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둥지 식구

2025-04-28T01:15:10Z

집 안에 있기 아까운 계절이다. 갓 돋아난 여린 잎사귀와 꽃잎은 햇살 속에 눈부시게 빛나고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게 딱 적당한 온도로 불어오는 바람은 연인의 손길처럼 보드랍다. 한 발 한 발 부단히 걸음을 옮기다 보면 경직되었던 몸이 이완되고 지끈거렸던 머리가 맑아진다. 산책하는 횟수가 늘어나면서 유난히 눈에 들어오는 친구들이 있다. 복실복실한 털이 귀여

1주년을 자축하며

2025-04-19T10:23:16Z

언제나 작가가 되고 싶었다. 글을 통해 나만의 세계를 창조하고 이를 통해 생계를 이어가기를 원했다. 그러나 삶이란 늘 이상과 현실 사이의 간극을 만드는 법이다. 지난 20년 간 내가 쓴 글이라고는 수천 건의 보고서와 인사말뿐이었다. 눈을 뜨면 출근하고 집에 오면 아이를 돌보고 주말이면 밀린 집안일을 했다. 회사에서 직급은 점점 올라가고 아이는 하루가

흐르는 강물처럼

2025-04-12T12:06:00Z

그럴 때가 있다. 나쁜 일들이 연거푸 일어나는 때. 엉킨 실타래처럼 모든 일이 꼬여만 가는 때. 작년 봄, 대표의 괴롭힘을 시작으로 현재까지 꼬박 1년 간을 악몽처럼 살아왔다. 아니, 견뎌왔다. 단추 하나를 잘못 끼우면 다음 단추도 모두 어긋나듯 삶의 다른 부분에서도 크고 작은 문제들이 줄지어 일어났다. 차라리 나의 잘못으로 비롯된 일들이라면

마법의 옷장

2025-04-10T10:56:31Z

모든 집에는 마법의 옷장이 있다. 옷장 문을 열면 우리는 토끼굴을 통과해 이상한 나라로 떠나는 엘리스처럼 마법의 세계로 이동할 수 있다. 마음이 실타래마냥 엉키고 설킨 날이면 나는 옷장 문을 연다. 때로는 단정하게, 때로는 어지럽게 놓여 있는 옷들을 꺼내 빛깔별로, 두께별로, 소재별로 차곡차곡 정리해나가다 보면 헝클어졌던 머릿속은 어느새 기억 속에

감사 연고

2025-03-30T11:04:57Z

문이 열린다. 자그마한 손이 목덜미를 감싸고 품 안에 몸을 던진다. 보송하고 달큼한 냄새가 콧 속을 가득 채우고 따스한 온기가 온몸으로 퍼져 나간다. "엄마씨, 사랑해. 보고 싶었어." "엄마도 너무나 보고 싶었어." 매일 등교하는 아이를 배웅할 때마다, 하교하는 아이를 맞이할 때마다 괜히 목이 멘다. 누가 보면 이산가족이라도 상봉한 것 같다고 할 만

발산의 시간

2025-03-24T00:57:02Z

누구에게나 숨통을 틔울 기회는 필요하다. 아무리 긍정적인 사람이라도, 아무리 잘 나가는 사람이라도 누구에게나 숨통이 막히는 순간은 있다. 억울하고 화나고 힘들고 슬퍼서 모든 것을 놓고 싶을 때가 있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봐도 군침이 돌지 않고 아무리 피곤해도 잠을 이룰 수 없고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을 때가 있다. 이런 현상이 오래되면 병이 된다

덜 쓰는 삶

2025-03-17T03:44:52Z

있다가도 없는 것, 없다가도 있는 것이 돈이라더니 참말로 그렇다. 부잣집에서 태어나 고생 한 번 안 하고 자란 것 같다는 말을 지겹도록 들어온 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유복했던 유년 시절을 제외하고 나에게 있어 돈은 가만히 있으면 주어지지 않는 것, 온전히 내 힘으로 쟁취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일찌감치 직업전선에 뛰어들었고 쉼 없이 경제활

작은 피난처

2025-03-15T00:18:12Z

결단이 필요한 순간이 있다. 혼란스럽고 두려워도 문제와 직면해야 하는 순간, 더 이상 중도적인 입장을 취하지 못하고 양 갈래 길 중 하나를 반드시 택해야만 하는 순간이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더욱 얄궂은 것은 이런 순간이 연달아 찾아온다는 것이다. 4년에 한 번씩 찾아오는 윤달처럼 숨 쉴 틈을 주고 순차적으로 찾아오면 좋겠지만 이상하게도 결단의 순간들

악어와 함께 하는 모험

2025-03-13T06:51:45Z

사람은 누구나 외롭다. 혼자 있기 좋아하는 사람도 어떤 순간에는 외로움이 몰려오기 마련이다. 사랑하는 배우자가 있어도, 소중한 자식이 있어도, 든든한 친구가 있어도 우리는 외로움을 느낀다. 정도와 양상의 차이만 있을 뿐 우리 모두는 평생 외로움을 안고 산다. 젊은 시절에는 외롭다는 감정이 청승맞게 느껴졌다. 그래서 친구와 약속을 잡고 모임을 나가고

나만의 쇼핑

2025-02-25T05:24:26Z

금번 글을 얼마나 많이 썼다 지웠는지 모른다. 원래 퇴고를 많이 하는 편이 아니라서 조금 당황스러웠다. 쇼핑에 대해서 정말 할 말이 많았는데 오히려 그래서 무엇부터 써야 하는지 갈피를 잡기가 어려웠던 것 같다. 며칠을 고민하다 그냥 단순하게 쇼핑에 대한 나의 생각과 경험을 두서없이 써보기로 했다. 어차피 <혼자가 두려운 당신에게>는 오롯이 '나'로서 살

생기를 더하세요

2025-02-18T08:37:03Z

20대에는 잘생긴 사람에게 눈이 갔다. 30대에는 똑똑한 사람에게 눈이 갔다. 40대부터는 생기 있는 사람에게 끌리고 있다. 아름다운 외모와 사회적 성공은 아무리 관리를 잘한다고 해도 세월의 흐름에 따라 어느 정도 빛이 바래기 마련이다. 억지로 이를 부여잡으려고 집착할수록 추해질 뿐이다. 그러나 삶에 대한 생기를 가지고 자신과 타인을 위해 열정과 애정을

용서 후에 오는 것들

2025-02-28T16:59:54Z

당한 만큼 갚아줘야 한다 생각했다. 일방적인 가해자와 피해자가 존재해서는 안 된다고, 잘못을 했으면 반드시 정당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이를 통해 우리는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고 피해자의 아픔과 상처를 조금이나마 덜어낼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대갚음이 가지는 가치와 능력에 대해 의문이 들었다. 말을 함부로 내뱉는 자에게 더 심한

당신의 향기

2025-02-08T06:48:53Z

찰나에 불과하지만 오래도록 기억되는 것 매 순간 모든 곳에서 수만 가지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 볼 수도 만질 수도 없지만 그렇기에 더욱 강력하게 마음을 움직이는 것 향기는 우리를 사로잡는다. 나의 기억과 감정은 향기 속에 머문다. 어린 시절 가장 행복했던 추억 중 하나는 눈이 가득 쌓인 펜션으로 가족 여행을 갔던 것이다. 자연휴양림이라는

인생의 파도 위에서

2025-01-30T08:45:33Z

수년 만에 <김씨 표류기>를 다시 보았다. 자살을 시도하다 우연히 도심 속 무인도로 흘러 들어간 한 남자와 학창 시절 받은 상처로 방안에서만 생활하는 한 여자의 삶의 모습과 변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처음 보았을 때 상당히 신선한 느낌을 받았는데 다시 보니 현대인의 고독과 고립을 잘 담아낸 수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인공 김씨는 직장에서 구조

걸어 보아요

2025-01-21T08:17:51Z

무작정 걷는다. 목적지 없이, 시간 구애 없이, 날씨와 상관없이 걸음을 옮긴다. 귓가에 흘러나오는 음악에 움직임이 경쾌해지고 양 볼을 스치는 겨울바람에 상쾌함이 더해진다. 서서히 몸을 타고 올라오는 열기에 창백했던 얼굴에는 혈색이 돌기 시작한다. 경직되었던 몸과 마음이 이완되기 시작하고 새로운 힘이 충전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면 잠시 멈춰 서서 주변을 바

숙면을 꿈꾸며

2025-01-14T04:42:22Z

내 삶은 요즘 말로 갓생 그 자체였다. 일분일초도 허투루 보내지 않는 삶 한 번에 두 가지 이상의 일을 해내는 삶 쉬는 시간에도 자기 계발에 힘쓰는 삶 가정과 일,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는 삶 선천적인 기질에 후천적인 책임이 더해져 나는 본의 아니게 갓생을 사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그 덕에 나이에 비해 많은 것을 이뤄냈고 다방면에 걸쳐 풍부한

휴직과 함께 할 새로운 이야기

2025-01-10T09:56:51Z

새해가 시작되었다. 365일마다 과거의 기억을 뒤로하고 새로운 마음으로 인생에 도전할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은 선물 같은 일이다. 특히 악몽 같은 2024년을 보낸 나에게 이러한 기회는 너무나 절실하고 감사하게 다가온다. 작년 한 해 나는 새로 부임한 대표이사의 만행으로 소중한 직원들을 잃고 건강까지 타격을 입었다. 지난 1년 동안 그에게 맞서 싸우던

거절하겠습니다

2025-01-14T07:55:54Z

나는 거절을 못하는 아이였다. 착한 아이라는 틀에 갇혀 있기도 했고 칭찬받아야 한다는 압박도 적지 않게 느꼈던 것 같다. 하지만 그에 앞서 나는 거절을 했을 때 일그러질 상대방의 표정을 보기가 두려웠던 것 같다. 어린 시절 학급 반장을 도맡을 정도로 선생님과 친구들에게 인정을 받았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도 스스럼없이 말을 건넬 정도로 활달한 성격이었음에도

자족요리사

2025-01-12T01:29:40Z

세상에는 두 가지 사람이 있다. 요리를 즐기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전자와 후자를 선택한 데에는 저마다 다양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타고난 요리 실력이 뛰어나서, 맛있는 음식을 직접 해 먹고 싶어서, 따뜻한 집밥이 그리워서 요리를 즐기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소요되는 시간이 아까워서, 재료를 다듬고 손질하는 과정이 귀찮아서, 노력에 비해 맛이 나지

날 향한 치어리딩

2025-01-14T02:43:10Z

유난히 힘든 날이 있다. 모든 것이 뜻대로 안 되는 날 나의 모습이 초라해 보이는 날 기분이 심해에 닿을 듯 처지는 날 이런 날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는 말이나 행동이라도 받게 되면 상태는 걷잡을 수 없이 나빠진다. 자신에 대한 믿음과 만족은 급속도로 떨어지고 타인과의 관계는 꼬인 실타래처럼 얽힌다. 세상에 대한 분노와 원망까지 지나가고 나면 누구도 만

난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