흩어진 기억의 파편들

2025-04-29T11:32:05Z

바닥편지 꽃으로 왔던 시간들 모두 거두어 이만 돌아간다고 바닥 가득 써놓은 필체가 미려하군요. 겹치고 엇갈리며 써 내려간 문장들을 처음부터 읽고 끝에서부터 더듬어 읽고 흐트러질까 숨 참으며 다시 읽어봅니다. 연과 행을 이루는 글자들마다 홑잎으로 뛰던 심장이 두근두근 읽힙니다. 편지 한 장 쓰는데 삼일은 성급하고 한 오일은 정신 못 차렸겠고 또

흩어진 기억의 파편들 - 떠돌이 개 (2)

2025-04-26T08:52:57Z

얼키설키 서로 쑤시고 파고들면서 잘도 자라는 녀석들, 이 녀석들이 세상에 나온 지도 벌써 두 이래 째다 먹고 자고 먹고 자고, 가서 들여다볼 때마다 낑낑대지 않고 잠을 잘 잔다 잠을 잘 잔다는 것은 새끼들이 배가 부르다는 얘기다 그동안 떠돌이 생활을 하느라 배곯는 날 많았을 텐데, 강아지들이 이렇게 포도포동 발육 상태가 좋은 것을 보면 다행히도 어미가

흩어진 기억의 파편들

2025-04-15T11:22:18Z

새어머니 열두 살 어린 아내를 끔찍이도 사랑하셨던 아버지 내가 먼저 가 기다리고 있을 테니 이생의 삶 잘 살다 오라며 어머니 손 꼭 붙잡고 운명하셨다 아버지 떠나신 지 서른여섯 해, 어머니는 백수白壽를 치르시고도 여전히 건강하시다 한식을 맞아 찾아 간 아버지 묘똥 앞에 갓 시집온 듯 수줍게 피어있는 할미꽃 세 송이 이승에 두고 온 아내 기다리다

흩어진 기억의 파편들 - 떠돌이 개 (1)

2025-04-17T15:39:32Z

두 달 전인가? 아직 추위가 기승을 부리던 어느 날 우리 집 뒷산 묘똥 옆에 낯선 개 두 마리가 나타났다 어떤 몹쓸 사람이 집에서 기르다가 갖다 버린 모양새다. 두 마리 개는 밤이면 키 작은 바위 밑에서 밤을 보내고 아침이면 도시로 내려가 쓰레기봉지라도 뒤져 허기를 채우는지, 해거름녁이 되면 어김없이 묘똥 옆으로 돌아와 천지사방을 바라보며 컹컹 짖어

흩어진 기억의 파편들 - 해산

2025-04-01T01:31:01Z

천기 서린 물 밤새 마신 산모 배가 만삭이다 풍부한 미네랄로 퉁퉁 불은 젖가슴 드디어 산기가 보인다 구구국 구구국 진통을 알리는 멧비둘기 소리 조금씩 자궁문이 열리고 앞 다투어 머리를 내미는 뭇 생명들 무녀리 꽃다지 닫힌 문여느라 어찌나 힘썼는지 납짝하니 엎드려 가냘프게 숨 고르고 잎눈 제치고 꽃눈 먼저 내민 성급한 산수유 제대로 영양섭취 못한 탓에 황달

꽃들의 본능

2025-04-04T14:01:35Z

수목원 연못가, 산수유 꽃이 만개했다 한 생의 소멸을 딛고 또 하나의 탄생이 둥지를 틀었다 지난봄이 붉은 주검이 되어 매달려 있는 그 틈새의 어두운 산도를 힘겹게 빠져나온 생명들이 양수에 젖은 머리칼을 봄볕에 말리고 있다 생과 생이 교차되는 어둠 속에서 모진 순환의 고리 용케도 움켜쥐고 나와 가쁜 숨 토해내고 있는 여린 생명들, 젖자리 다투는 다산

흩어진 기억의 파편들 - 게으른 자연인

2025-03-19T08:04:41Z

벌써 몇 년째 누군가 짓다가 버려둔 폐가 한 채 올 들어서, 떠돌이 자연인이 하나가 찾아와 몇 번 드나들더니 자리가 맘에 들었던지 다시 수리를 하기 시작했다 처음 며칠은 나뭇가지를 들고 이리저리 맞추며 꽤나 열심인 듯하더니 요즘은 어쩌다 띄엄띄엄 들러 잠시 머물다 갈 뿐 도대체 진척이 없다 가끔 들러 나뭇가지를 들고 용을 쓰는 걸 보면 포기는

흩어진 기억의 파편들 - 돌쩌귀

2025-03-24T13:23:06Z

제주고씨 댁에서 보내온 돌쩌귀가 여주이 씨 문설주에 박히던 순간 둘은 처음부터 삐걱거렸다 덜 다듬어진 수짝은 성품이 거칠어 암짝의 좁은 속내 다독이지 못한 채 벌컥벌컥 밀어붙였다 서로를 열고 닫을 때마다 비명 같은 입 속의 말들이 문 밖으로 새어 나왔다 처음부터, 굳지 않고 붙지 않아도 붙어있을 수 있는 관계였지만 길은 쉽게 들지 않았다 물 한 모금

흩어진 기억의 파편들 - 또 한 계절과의 이별을 고하며

2025-03-08T21:47:42Z

먹고사는 게 버거워 한여름에도 마음이 추운 사람들에게 겨울은 결코 반갑지 않은 계절이다. 난방비에 치솟는 물가에 그러잖아도 허리띠를 조이고 어깨를 움츠리고 사는데, 거기다가 계절풍까지 더해져 저지대 인생들의 삶은 두 배의 고달픔을 느끼게 한다. 사계절 중에서도 유독 겨울은 우리 곁에 오래 머무는 느낌이다. 좋은 것들은 더디게 왔다가 빨리 사라지고 괴롭고 불

흩어진 기억의 파편들

2025-02-24T13:16:10Z

영원한 老兵 낙동강 다부동지구 369 고지 마지막 보루, 적군이 던진 수류탄에 밤안개가 붉게 물들었다 하셨지요. 저승사자처럼 졸음은 쏟아지고 ‘자면 죽는다, 정신들 차려라’ 외치고 다니셨다 하셨지요. 나뭇잎에 내린 이슬 훑어 사나흘 주린 허기를 채우며 그렇게 삶과 죽음 앞에서 조국의 편을 드셨던 당신, 그때 후두부에 박힌 다섯 개의 파편을 끝

흩어진 기억의 파편들 - "닭대가리" 에게 배우는 소혜小慧

2025-02-20T10:58:56Z

혹자는, 머리가 안 좋은 사람을 일컬어 속되 말로 '닭대가리'라고 부른다. 그러나 실제로 닭은, 닭대가리라는 멸칭과 다르게 매우 지능이 높은 동물로 평가되고 있다. 하물며 닭은 숫자의 개념을 지니고 있어서 갓 태어난 병아리도 양의 차이를 분별할 수 있으며 간단한 연산도 가능할 정도로 머리가 좋다고 한다. 또한 자기 인지 기능력이 있으며 두려움, 기대, 분

날마다 솟는 샘물 - 개와 늑대의 시간

2025-02-16T12:04:40Z

날이 어둑해졌지만 그렇다고 아직 밤은 아니다. 낮이라고 하기엔 주위가 너무 흐릿하고 밤이라고 하기엔 시계視界가 열려있다. 이맘때가 되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가슴이 운다. 곁에 있을 사람은 이미 다 곁에 있는데, 내가 모르는 어떤 그리운 이가 또 있어 저 길을 따라 찾아와 줄 것만 같아 모딜리아니 그림 속 여인처럼 목 길게 늘여 자꾸만 밖을 내다

날마다 솟는 샘물 - 아홉 가지나물

2025-02-14T03:20:21Z

지금 이곳엔 또 눈이 펄펄 내리고 있습니다. 올해는 유난히 눈이 자주 내려서 계절의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었던 겨울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쉽게 물러나지 않는 겨울, 마치 기차가 스위치백 구간을 지나가듯 계절도 방향을 틀 땐 심한 내적, 외적 몸부림을 쳐야 하나 봅니다. 음력으로 정월 대보름, 오곡밥에 아홉 가지나물을 먹는 날입니다. 이번

흩어진 기억의 파편들 - 계절보다 세월을 한 발 앞서 걷는 농부들

2025-02-11T12:03:36Z

입춘이 지나도 찬바람은 여전히 기승을 부리는데 계절은 또 다른 계절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와 슬그머니 제자리를 찾는다. 체감적으로 느껴지는 봄기운은 아직 멀리 있는 듯한데, 입춘이 지나고 나면 아버지는 텃밭 가에다 둥그런 활대를 꽂고 커다란 비닐하우스를 한 동 지으셨다. 하루종일 바람과 싸우며 붙잡고, 누루고, 당기면서 어렵게 하우스 짓는 작업을 마치면,

날마다 솟는 샘물 - 계절과 계절의 전쟁

2025-02-08T22:16:20Z

날카로운 얼음칼을 겹겹이 허리에 두르고 야음 타고 쳐들어온 동장군, 위력이 대단하다 사람도 자동차도 온실 속 나무와 꽃들도 모두 벌벌 떨고 있다 동장군이 이끄는 한랭부대는 변신술의 귀재여서 아무리 문을 꽁꽁 걸어 잠가도 낮은 포복으로 기어들어 와 창문이며 문들의 틈새를 공격했다 난로의 기온을 높여 방어해 보았지만 밤샘 공격에 아군들이 또 속수무

날마다 솟는 샘물 - 며느리 사랑은 시아버지

2025-02-09T11:41:48Z

천둥벌거숭이 같은 며느리 엄동설한에도 맨발로 다닌다고 시아버지 걱정근심 반반 섞어 한마디 하셨다 "까치가 맨발로 다닌다고 오뉴월인 줄 아냐" 버스 타고 전철 타고 또 버스 타고, 외출에서 돌아오신 시아버지가 건네주신 까만 봉다리 하나 받아 들고 열어보니 자주 빛 고운 털신 한 켤레 말갛게 웃고 있었다 시어머님 돌아가시고, 막내인 우리 부부가 시

흩어진 기억의 파편들 - 날 저물면 더욱 그리워지는 사람들

2025-02-05T00:09:10Z

낮동안에는 마법에 걸린 사람처럼 바쁘게 돌아치다가 날 어둑해서야 겨우 한가한 몸이 되었다. 울컥, 한낮 동안엔 잠잠하던 대상도 알 수 없는 그리움이 또 가슴에 뻐근한 통증을 일으킨다. 이럴 때 꿈처럼 그리운 이가 내 앞에 딱 나타나 주면 얼마나 좋을까! 초등학교도 들어가지 않았던 어린 시절, 여섯 살 위의 오빠가 외갓집이 있는 동네로 물고기를 잡으러 가

날마다 솟는 샘물 - 폭설

2025-02-03T05:43:42Z

흐린 하늘 어디쯤에 제지공장 있는 것일까 윙윙 추위가 베어링을 돌리며 뽑아낸 흰 종이들이 바닥과 능선을 가리지 않고 겹겹이 쌓여있다. 이른 꽃눈을 덮고 있는 나뭇가지들과 시린 발자국들을 필사해 내는 순백의 지면에 폴짝폴짝 총총총, 가볍게 때로는 묵직하게 온갖 날개와 꼬리들이 찍고 누른 간서刊書는 흘림체기법이어서 읽기도 전에 땅속으로 스며들거나 아이들

날마다 솟는 샘물 - 까치설

2025-01-30T06:48:36Z

"까치까치설날은 어저께고요 우리 우리 설날은 오늘이래요" 우리가 부르는 까치설 동요의 어원은 '작은설'이라는 뜻을 가진 '아찬설, 아치설'이라 불리던 말들이 세월이 흐르며 '까치 설'로 변했다고 한다..이 설說대로라면 까치설은 동물 까치와는 큰 관계가 없게 된다. 아찬설을 주장한 이는 무속·민속 연구 권위자였던 고(故) 서정범, 전 경희대 국어국문학과 교

흩어진 기억의 파편들 - 아버지와 고등어

2025-02-05T06:32:24Z

가을걷이 끝내고 오일장에 나가셨던 아버지 환하게 목 빼고 기다릴 식구들 눈에 아른거려 짭조름한 간고등어 한 손 지게다리에 매달고 장터 국밥집 들리셨다는데 반주로 마시던 막걸리가 해 저물도록 붙잡고 놓아주질 않았던 걸까 막차 타듯 어둑해서야 귀가하셨다 이리 휘청 저리 비틀 돌부리에 차이고 나뭇가지에 걸리며 고갯마루 넘어오실 때 잠시 쉬었다 가라고

수우미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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흩어진 기억의 파편들 - 떠돌이 개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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흩어진 기억의 파편들 - 게으른 자연인

흩어진 기억의 파편들 - 돌쩌귀

흩어진 기억의 파편들 - 또 한 계절과의 이별을 고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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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솟는 샘물 - 개와 늑대의 시간

날마다 솟는 샘물 - 아홉 가지나물

흩어진 기억의 파편들 - 계절보다 세월을 한 발 앞서 걷는 농부들

날마다 솟는 샘물 - 계절과 계절의 전쟁

날마다 솟는 샘물 - 며느리 사랑은 시아버지

흩어진 기억의 파편들 - 날 저물면 더욱 그리워지는 사람들

날마다 솟는 샘물 - 폭설

날마다 솟는 샘물 - 까치설

흩어진 기억의 파편들 - 아버지와 고등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