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장에 오를 그대에게. - 방향 없는 속도, 목적 없는 진동

2025-05-01T10:34:51Z

처음 자전거 페달을 밟는 그 어색한 순간처럼, 나는 늘 글쓰기의 첫 문장을 망설인다. 한 단어, 한 구절을 꺼내는 일이 이토록 버거운 일일 줄은 몰랐다. 사람들은 글을 쓰는 이가 마치 자기 생각을 꺼내 나열하고 다듬는 과정을 자연스럽게 해낼 거라 믿는다. 마치 숨 쉬듯, 혹은 말을 하듯. 그러나 나는 안다. 글쓰기는 늘 처음 같다. 자전거 안장을 오랜만에

검은 잇몸 아래 물고기가 자란다 - 사물에서 멀어지는 시

2025-05-01T03:47:02Z

수요일은 잇몸을 잃는다. 피는 거품처럼 끓고, 거품 속에서 작은 물고기들이 태어난다. 정강이는 수조가 되고, 수조에는 구름이 떠 있다, 구름에는 지느러미가 달려 있다, 나는 고개를 젖히다, 목구멍으로 미끄러진다. 밤은 물컹하게 열렸다, 욕설이 칼날이 되어 떠다니고, 여자는 입을 벌려 칼을 삼켰고, 사내는

프롤로그 - 에필로그를 놓칠 때마다

2025-05-01T00:54:28Z

궤(櫃) 글은 서랍이다. 아니, 좀 더 단단한 말로 바꾸자면 궤(櫃)다. 열쇠 없이도 열리고, 닫히면 수십 년을 침묵하는 오래된 나무 궤짝. 글 쓰는 일은 그 궤를 하나씩 열어보는 작업이다. 문득 한 줄기 냄새가 올라온다. 낡은 종이 냄새, 한때 누구의 것이었을 무언가의 체온, 어두운 틈새에 숨겨둔 마음의 조각들. 누군가는 그것을 일기라고 부르고, 누군가

봄날. 자세를 낮추고 - 들꽃들을 찍는 방식

2025-04-29T09:17:48Z

기억은 종종 내게 거짓말을 했다. 봄이 오면 늘 거짓 기억을 믿었다. 마치 오래전에, 아주 오래전에, 나는 저 가느다란 연둣빛 풀잎처럼 빛나던 적이 있었던 것처럼. 어린 날의 봄은 언제나 반짝거렸던 것처럼. 그러나 실은 그렇지 않았다. 봄은 언제나 축축하고, 지저분하고, 손끝에 먼지가 묻어났다. 봄날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나를 의아

꽃처럼. - 계절은 꽃의 운명을 닮아있다.

2025-04-28T10:46:59Z

흙이 조금 더 말랑해졌다는 걸 발바닥으로 느낄 수 있다. 땅속 어딘가에서 뭔가가 일어났다는 걸 짐작하게 만드는, 낮은 진동 같은 것이 있다. 나는 그 진동을 처음 느낀 날 아침, 평소보다 두어 번 더 눈을 깜빡였다. 특별한 사건이 일어난 것도 아닌데, 세상이 어딘가에서 아주 미세하게 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피어난다. 대지는 아무 말이 없다

가득한 빈방으로 - 사물에서 멀어지는 시

2025-04-28T03:54:21Z

반딧불이를 가득 가두었다. 창문을 열자, 빛이 밀려들었다. 커튼을 치자, 방은 숨을 죽였다. 나는 기다렸다. 방이 빛으로 젖을 때까지. 처음엔 초대라 믿었다. 하지만 그것은 방의 마지막 부탁이었다. 숨겨줘. 잊게 해 줘. 방은 조용히 변했다. 나는 청소하지 않았다. 빛과 먼지 위로 발을 옮겼다. 방은 내 흔적을

프롤로그 - 불을 켜본 적이 없는 성냥에 관하여

2025-04-26T07:27:29Z

성냥을 수집했다. 성냥이라는 물건 자체보다, 그것이 담긴 종이 상자의 디자인에 마음이 끌렸다. 모서리가 닳아 있는 극장의 광고 성냥, 지금은 없어진 다방의 전화번호가 적힌 것, 빛바랜 호텔의 로고. 어떤 성냥은 처음부터 불을 낼 생각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너무 얇거나, 눅눅하거나, 아니면 불이 붙자마자 바싹 끊어지는 것들. 그런 성냥들을 좋아했다. 불을

봄날의 비밀결사대 #2 - 크루를 모집합니다.

2025-04-26T23:50:16Z

기억나는 건 납치범의 손이었다. 희한하게도 나는 그녀의 얼굴은 기억나지 않는데, 손은 또렷하다. 작고 마른 손, 관절이 도드라지고, 손톱 아래 하얀 반달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 손이 내 손목을 감싸 안았을 때, 나는 저항하지 않았다. 이유는 하나다. 그 손이 너무 따뜻했기 때문이다. 살면서 몇 번이나 누군가의 온기를 확신한 적이 있었던

봄날의 비밀결사대 - 그럴 자격이 충분하다.

2025-04-26T00:28:16Z

우리는 종종 사라지고 싶어 한다. 어디론가 납치되듯이 사라져서,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잠시 이 일상을 떠나고 싶어진다. 그렇다고 정말로 납치되고 싶은 건 아니다. 다만 그 감각이 주는 서스펜스와 해방의 교차지점. 그게 필요하다. 피로가 축적된 일상에는 그런 약간의 판타지가 허용되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지금, 봄날의 비밀결사대를 조직 중이다. 명칭

인간의 불문율 - 어디 있든지 그대...

2025-04-27T10:05:14Z

검색창을 바라봅니다. 오늘은 세계펭귄의 날입니다. 아델리펭귄은 바다가 얼어붙는 4월쯤에 북쪽으로 이동한다. 정확한 경로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주로 4월 25일쯤 맥머도 기지 앞을 지나가 이날이 기념일이 됐다. 언젠가 다큐를 통해 본 펭귄들의 이동 경로는 험난하고 그리하여 장엄했다. 그 다큐멘터리에서 다큐멘터리를 찍는 촬영팀은 펭귄으로선 가파른 얼음산

목련의 지도 - 일탈보다 납치

2025-04-24T15:01:47Z

누가 나를 납치해줬으면 했다. 오늘 하루만. 진심으로, 짧게라도. 물론, 이건 농담이다. 하지만 사람은 때로 농담으로밖에 말할 수 없는 진실을 가질 때가 있다. 이를테면 “회사에 가기 싫다”는 말보다 “납치라도 되었으면 좋겠다”는 말이 더 정확한 어떤 감정. 그것은 피로보다 깊고, 혐오보다는 더 무기력한 감정이다. 그리고 그것은 대개 봄에, 정확히 이런

모델하우스 - 사물에서 멀어지는 시

2025-04-24T12:50:42Z

-모형의 외부- 버스정류장 앞 고물상은 헐값에 철거되었다 녹슨 드럼통들 사이 전선은 녹아 흘렀고 부러진 리어카 프레임은 고래의 갈비뼈처럼 남았다 형광등은 오래전 꺼졌지만 센서등은 사람 없는 방에 자주 켜졌고 세면대엔 치약 자국도, 물기도 없었다 이 집은 깨끗해서 이상했다 창문은 연봉에 맞춘 투시도

여름이 가방을 현관앞에 내려두고 - 머리카락의 빗물을 흘리며

2025-04-23T12:52:06Z

비는 언제나 설명이 불가능한 정서를 데려온다. 봄비라면 더더욱 그렇다. 이 비는 여름의 예고장이면서, 겨울의 해지를 알리는 고요한 장례식이다. 창문 너머로 그저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를 듣겠지만, 봄비는 그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드러낸다. 계절 사이에서 방황하는 마음의 속삭임, 감각의 전환점이자 감정의 흔들림이다. 그날 아침, 정수리에 떨어지는 빗방울

늦봄의 비 - 여름을 지그시 누르고

2025-04-22T09:33:21Z

늦봄, 아직 벚꽃이 지고 나서도 한동안 꽃잎이 길바닥을 덮을 듯이 내린다. 공기 속에 남아있는 꽃의 향기를 뒤로 하고, 세상이 녹아내리는 초록의 물결로 들어가면, 비가 내린다. 여느 봄비와는 다르게, 차갑지 않다. 바람에 실려 와도 그 물방울들은 곧 풀잎 위에 떨어져 서서히 죽는다. 그 물방울들이, 마치 스노우볼 속에서 내리는 눈처럼, 고요하고 평화롭다.

봄. 사라지지 않고 - 끝이 날카롭게 어딘가 있다.

2025-04-21T03:26:20Z

기차는 느리게 역을 빠져나왔다. 흔들리는 차창에 얼굴을 기대고 있으면, 겨울의 끝자락에서 한 걸음씩 밀려드는 봄의 기척이 느껴진다. 민들레 씨처럼 부드럽고도 어딘가 불안한, 그런 기척. 자주 그 느낌을 잊고 살았다. 일상에 깔려 있는 날짜들, 체증처럼 쌓인 해야 할 일들, 그리고 늦은 밤 창문에 비친 얼굴. 그런 것들이 내 안의 감각들을 무디게 했다.

물아래 심장 하나 - 사물에서 멀어지는 시

2025-04-21T00:28:25Z

# 노을지네 땅끝. 날이 젖는다. 작두 위에 누운 태양이 느릿하게 숨을 헐떡인다. 칼날은 빛을 낳고 빛은 피를 낳는다. 나는 뒤꿈치를 꺾은 채로 한 걸음, 한 걸음을 끝끝내 바닥으로 내디딘다. 뒤꿈치가 찢어지는 걸 알면서도 피는 조용히 번진다, 천을 적시듯이. 햇살은 튄다. 환하게, 무섭게. 비산 된 빛의 파편이 내 얼굴을 긁는다. 숨을

목련의 입장 - 그녀의 귀밑머리.

2025-04-20T11:35:14Z

대도시에선 비가 내릴 때, 유리창이 아니라 기억의 표면에 물방울이 맺힌다. 내 방은 오래된 주택가의 3층에 있고, 마치 잊힌 장소처럼 조용하다. 기차 소리가 멀리서 들려오고, 모서리가 무너진 벽을 타고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천천히 방 안으로 들어온다. 그런 날이면, 문득 그녀를 떠올린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의 귀밑머리, 비에 젖은 그것을. 그녀는

화석 물고기. - 그 봄. 꼬리지느러미가 움직였다.

2025-04-19T05:59:29Z

아직 늦봄이라고 부르기엔 머쓱한 공기가, 창밖에서부터 천천히 방 안으로 스며들었다. 바람은 얇은 커튼을 들어 올리며 무언가 오래된 것을 만지듯 부드럽게 지나갔다. 봄은 시작되었지만 봄 같지 않았다. 벚꽃은 피었고, 매화는 졌으며, 라일락의 향기는 아스라이 공중을 떠다니고 있었지만, 나는 여전히 겨울의 그림자 안에 있었다. 체온을 잃은 오후, 그 애매한 기온

무중력 산책 - 사물에서 멀어지는 시

2025-04-19T12:33:05Z

서문 물리의 법칙으로 설명되지 않는 순간들이 있다. 중력이 잠시 풀린 듯한 공기의 틈, 존재가 가볍고 투명해지는 어떤 정적. 그 틈을 ‘산책’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어떤 목적도 없이, 확실한 감각으로 걷는 일. 이 시집은 그런 산책 속에서 채집한 무중력의 조각들이다. 구석에 등을 기대고 선 반쯤 쓰러진 의자, 그 위에 조심스레 몸을 맡

봄날의 암호문 - 사라지는 꽃잎을 핥는 고양이

2025-04-18T04:42:35Z

어느새 현관 앞에 낯선 빛깔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분명 말라 있었던 신발 밑창이 축축이 젖어 있었고, 그 아래엔 벚꽃 잎들이 조용히 누워 있었다. 비에 젖은 꽃잎들은 바닥에 납작하게 눌려, 종이처럼 얇아지고 밟힌 만큼 투명해져 있었다. 색은 분홍이라기엔 너무 흐렸고, 흰색이라기엔 어디선가 물든 자국이 스며 있었다. 그 애매한 색감은 오히려 더 진하고, 더

적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