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원별곡
초등학교 4학년 기진이를 처음 봤을 때, 카지노 쿠폰는 이미 완전히 진이 빠져있는 상태였다. ‘한여름 뙤약볕에 마라톤을 이제 막 마친 사람’의 표정이 저럴까 싶게, 카지노 쿠폰는 반쯤 혼이 나간 것처럼 보였다. 반갑게 인사를 하는 나의 눈을 카지노 쿠폰는 끝끝내 쳐다보지 않았고, 털썩 의자에 앉아 가방을 바닥에 아무렇게나 내려놓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책상만 보며 나의 지시를 기다렸다. 나는 똑바로 앉으라거나 책을 꺼내라고 하지 않고 가만히 카지노 쿠폰를 바라보기만 했다.
한동안 텅 빈 시선을 책상 모서리 어딘가에 두고 비스듬히 의자에 기대있던 카지노 쿠폰는 선생님이 뭔가 지시를 할 때가 되었는데 아무 말이 없자 고개는 그냥 둔 채 시선만 살짝 들어 나의 눈치를 봤다. 나는 더 이상 묻지 않고, 입을 벌린 채 바닥에 널부러져 있는 카지노 쿠폰의 가방을 책상 옆에 걸어주고 교재를 꺼냈다. 평균적인 4학년 학생의 교재보다 독해 지문이 길고 단어 난이도가 높았다. 먼저 읽어보라고 하니, 카지노 쿠폰는 체념한 듯 한숨을 작게 쉬더니 작은 목소리로 지문을 읽기 시작했다. 아주 매끄럽진 않았지만 비교적 막힘없이 읽어가는 것을 보니 어린 시절부터 영어에 노출이 많이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기진이의 얼굴에는 언제나 표정이 없다. 카지노 쿠폰는 지치고 무기력한 얼굴로 교실에 들어와 가방을 바닥에 던지곤 털썩 자리에 앉아 항상 두가지 같은 질문을 했다.
“오늘 뭐해요? 언제 끝나요?”
수업이 시작되기도 전 언제 끝날지를 묻는 이 카지노 쿠폰는 오늘 배워야 할 부분이 어디인지 스스로 찾아서 책을 펴지 않는다. 선생님이 몇페이지를 펴보자 할 때까지 늘 가만히 기다렸다.초등학교 2학년까지 국제 학교를 다녔다는 기진이의 영어 실력은 나쁘지 않았다. 제법 글밥이 긴 글도 잘 읽고, 어느 정도 이해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문제는 실력이 아니라 아무것도 하기 싫은 카지노 쿠폰의 마음이었다.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죄수의 표정이 저럴까 싶게 이제 고작 11살인 카지노 쿠폰의 얼굴에는 새로운 것을 알아가는 배움의 기쁨이나 호기심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이런 카지노 쿠폰를 데리고 수업을 해야하는 건 참 난감한 일이다. 카지노 쿠폰만 생각하면 당장 수업을 그만두고 밖에 나가서 놀다 오라고 하고 싶지만, 학원에 낸 부모의 교육비를 생각하면 강사 입장에서 그럴 수는 없는 일이다. 선생님이 내준 영어 숙제를 왜 또 안했냐는 질문에 수학 숙제를 하느라고 시간이 없었다는 기진이에게 물었다.
“수학 숙제를 얼마나 했는데?”
“두시간이요.”
“그래, 선생님이 너라도 두시간 동안이나 수학 숙제하고 영어 숙제까지 하기는 싫었겠다.”
야단맞고 잔소리 들을 줄 알았는데 선생님이 순순히 이렇게 얘기하니 의외였는지 카지노 쿠폰가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봤다. 영어책을 한 줄이라도 더 읽게 하는 것이 이런 상태로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일단 같이 책을 읽자고 했다. 인터뷰 형식으로 쓰여진 글이어서 내가 인터뷰어를 읽고, 기진이가 인터뷰이를 맡았다. 카지노 쿠폰가 읽은 독해 지문의 내용은...
Title: Gabonese Music and Survival
Ramona: The history of Gabonese culture is said to be very old. How has music helped the culture survive?
Mr. Ponte: I learned that their music has a lot of the information they need. Some people in Gabon cannot read and write, so they tell their stories through music. Each generation passes there stories to the next. Many musical ceremonies are about survival in the forest. Most of Gabon is covered with forest. -이하 생략-
영국에 살던 사진 작가이자 작곡가인 Josh Ponte는 아침을 먹으며 펼친 신문에서 ‘Gorillas in Africa Need Help’ (위험에 처한 아프리카 고릴라를 도와주세요)라는 공익 광고를 본다. 일주일 뒤, 그는 아프리카 가봉(Gabon)의 숲으로 날아갔고, 그곳에서 야생 동물 구호 활동을 하며 가봉 전역을 여행하던 중, 가봉 원주민들의 전통 음악과 부족 문화에 흠뻑 빠져들었다. 특히 작곡가인 그를 사로잡은 것은 손뼉을 치고, 막대기로 깡통을 두드리는 가봉 원주민들의 음악이었다. 문명의 세계에서 온 그에게 숲속의 새와 동물의 소리처럼 어우러진 그들의 음악은 그 자체로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예술이었고, 그는 그 음악을 기록하고 세상과 공유하기를 원했다.
원시 부족의 모습을 간직한 채 살아가는 가봉 원주민들은 읽고 쓸 수 있는 문자가 없기 때문에, 노래를 통해 그들의 이야기를 전했다. 그들의 노래는 세대를 이어 구전되었고, 원주민들의 의식에서 불리워진 많은 노래 가사는 그들의 생활 방식이나, 생존 방식에 대한 정보를 담고 있었다.
가봉의 카지노 쿠폰들은 어릴 때부터 숲의 나무나, 풀로 만든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를 배운다. 비록 지금은 문명의 영향으로 TV, 인터넷 등을 통해 바깥 세계와 연결된 가봉의 젊은이들이 그들의 전통 음악을 서구 세계의 POP 음악과 mix 하기도 하지만, 여전히 그들의 삶은 자연에 기반을 두고 숲에 의존하고 있다. Josh는 가봉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느린 삶(Slow life)의 소중함과 자연을 보존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는다.
뭐, 대강 이런 이야기가 자그마치 장장 15페이지에 걸쳐 이어진다. 이 글을 기진이와 함께 읽으며, 이 무기력한 카지노 쿠폰에게, 이 재미없는 글을 어떻게 하면 좀 즐겁게 읽힐까 고민하다가 카지노 쿠폰에게 질문을 던졌다.
“기진아, 예전에 가봉 원주민들은 글도 없고, 읽고 쓸 줄을 모르니 전하고 싶은 말을 노래로 했다고 하잖아?”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 하는 카지노 쿠폰에게 다시 물었다.
“네가 만약에 가봉 숲에 사는 할아버지라면 너의 아들, 손자에게 어떤 이야기를 노래로 전해주고 싶을까 생각해볼래?”
나의 질문에 카지노 쿠폰는 한참을 눈만 껌벅거리더니,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음... 영어나...수학...이요?”
“.... .... ....”
카지노 쿠폰의 대답에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세상에... 카지노 쿠폰야 너는 대체 어떤 세상에 살고 있는거니’
“자...선생님이 만약 가봉 숲에 사는 할머니라면, 내 손녀에게 이런 이야기를 노래로 불러줄 것 같아. 한번 볼래?”
나는 컴퓨터와 연결된 TV 모니터에 한글창을 띄웠다. 그리고 즉석에서 생각나는대로 노래 가사를 써내려갔다. 영어가 아닌 우리말로. 자유롭게.
<안녕 나의 사랑하는 딸아
나는 너를 만나서 너무나 행복해
너는 이 가봉 숲에서 가장 아름다운 카지노 쿠폰란다
매일매일 하늘에 하얀 구름을 볼 때마다
엄마는 너를 생각해
그러나 사랑하는 딸아
서쪽 하늘에 하얀 구름이 붉은 색이 되면
머지않아 폭풍우가 올 거라는 뜻이니
붉은 구름을 보면
얼른 마당에 널어놓은 빨래를 걷고,
지붕에 풀을 단단히 매고
일주일 동안 먹을 것을 미리 만들어놓고
빨래감이 있으면 하지 말고 잘 접어 두거라
붉은 구름이 서서히 색이 분홍빛이 되면
이제 비가 그칠거란 얘기란다
그러면 문을 활짝 열고
강에 가서 그동안 모아둔 빨래를 하고
비를 그치게 해주신 신께 감사의 기도를 올리며
기쁘게 춤을 추렴.
머릿속에서 떠오르는대로 즉흥시처럼 쓴 거라 두서없긴 했지만, 모니터를 가만히 바라보는 기진이가 적어도 가봉 숲에 손자에게 영어, 수학을 가르치는 할아버지, 할머니는 없다는 것을 받아들여 주길 바랬다.
“어때, 너도 한번 써볼래?”
“영어로 써요?”
“아아니~ 당연히 우리말로 써도 괜찮지. 니가 가봉 할아버지라고 생각하고 써봐,”
기진이는 잠시 생각하더니 뭔가를 쓱쓱 써내려갔다. 그리고 결코 예쁘다고는 할 수 없는 필체로 맞춤법도 군데군데 틀려있는 카지노 쿠폰의 글을 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가봉은 멋진 나라야.
음악에 나라라고 부를 수 있지.
내가 어디를 가도 음악은 나에 귀에 박혀.
이런 것도 지겨울 수 있지만 우린 아니야.
오늘 이 하늘을 봐.
엄청 행복하고 엄청 신나는 날이야.
이 무지개를 봐.
가봉 사람들의 마음들이 떠다니고 있어.
그래 너도 함께 노래해. by 기진이
세상에... 이런 재능이 니 안에 있었구나. 순간적으로 쓴 가사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카지노 쿠폰의 노래 가사는 그 자체로 작품이었다. 순간 나는 왜 울컥 했을까.
“우와! 이거 정말 멋진 노래인 걸?”
기진이는 여전히 대꾸를 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카지노 쿠폰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다른 표정을 보았다. 기쁘기도, 뿌듯하기도, 쑥스럽기도 한.
“기진아, 요즘에는 노래 가사를 입력하면 노래를 만들어주는 AI 프로그램 있다던데... 선생님이 집에서 한번 만들어와 볼까. 어때?”
기진이는 자신이 쓴 노래 가사를 반으로 접더니 책 사이에 끼우며 고개를 주억거렸고, 우리는 같이 유튜브로 아프리카 원주민 전통 음악과 춤을 담은 짧은 동영상을 봤다. 그렇게 그날의 수업이 끝났다.
그리고 다음 시간, 여전히 지친 얼굴의 기진이가 교실로 들어왔다. 가방을 바닥에 던지는 것 까지는 이전과 다를 바 없었지만, 오늘은 한가지가 달랐다. 지난 수업시간에 반으로 접어갔던 노래 가사를 책상 위에 꺼내더니 나에게 물었다.
“선생님, 그거 해 왔어요?”
솔직히... 까먹었다. 아차! 큰일났다 싶었다. 그리고 놀랐다. 수업 내용에 대해 카지노 쿠폰가 뭔가를 물은 것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카지노 쿠폰에게 잊어버렸다고 할 순 없어서, 프로그램에 문제가 있어서 파일이 날아갔다고, 다음 시간에 다시 꼭 해오겠다고 약속을 했다.
그날 수업에서는, Josh를 영국 런던에서 가봉 숲으로 순식간에 날아가게 만들었던 그날 아침 신문의 광고를 직접 만들어보자고 했다. 영어로 써야 하냐고 다시 묻는 카지노 쿠폰에게 ‘당연히 아니지’라고 했고, 다소 안심한 표정의 카지노 쿠폰는 또 뭔가를 쓱쓱 그려 내밀었다. 어디보자.. 하고 받아드는데 잠시만요 ... 하더니 도로 종이를 가져가 뭔가를 더 그려 넣었다.
“선생님 저 중국어로 숫자도 쓸 수 있어요.”
“아 정말? 대단한 걸? 우리말 글쓰기도 잘하고, 영어도 이렇게 잘하고 중국어까지?”
“이 광고는 전 세계 사람들이 볼 수 있으니까 중국말도 있으면 좋을 것 같아요.”
지시하지도 않은 뭔가를 해보겠다고 스스로 말한 것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렇게 기진이는 영어, 한국어, 중국어를 섞어가며 ‘위기에 처한 가봉 숲의 고릴라 살리기 캠페인 광고’를 만들었고, 수업을 마치고 그 종이를 또 반으로 접어 소중하게 책 사이에 끼워 넣었다.
그날 저녁, 나는 장중딩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장중딩은 “엄마 이건 Chat GPT로는 안되는 거야.” 하더니,새로 다운받은 AI 프로그램에 기진이가 쓴 노래 가사를 입력하고, ‘이 노래 가사를 아프리카 가봉 원주민 의 전통 민속 음악 풍으로 바꿔줘.’ 라고 주문했다. 순식간에 노래 한곡이 빠져나왔고, 유튜브에서 봤던 아프리카 민속 음악이라기보단 보사노바풍에 가까웠지만, 어떻든 꽤나 그럴 듯했다. 얼른 기진이에게 이 노래를 들려주고 싶어서 다음 시간이 기다려졌다.
그리고 다시 수업 시간.
나는 수업을 시작하자마자 노래를 들려주었다. 노래를 들은 기진이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떠올랐다.
“니가 만든 노래야. 어때 근사하지?”
“뭐...괜찮은거 같아요..”
"그래, 특히 가사가 정말 멋져. 귀에 쏙쏙 들어온다. 그지?"
나는 그날 수업 시간에 기진이에 대해 조금 더 알 수 있었다.
초등학교 4학년인 이 카지노 쿠폰의 꿈은 ‘성우’이다. 카지노 쿠폰들에게 꿈을 물을때 마다 주로 의사, 변호사, 회사원, 선생님 정도의 답을 들어왔던 내게 기진이의 꿈은 상당히 신선하고 나이에 비해 구체적이었다. 카지노 쿠폰는 좋아하는 성우의 이름까지 알고 있었다. 보통 배우의 이름이나, 만화 캐릭터의 이름까지는 몰라도 성우의 이름을 아는 것은 드문 일이어서, 어떻게 알았냐고 물으니, ‘원피스’라는 일본 애니매이션에 나오는 캐릭터를 좋아해서 찾아봤다고 했다. 미래 소년 코난(이걸 알고 있다니!) 에서도 같은 성우가 나온다고 신나게 설명하는 카지노 쿠폰와 함께 코난과 포비 이야기를 나누며 나도 잠시 추억 여행을 다녀왔다.
카지노 쿠폰가 제일 좋아하는 노래는 황가람의 ‘반딧불’이라고 한다. 내친 김에 유튜브로 같이 노래를 들어봤다. 내가 아는 반딧불 노래는 ‘아무리 우겨봐도 어쩔 수 없이, 저기 개똥 무덤을 내 집이라고 여기며, 친구야 가지마라~ 가지마~를 외치는 외로운 개똥벌레’ 뿐이었는데 카지노 쿠폰가 좋아하는 ‘반딧불이’는 시작부터 달랐다.
<반딧불
나는 내가 빛나는 별인 줄 알았어요
한번도 의심한 적 없었죠.
몰랐어요. 내가 벌레라는 것을
그래도 괜찮아 난 눈부시니까.
하늘에서 떨어진 별인 줄 알았어요.
소원을 들어주는 작은 별
몰랐어요. 난 내가 개똥벌레라는 것을
그래도 괜찮아. 나는 빛날 테니까.
기진이를 처음 만나 수업한지 두달여가 지났다. OO이가(기진이의 본명) 완전히 달라진 건 아니다. 고작 몇 번의 어설픈 수업으로 카지노 쿠폰의 완전힌 변화를 기대하는 건 지나친 바램이자 교만일 것이다. 그러나 이제 OO이는 적어도 무표정한 얼굴로 가방을 던지고 나의 지시를 기다리고만 있지는 않는다. 지난 시간에는 수업 시간에 읽은 글을 요약해서 써오는 숙제를 내주었다. OO이는 가방에서 영어로 타이핑해서 출력한 종이를 꺼냈다. 그리고 큰소리로 자랑스럽게 말했다.
세상의 모든 카지노 쿠폰들이 자신이 별이라고 생각하는 반딧불이기를 바란다. ‘개똥 무덤이 내 집이 아니라고 우기다가 체념하고 마는 외톨이 개똥벌레’가 아니라, 설사 내가 ‘벌레’ 라는 것을 알게 되어도 ‘괜찮아.나는 반짝반짝 빛나니까!!“ 라고 생각하는 그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