법까지 가능한 모든 수단이 동원되었다. 거기에 새로운 원소인 플루토늄까지 생산했으니, 일본으로서는 그야말로 상상 초월의 일이었다.


다만 니고온라인 카지노 게임의 실체는 아직도 불분명하다. 특히 논란이 되는 부분은 니시나를 비롯한 온라인 카지노 게임진이 폭탄 개발에 소극적이었다는 의혹이다. 이 문제를 제기한 야마자키 마사카츠 도쿄공업대학 교수에 따르면, 니시나의 핵분열 연쇄반응 계산 결과는 폭탄 개발에 충분치 않았다. 야마자키는 이를 근거로 니시나가 니고온라인 카지노 게임를 온라인 카지노 게임소와 후학들을 보호하는 수단으로 이용했을 가능성을 지적한다. 즉 계산 오차는 폭탄 개발을 지연시키려는 의도적인 오류였다는 설명이다.


여기에는 그만한 근거가 있다. 니시나는 시종일관 일본의 참전에 부정적이었으며, 연구원들이 징병 검사에서 탈락하도록 은밀히 조치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니시나의 지도로 열확산 작업을 했던 다케우치 마사와 기고시 후니히코의 회고도 이와 일치한다. 이들에 의하면 처음부터 니시나를 비롯한 이화학연구소 과학자들은 원자폭탄에 회의적이었으며, 핵심 인력인 유카와와 도모나가는 처음부터 연구에서 배제되었다. 물론 이러한 해석들이 도의적 책임을 면하려는 변명일 가능성도 크다. 모든 국가에서 원자폭탄 개발 계획은 존재 자체가 기밀이다. 따라서 당사자의 증언만으로는 어떤 역할을 했는지 입증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이 문제는 독일의 핵 개발에 대한 보어와 하이젠베르크의 엇갈린 증언에서도 마찬가지로 드러난다.

과학기술사가 야마자키 마사카츠는 니시나 요시오가 핵분열의 계산 과정에서 일부러 오류를 범해서 계획이 실패하도록 했다고 평한다.




78년의 학맥이 만든 노벨상

1949년 유카와 히데키의 노벨물리학상은 이러한 축적된 전통 위에서 가능했다. 그는 야마카와 겐지로, 나가오카 한타로, 니시나 요시오로 이어진 학맥을 계승한다. 그러니까 유카와의 노벨상은 단지 한 명의 성과가 아니었다. 야마카와의 유학에서 시작된 78년의 학맥과 전통의 결정체였다. 일본의 과학은 서양을 배우며 시작되었지만, 스승과 제자의 대를 잇는 전통을 쌓아나가면서, 독자적인 이론을 발전시켰다.


그러니 1900년대 생들인 유카와와 도모나가에게는 해외 유학이 필요 없었다. 이미 일본에 세계 수준의 연구환경이 만들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1921년 중학생이던 유카와는 일본을 방문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강의를 들을 수 있었다. 당시 아인슈타인은 43일 동안 일본에 머물렀고, 강의를 들은 사람만 1만 4천 명에 달했다. TV도 라디오도 없던 시대에, 과학자를 꿈꾸던 변방의 소년 유카와에게 이 경험은 강렬할 수밖에 없었다. 대학생이 되어 이화학연구소의 니시나 연구실에 들어간 유카와는 역시 일본을 찾은 하이젠베르크, 디랙, 보어 등과 토론하며 함께 연구했다. 중간자 이론도 바로 이런 과정을 거치며 구체화할 수 있었다. 유럽에서 온 학자들도 유카와와 토론하며 아이디어를 공유했을 것이다. 해외 경험이 없었던 유카와가 중간자 이론을 발표하자마자 세계의 주목을 받았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1930~40년대 일본 물리학은 세계 물리학계와 적극적으로 교류했다. 이화학연구소를 방문한 하이젠베르크와 디랙(위쪽), 프린스턴고등연구소에서 아인슈타인과 재회한 유카와(아래쪽).


도모나가 신이치로도 니시나 연구실에서 과학자로 성장했다. 니시나가 유럽에서 이화학연구소로 가져온 것은 지식만이 아니었다. 자유롭고 수평적인 토론 문화, 자율적인 연구환경도 함께 이식했다. 그 연원은 코펜하겐 이론물리연구소에 뿌리내린 이른바 ‘코펜하겐 정신’에 있다. 이곳의 소장 닐스 보어는 "과학의 발전은 연구자의 자율성을 통해 이루어진다"라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국적, 소속, 연령을 막론하고 활발한 토론이 이루어지도록 했고, 연구자가 무엇을 하던 간섭하지 않았다. 이러한 문화는 특히 젊은 과학자들의 도전정신을 자극하는 데 효과적이었다. 이론물리학자들은 젊을 때 재능을 꽃피우기 마련이다. 아인슈타인, 보어, 하이젠베르크, 디랙 등이 다들 그랬다. 그렇기에 젊을 때 하는 연구에서 권위나 명령에 종속되지 않고, 자유롭게 뜻을 펼칠 수 있는 환경이 중요하다. 도모나가는 1930년대의 이화학연구소에서 그런 자유로움을 만끽할 수 있었다. 그의 회고다. “이화학연구소 니시나 연구실은 일본 안에서도 이례적으로 자유롭고 자율적인 연구환경이었다. 나는 그곳을 ‘과학자의 낙원’이라 부르고 싶다.”


일본에서 태어나고 배운 유카와와 도모나가는 유럽의 양자역학을 재해석해 독창적 분야를 개척했다. 그리고 조국에 첫 번째와 두 번째 노벨상을 안겼다. 두 선각자는 그대로 일본 과학도의 롤모델로 자리 잡았다. 국립대학에 진학해 박사과정을 밟고, 국내 연구소의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경험을 쌓아서, 세계적 성과를 내는 것이 일본 과학자들의 기본 코스다. 현재까지도 일본인 노벨상 수상자들이 대부분 국내파인 이유이기도 하다.

유카와 히데키와 도모나가 신이치로는 일본의 후학들에게는 롤모델이다. 그래서 2007년 두 사람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일본 각지에서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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