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가일기 16
어제는 처음으로 4일 연속 수영장을 다녀온 날이다. 그리고 600미터를 단숨에 돌았다.
수영장을 다시 찾은 건 지난해 9월이었다. 내가 어릴 때부터 유일하게 꾸준히 하고 있는 운동이 바로 수영이다. 고등학교 때 처음 수영을 배웠고 수영이 너무 재밌어서 학교 가기 전 새벽 수영을 다닐 정도였다.
대학 진학으로 서울이란 대도시에 와보니 근처에 수영장 자체를 찾기가 어려웠을 뿐더러 넉넉하지 못한 주머니 사정에 한동안 다니지 못했지만 어릴때 즐거웠던 기억 덕분에 살면서 시간과 여유가 생기면 반드시 수영장을 찾았다. 캐나다에 와서도 코로나가 터지기 전까지 꾸준히 다녔다.
코로나 이후 처음으로 수영장을 찾았을 땐 병가를 낸 지 1년 즘 지난 후였고 당시엔 하루 종일 누워있는 일상을 어떻게든 바꿔보고 싶었다. 그때 내 몸무게는 85kg였는데, 육중한 몸을 일으켜 꾸역꾸역 수영장으로 향하며 느꼈던 참담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오히려 그땐 1km 수영도 가능했는데 문제는 안 그래도 24시간 반복되는 불행한 생각들이 수영하는 내내 더욱 선명하고 날카롭게 다가와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건강할 때 수영과 같은 운동은 명상의 효과가 있어서 복잡한 생각을 정리하기에 좋다. 또한 우울증 극복에도 걷기나 달리기, 수영만 한 게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증상이 심할 땐 운동이 오히려 독이 되는 것이 내 경험상 그렇다.
내가 경험한 우울증은 우울한 감정 자체를 느끼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 내 의지로 제어가 안 되는 생각 쓰나미에 압도되어, 하루 종일 머릿속에 불행 프로그램이 끊임없이 재생되는 상태다. 철저히 내부에서 일어나는 전쟁이라 겉으로는 멀쩡해 보인다. 스스로도 이해도 납득도 안 되는 이 전쟁을 들키지 않기 위해 다른 사람들 앞에선 오히려 쾌활해 보이기까지 한다.
지난 2년 간 좋아하던 수영장에 가는 것을 그만뒀다. 수영을 하면 불행이 물 위에 둥둥 떠다니는 느낌이 들어 괴로워 최대한 멀리했다.
그러다 다시 찾은 건 지난해 9월. 당시 나는 한 차례 마음의 병으로 이끈 상처들과 나의 증상들에 대한 큰 발견을 한 직후로 실로 오랜만에 심신의 안정을 찾은 시기였다. 두려웠지만 수영장에 가니 예전보다 불행한 생각들이 떠다니지 않음을 확인했고, 이후 꾸준히 수영장을 찾았다.
3년이 넘게 이어진 병세에 내 몸과 마음은 이미 지칠 대로 지친 상태라 수영장에 꾸준히 다니는 행위 자체가 나에겐 큰 도전이었다. 그래도 지난 병가 기간 동안 내가 배운 게 있다면 아주 작은 행동들을 습관화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나는 3년 전 87.5kg이었고 지금까지 꾸준한 다이어트를 해오고 있는데, 사실상 내 다이어트는 별개 없다. 시작은 밥 한 숟가락 덜어내는 것이었다. 행위 하나하나만 보면 별것 아닌 - 이거 해서 될까 싶은 미미한 효과를 가진 행동들이지만, 그것들을 매일 꾸준히 하다 보니 3년이 지난 내 몸무게는 63kg이다. 그리고 다이어트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다시 수영 이야기로 돌아가, 지난해 9월 수영장을 다시 찾았을 때도 3바퀴부터 시작했다. 25미터 레인을 한 바퀴 돌면 50미터다. 그렇게 150미터로 시작했다. 수영을 오래 하신 분들은 알 것이다. 참 별거 아닌 숫자에, 그거 할 거면 뭐하러 귀찮게 수영장을 굳이 가는가 물을 법한 양이다.
내겐 가는 것 자체를 도전 과제였으므로 일단 가서 몸만 담그고 온다는 마음으로 갔다. 그렇게 하면 증상에 절어 움직이는 것 자체를 꺼려하는 나의 몸을 일으키는 데 성공할 수 있다.
그렇게 작은 행동을 반복하다 보니 이번 주는 드디어 4일 연속 수영장에 가는 것에 성공하고, 그것도 매일매일 500m이상을 수영하다 처음으로 어제는 600m를 수영 하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7개월만에 4배의 성장을 한 셈이다.
지난 4년간 그토록 염원해왔던 루틴 만들기가 실현되고 있다. 이제 더 이상 수영장에 가면 불행한 생각들이 떠다니지 않는다.
최근 찾은 수영장은 사람이 별로 없어 한 레인을 독차지할 수 있는데, 잔잔한 수면을 가를 때 쾌감과 물의 저항을 뚫고 오롯이 내 힘으로 내 몸을 움직여 나아가는 기분이란! 거기다 물속은 다른 세상에 있는 기분이 들기에 나의 상황과 생각을 한 걸음 떨어져 볼 수 있어 생각 관찰하기에 안성맞춤이다.
여전히 자잘한 증상은 계속 있지만 마음의 병으로 이끈 내 마음의 상처란 큰 산을 넘어 여기까지 왔다는 생각에 무척이나 기쁘다. 내가 넘은 산을 바라보며 그간 내게 허락된 절대적 시간과 가족들의 배려와 상황과 운에 마음 깊이 감사한다.
무엇보다 누군가에겐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내겐 큰 산과 같았던 작은 도전들을 마주하고 그 속에서 싸워 여기까지 온 시간들에 감사한다.
봄의 들판은 황량하지만 그는 이미 황금 들녘을 품고 있다. 마치 우리가 태어났을 때 이미 죽음을 품고 있듯 봄 또한 그렇다. 매일 매일 제자리걸음과 같은 일상이지만 생이 그러하듯 이미 그 안엔 성장과 변화를 품고 있다.
그렇게 오늘 나의 하루도 황금 들녘을 품은 봄처럼 피어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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