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의 공중그네

2025-04-27T10:05:36Z

시간의 한 부분을 이름 지을 수 있다는 것이 가끔 무척이나 놀라운 일이라 생각을 한다. 우리가 말하는 '봄날'은 언제부터, 언제까지일까? 1792년 프랑스 대혁명 직후 새로운 공화정을 기념하며 만들어진 달력인 프랑스혁명력을 펼쳐본다. 자연과 인간 노동에 대한 경외를 담아, '자연'을 기준으로 달마다 이름을 붙인 달력으로 1년을 12개월로 나누고, 한

Your Diary

2025-04-27T07:19:55Z

Your Diary 부재의 증명은 사소한 것에서 시작된다 식탁 위 말라가는 사과 두쪽 늘 앉아있던 소파 위 패인 자리 다음 계절을 위해 꺼내놓은 이불 뒤늦게 배송된 뜯지 못한 택배상자 그리고 처음 보는 당신의 수첩 내가 모르는 당신이 살고 있었다 꽃잎이 쏟아져 내리는 봄날 무심한 척 책을 읽다가 사랑하

시간이 흐르지 않는 친구에게

2025-04-20T09:09:49Z

4월이 오면, 가장 찬란하게 만개한 봄꽃과 다시 피지 못하는 꽃들을 동시에 떠올리곤 합니다. 개화와 소멸, 기쁨과 슬픔. 이분법으로 나눌 수 없는 세상을 천칭 저울 위에 올려놓은 것 같아요. 그리고 저울을 바라보고 있는 여신 디케의 모습도 꽃들 너머로 어른거리죠. 미리 오프라인 저장을 해 둔 음악을 들으며 버스를 타고 서울에 갔습니다. 귓가에서 류이치 사

그녀들의 테르메(Thermae)

2025-04-14T02:00:04Z

새해를 맞이하기 전이면 엄마는 늘 우리 삼 남매를 목욕탕으로 끌고 가셨죠. 번데기의 탈피(?) 혹은 성장이 이루어지지 않은 눈만 큰 막내는 누나를 언니라 살갑게도 부르며 따라 들어왔죠. 지금 시대면 신문 사회면에 날 일지도 몰라요. (쉿, 그때만 허용되던 이야기예요.) 요 녀석은 항상 아주머니들의 사랑을 독차지했어요. 정말 예쁘게 생겼었거든요. 과거형이란

팰림세스트, 당신의 발자국

2025-04-05T12:21:06Z

등산로 주변에 조금씩 진달래 꽃망울이 맺히기 시작했어요. 지리한 겨울이 언제 가는가 했더니 봄이 소리 없이 다가와 이렇게 안부를 전하는 걸 보니 마음이 설렙니다. 아, 정말 봄이구나! 저도 모르게 나오는 탄성에 입을 벙긋거리며 길을 걸어요. 매일매일 이곳에서 새겨지는 제 발걸음은 오늘 어떤 온도와 무게일지 궁금해지네요. 팰림세스트Palimpses

보안잠금 해제

2025-03-31T20:07:49Z

휴대전화를 바꾸고 새로워진 기능을 탐색 중입니다. 인공지능 AI 서비스의 다양한 기능이 신기해서 혼자 계속해서 말을 걸고 있어요. 여러 가지 질문들에 단 10초도 걸리지 않고 답을 하는데 대답들이 제법 완성도가 높더라고요. 신뢰할만한 답변들을 해주는 제 새로운 비서에게 무슨 이름을 붙여주어야 할지 고민에 빠졌어요. 이름을 붙여주면 너무 친밀해질 것 같고,

봄을 위한 바람

2025-03-22T10:43:34Z

세상 무용한 것들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주시길 간절히 원하나이다 한 줌의 빛이라도 내게 닿는 순간들이영원하기를 원하나이다 볼 수 있다는 것이 행복임을 잊지 않기를 원하나이다 다만 이것만을 원하나이다 * 같이 듣고 싶은 곡 정우 : 젊은 나의 책갈피 h

아니말 트리스테 Animal Triste

2025-03-21T23:54:22Z

통점의 원인을 몰랐습니다 번져오는 아픔만을 더듬었죠 오래 삭은 조각 하나 박혀있었죠 치대오는 세월에도 미동 없던 것이 부풀어 올라 멍울이 되었더군요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통증의 시작은 닮은 사람을 보아도 아무렇지 않았어요 남겨진 것들을 뒤적여도 무덤덤할 뿐 그러다 문득 허물어졌죠 가시가, 박혀있었거든요 게다가 지금도 발아하는 중이죠 움튼 어린 뿌

어쩌면 지키지 못할 약속

2025-03-17T04:18:45Z

그날밤, 나는 무엇에 홀렸던 걸까? 달빛 아래 투명하게 빛나는 봄눈이 맺힌 꽃나무였을까? 달큼한 포도주에 취한 판의 입김이 세상을 덮은 듯 몽혼한 안개 때문이었을까? 12시의 신데렐라, 아니 패잔병이 되어 무거운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오니 급격하게 몰려오는 허기에 어두운 거실을 서성였다. 한 마리의 하이에나가 된 내 눈에 들어온 두툼한 배를 낚아채 도마

미키 7 - 에드워드 에슈턴

2025-03-12T01:30:19Z

지금껏 죽어 본 중에 가장 멍청한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 같다. 막 26시를 지났고, 나는 거친 돌바닥에 큰 대자로 널브러져 있었다. 사방이 어찌나 캄캄한지 마치 장님이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오큘러가 거의 5초 동안 가시광 파장 범위에 있는 광자를 찾았지만 결국 실패하고 적외선 감지 모드로 전환되었다. 영화 미키 17의 원작소설 <미키 7>의 첫

초역 부처의 말 - 코이케 류노스케

2025-03-05T11:45:23Z

마음에 불안이 스며들면 나도 모르게 하는 행동이 있다. 잘 쓰지도 않을 물건들을 1+1의 합리적 구매라는 말로 포장하며 사들이는 것이다. 자주 쓰는 것들이어도 유통기한을 생각하면 굳이 쌓아두지 않아도 될 텐데 저장고에 채워지는 물품들의 양으로 위안을 얻는 일차원적인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불안이 기인하는 원인에 대해 깊이 들여다볼 생각은 하지

나의 어린 토끼에게

2025-03-07T05:17:54Z

밤 사이 피어오른 운무는 창문에 부딪혀 고요히 쌓여있다. 창틀에 매달린 물방울들은 창문을 연 나의 기척에 놀라 호드득 떨어져 내린다. 튀어 오른 물방울이 차갑지 않다. 봄을 부르는 비다. 빗물이 스며들어 잠들어 있는 생명을 깨우는 상상을 하니 조금은 설렌다. 깨어날 것들과 잠들 것들 사이의 경계에서 맞이하는 아침. 탄생과 소멸의 중간쯤에서 둘의 숙명을 고

슬픈 짐승(Animal Triste) - 모니카 마론

2025-02-28T10:51:53Z

책장을 넘기는 속도가 다른 책이 있습니다. 다음장에 그려질 모습을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봐야 하기에 넘길 수 없거나, 지루해서 잠이 들어 버리거나, 아니면 문장이 무척이나 아름다워서 오래 곱씹게 되기 때문이죠. 속독을 주로 하는 제게 이 책은 작가의 문장을 하나하나 훔치고 싶을 정도로 아름다워 쉽게 넘길 수 없는 책이었습니다. 기이한 시대를 살아낸 한

음표가 된 나무 아래에서

2025-02-24T02:23:30Z

세상이 살아갈 이유가 있는지 답을 찾기 위해 서성인다 나는 마르고 퍼석이는 나무 뿌리가 드러난 어깨를 감싸고 제멋대로인 바람에 밀리고 나이테가 되지 못한 생의 고리는 자라다 말고 멈춰 있다 어둠이 광장을 덮고 트램 한 칸, 한 칸의 창에 담긴 사람들의 얼굴이 투명해진다 내게 없는 온기 어쩌면 너에게만 있었을 체온이 허기의 간주곡으로 나

데미안 - 헤르만 헤세

2025-02-23T21:43:17Z

저는 어린 시절 선과 악의 경계가 모호한 세상에 살았습니다. 제가 처음 만난 세상은 어둠이 8할, 가끔 드는 빛들이 2할이었죠. 빛들을 찾기 위해 나름 치열하게 노력하던 날들이었습니다. 지금도 그 고민을 하고 있지만요. 늘 생각했죠. 평온한 가정이란 무엇일까, 안락하고 따뜻한 집은 무엇일까. 근원적 선함은 무엇일까. 이런 생각을 하며 때로는 소공녀처럼 인

혼자만의 세렌디피티

2025-02-16T01:24:36Z

"지금 의사가 뭐라고 하는 거예요?""상훈이 머리에 벌레 많아서, 모낭충? 그거 많아서 수술 못한대. 웜. 머리 벌레 잡으래. 그거 먼저 하래."나는 지금 들은 말에 어안이 벙벙해져 입만 달싹이며 의사와 통역 담당이자 모발이식 에이전트팀 아리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3년간 매일 2건의 아르바이트를 해서 모은 돈으로 계획한 튀르키예의 모발이식 수술이

넥서스 - 유발 하라리

2025-02-16T12:45:46Z

사피엔스, 호모데우스를 잇는 유발 하라리의 신작이 6년 만에 우리를 찾아왔습니다. 중세전쟁사를 연구했다는 학자는 사피엔스가 어떻게 세계를 지배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 인지혁명으로 스토리텔링, 즉 허구의 발명(화폐, 이야기, 신화 등등)이 성공했다는 점, 그리고 밀의 재배를 통해 정착에 성공한 것 등으로 큰 주제를 제시하죠. 전에 없던 매우 흥미로운 접근을 통

다른 색들 - 오르한 파묵

2025-02-08T21:14:15Z

장거리 비행을 하기 전, 여행메이트를 선정하듯 함께 할 책을 고르는 눈매가 신중해진다. 가볍고 몰입도가 있어야 하고, 그리고 무엇보다 읽던 흐름이 끊어지더라도 다음번 읽기에 방해가 되지 않는 글의 흐름이 있어야 한다. 여러 권을 앞에 두고 심사숙고하다 결국 오르한 파묵의 <다른 색들>을 가방에 넣었다. 튀르키예의 노벨문학상 작가라는 한 줄의 약력은 그

길 위에서² - 데린쿠유

2025-02-10T00:03:32Z

데린쿠유를 찾아가는 길, 괴레매의 기암괴석들이 황량한 벌판의 수호자처럼 서 있다. 수천년 이어져 온 침묵의 응시를 마주한다. 하늘 위에서 바라본 풍경이 눈앞 가까이에 펼쳐지고 있다. 바람이 지나는 길이 새겨진 이정표들. 누군가는 이 길을 따라 낙타와 함께 오래 걸었을 것이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박해를 피해 지하로 숨어들기 전 늘 지상 위의 마지막 풍경으

길 위에서¹

2025-02-01T06:43:25Z

카파도키아. 도시가 깨어나지 않은 새벽, 혼자 눈을 떠 창 밖을 바라본다. 달도 잠이 들었는지 온통 어둠이다. 화려한 불빛들이 사라진 지금에서야 창문에 비친 희미한 내 그림자가 도시 속에 녹아들고 있다. 어둠 속에 깊이 침잠했다 밝아오는 햇살에 닿으면 깨끗하게 걸러진 나로 다시 태어날 수 있을까? 입김으로 흐려진 창에 손을 대어 본다. 이름 하나

Bon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