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큰 의미가 될 거야 - 마음 깊은 곳의 작은 성가

2025-04-28T11:55:09Z

가톨릭재단 고등학교에 다녔다. 지원하지 않았지만 무작위로 선정되어 학교에 첫발을 디뎠다. 일명 뺑뺑이. 9시, 1교시 수업을 시작할 땐 종소리 대신 성가가 흘러나왔다. 그러면 모든 학생들이 일어나 선생님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그게 하루의 시작이었다. 그때 들었던 성가. 잊은 줄 알았다. 그런데 유튜브 실시간으로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장례미사를 보다가불

아껴둔 기분을 꺼내볼까 - 샐러드처럼 상큼했던 날

2025-04-27T16:24:34Z

그날의 샐러드는 참 화려했다. 화이트 발사믹에 트러플 오일이 살짝바질 페스토가 입안에 퍼지는데그 향기만으로도 이국에 있는 느낌이었다. 예쁜 접시 위에알록달록 채소가 담겨 있고누군가 일부러 고른 듯한 색의 조화하나도 버릴 게 없는 구성이었다. 그날의 나도 그랬다. 밖을 향해 열려 있는 마음 단정한 옷차림 서두르지 않는 말투도 조화로웠다(고

이렇게나 가깝고도 멀다니 - 선전마을과 별다방

2025-04-26T05:30:45Z

철쭉이 가득 핀 길을 따라봄바람을 타고 드라이브를 했다. 북한 선전마을이 바라보이는 곳에별다방이 새로 생겼다고 해서. 선전마을과 별다방, 서로 말도 섞지 못하는 두 세계가 봄바람 한 줄기에 나란히 안겨 있는 장면이라니 어쩐지 묘했다. 장소는 애기봉평화생태공원. 해병대가 관리하는 지역이라신분증 확인도 철저했다. 그 절차부터 새로워서허락되지 않은

우리동네 브로콜리 산 - 웃긴 듯 귀엽고, 귀여운 듯 뭉클한

2025-04-25T11:19:05Z

요즘 우리 동네 산들이 귀엽다. 크고 웅장한 산은 아니다. 어깨도 낮고 성격도 온순한, 사람 같으면 “나 그냥 산책이나 좋아해요~”라고 말할 것 같은 야트막한 산들이다. 그런데 봄이 무르익으면서 그 산들 위에 나무들이 잎을 내밀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봉긋봉긋 초록 머리들이 가득 올라왔다. 멀리서 보니 산 전체가 마치 브로콜리처럼 몽글몽

달콤한 낮잠 - 뒹굴거리며 철학하는 중

2025-04-25T03:27:43Z

운전을 하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 몸이 땅속으로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하루를 살아낸 에너지가 마지막 신호등에서 거의 꺼진 듯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몸을 눕혔다. 아니, 눕힌 게 아니라 침대가 나를 끌어당겼다. 침대 위에 곰팡이처럼 피어 아무 말 없이, 깊은 잠에 빠졌다. 의식의 손잡이를 놓치고 시간의 이음매도 잊은 채 낮잠이라는 동굴

괜찮다고 말하면서도 - 4화) Madison Keys, 그리고 나의 회복 노트

2025-04-26T10:17:18Z

한때 누군가가 말했습니다.“넌 괜찮아 보여.”그리고 나는, 정말로 괜찮지 않았음에도고개를 끄덕였습니다.“응, 괜찮아.” 그 말은 마치 주문 같아서나조차 그 말을 믿으려 애썼습니다.괜찮아야만 할 것 같았고,누군가에게 약해 보이는 게 싫었습니다. 무너지는 모습은 혼자 있을 때만 허락했고,아무 일 없다는 듯 다시 몸을 움직이고, 수업을 준비하고

타락죽을 아시나요? - 하얀 죽 한 그릇에 담긴 마음

2025-04-25T12:13:56Z

오늘은 타락죽을 끓였다.타락은 우유의 옛말.우유가 귀하던 시절,타락죽은 조선시대 궁중에서정성과 마음이 깃든 보양식으로 여겨졌다. 흰쌀죽에 우유를 넣고,약한 불에서 천천히, 숨죽여 끓여낸다.우유는 고소함을 더하고,멍울이 지지 않도록조용히, 계속 저어야 한다.그 과정에서 마음도뽀얗게 차분해지는 느낌이 든다. 나는 종종 이 죽을 아침에 끓인

감정 초과근무 중인 나의 하루 - 요즘 브런치로 출근해서, 브런치로 퇴근합니다

2025-04-25T10:38:36Z

아침 8시 반, 아이들이 학교에 가고 나면나는 거실 조명을 끄고,책상 스탠드를 켠다. 출근 완료. 모두가 자신이 있을 곳을 찾아간 후 혼자 있는 이 기분은 뭐라 말로 할 수 없이 홀, 홀, 홀가분하다. 고요하고, 마음은 가볍다. 내가 다니는 브런치라는 사무실에는 사원증도 없고 동료도 없고부장님도 없지만감정의 출입은 굉장히 자유롭다. 이곳은

계속하세요, 당신은 나의 이어쓰기니까 - 에필로그 - 로테 버크의 마지막 큐잉

2025-04-25T03:27:28Z

당신이 이 글을 읽고 있다면,나는 이제 거울 앞에 서 있지 않을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괜찮아요. 이 바레는혼자 남아도 계속될 수 있게 만든 메소드니까. 당신은 이 바레를마치 무언가의 정답처럼 배우지 않아도 돼요. 그보다는 거울 앞에서의 하루를 당신 안에 담아가길 바라요. 나는 바레를 통해몸을 단련했다기보다는나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오늘은 어떤 기분

움직임은 전해지고 있다 - 블랙스완과 바레

2025-04-26T21:29:10Z

어느 날 문득,거리에서 낯선 여자의 걸음을 보았다. 그녀는 아주 미세하게,그러나 분명하게엉덩이를 조이고 있었다. 내가 만든 그 동작.척추가 무너지지 않도록골반으로 중심을 잡는,그 익숙한 모습. 그 여자는 아는 사람이 아니었다.하지만 그녀의 움직임은 나의 것이었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내가 멈춰도수업이 끝나도스튜디오가 닫혀도 움직임은

혼자 남은 스튜디오에서 - 나만의 거룩한 반복

2025-04-21T08:40:40Z

딸이 떠난 이후, 스튜디오는 더 조용해졌다. 그전에도 조용했지만그날 이후의 고요는어떤 여운이 남아 있는 듯한 조용함이었다. 마치 방금 전까지 누가 있었던 자리,찻잔의 따뜻함이 아직 식지 않은 그 감각. 나는 매일 같은 시간에 문을 열었다. 수업이 없는 날에도,회원이 아무도 오지 않는 날에도. 그리고 혼자,내 바레를 시작했다. 나는 어떤 동작들을 반복했을까

그녀가 떠난 날 - 나는 울지 않았다

2025-04-21T08:45:48Z

그 아이는 말 없이 떠났다.늘 그랬듯 조용하게,늘 그랬듯 자기 리듬으로. 나는 그날 티컵을 내려놓고거울만 바라봤다.그리고 처음으로,내 수업에내 그림자가 비치지 않는 느낌을 받았다. 그녀는 나의 딸이었다.하지만 바레를 시작한 이후부터는나의 수련생이었고,어느 날부터는나의 질문이었다.그리고 더 나중엔, 내 대답이었다. 나는 그녀에게“이 운동을 이어가라”고 한

누구보다 약한 몸에서 탄생한 메소드 - 마흔 여섯, 여든 그리고 지금까지 끝나지 않은 이야기

2025-04-26T21:25:36Z

사람들은 종종내가 강한 사람일 거라고 생각한다. 무용수였고 운동을 만들었고,여성들의 몸을 다뤘으니 그럴 법하다. 하지만 진실은 그 반대였다.나는 누구보다 약한 몸을 가졌던 사람이었다.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몸보다 감정이 약했던 사람이었다. 허리를 다친 건사고였다.예고된 것도, 각오한 것도 아니었다.그저 어느 날,내 몸이 나를 배신했고

몸은 나의 안식처였다 - 존재를 회복하는 새로운 언어

2025-04-26T21:24:43Z

허리를 다치기 전까지만 해도나는 늘 ‘움직이는 사람’이었다. 공연이 있는 날이면,몸이 먼저 무대에 도착해 있었고음악이 나오기 전에심장이 먼저 박자를 쪼갰다. 그건 내가 살아 있는 방식이었다. 무용수라는 타이틀이 아니라그저 내가 나로 있기 위한 조건. 그런 내가 움직일 수 없게 되었을 때나는 사라지는 기분을 느꼈다. 거울을 봐도 내 몸 같지

회복은 언제나, 고백에서 시작된다 - 통증을 바라보는 법

2025-04-26T21:23:07Z

빨간 머리의 그녀는 처음 수업에 왔을 때“허리가 아파요”라고 말하지 않았다. 대신 움직이지 않았다.어깨를 움츠리고,골반은 조금 비틀린 채,호흡을 얕게 쉬면서 거울 앞에 섰다. 나는 그녀가아픈 게 아니라,아프다고 말하는 법을 모른다는 걸그제야 알게 되었다. 통증에는 언어가 없다.정확히는,대부분의 통증은 몸으로만 표현되고,말로는 어설프게

수강생이 남긴 메모 한 장 - 작고 단단한 고백 하나

2025-04-26T21:21:21Z

"아름다움은 ‘이 몸은 나의 것이다’라는가장 강한 자기 인식에서 시작된다." 그 문장을 수업 노트 첫 장에 적어둔 이후,오늘 같은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수업이 끝난 뒤, 항상 먼저 나가는 사람과끝까지 거울 앞에 서 있는 사람이 있다. 그날,나는 스튜디오를 정리하다마룻바닥에 조용히 접혀 있는 종이 한 장을 발견했다.A4용

스스로에게 몸을 허락하라 - 바레가 가르쳐준 회복의 선언

2025-04-26T21:19:35Z

여성의 몸이운동의 대상이 되기 전에통제의 대상이었다는 걸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조심스러워야 했고,단정해야 했고,어느 위치에 어떻게 있어야 할지를끊임없이 타인의 시선 안에서 배워야 했다. 무대 위에서도 마찬가지였다.움직이되, 아름답게.피로해도, 우아하게.아파도, 미소를 잃지 않게. 여성의 몸은 기능보다 태도로

고요한 반항 - 거울 앞에서 시작된 나의 혁명

2025-04-26T08:16:07Z

나는 소리 지르지 않았다.어떤 선언도 하지 않았다.운동을 만든다는 말조차 꺼내지 않았다. 그저,내 몸을 조용히 움직였을 뿐이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그 움직임 하나하나가그 시대가 여성에게 기대했던모든 태도와 침묵을 거스르고 있다는 것을. 여성의 몸은 언제나보기 좋게 있어야 했고다치지 않게 움직여야 했고무례하지 않게 앉아 있어야 했다. 그런 시절에

골반, 감정의 창고 - 입술 대신 엉덩이로 말한다면

2025-04-26T08:11:57Z

어느 순간부터 나는 알게 되었다. 몸이 말하고 있다는 것을. 어깨는 두려움을등은 책임을손은 망설임을 말했다. 그리고 골반그건 거의 언제나말하지 않은 것들의 보관소였다. 여성의 골반은단순한 관절의 기능 그 이상이다. 그건 감정을 축적하고기억하고숨기고마침내 어느 날 꺼내게 만드는아주 오래된 창고다. 그래서 내 수업에서 가장 먼저 다루는 곳은 늘 골반이었다

나의 딸, 에스더 - 나와 같고 또 나와 다른

2025-04-26T21:15:27Z

나는 에스더를 가르친 적이 없다.적어도, 공식적으로는 그렇다.그 아이는 스스로 배운 아이였다.언제나 내 수업 뒷줄에서소리 없이 서 있었고,항상 같은 타이즈에, 같은 머리 모양으로거울 앞에 있었다. 나는 모성에 능숙한 사람이 아니었다.무대를 떠난 뒤,가정이라는 새로운 무대는그 어떤 조명보다 낯설고그 어떤 박수보다 고요했다. 아이가 자라면서

소피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