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endtic Hannahismarendtic별거 없지만 저항은 하고 싶은 카지노 게임. 삶을 견디지 않고 자연스레 살아보는 것이 목표인 카지노 게임입니다. 정말 별거 없는 카지노 게임인데 생각하기를 좋아하고 배우는 것을 상당히 좋아합니다./@@85gv2019-07-30T02:14:16Z차라투스트라와 하스스톤 - 위버멘쉬는 초인이 아니다./@@85gv/512025-04-24T22:47:14Z2025-04-24T15:56:36Z내게 인간의 대지는 동굴로 변했고그 심장부는 푹 가라앉았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인간 부패물이 되고, 뼈가 되었으며, 썩어버린 과거가 되어버렸다. 내 탄식은 모든 인간의 무덤 위에주저앉아, 더는 일어날 수 없었다. 아 인간이 영원이 되돌아온다니. 저 왜소한 인간이 영원이 되돌아온다니!언젠가 나는 가장 위대한 카지노 게임과 가장 왜소한 카지노 게임, 이악은 평범하다는 의미(2) - 사고 불능과 악의 평범성에 대한 고찰/@@85gv/502025-04-15T03:18:59Z2025-04-15T01:38:41Z-COVID-19와 따돌림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은 단순히 나치 독일의 역사적 사건에 머물지 않는다. 사고 불능은 여전히 현대 사회 곳곳에서 발견된다.COVID-19 팬데믹 초기, 많은 카지노 게임은 "나 하나쯤 안 지켜도 아무도 몰라"라는 태도로 방역 지침을 무시하며 자신의 행동이 사회적 결과에 (대규모 감염자 증가) 미칠 영향을 고민하지 않았다. <img src= "https://img1.daumcdn.net/thumb/R1280x0.fjpg/?fname=http%3A%2F%2Ft1.daumcdn.net%2Fbrunch%2Fservice%2Fuser%2F85gv%2Fimage%2FQbCD_CPx3wsqMdti9bTesDWLhuE" width="500" /악은 평범하다는 의미 (1) - 사고 불능과 악의 평범성에 대한 고찰/@@85gv/492025-04-15T01:34:59Z2025-04-15T01:34:42Z이 글은 탄핵과 관련하여 카지노 게임이 악의 평범성을 언급함을 보고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재독(再讀)하여 쓰는 글이다.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라는 개념은 단순히 악의 본질을 새롭게 정의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녀는 나치 전범 아이히만의 재판을 통해 당시에 카지노 게임이악에 대해 가졌던 전통적인 개념에 균열을 일으켰고 여<img src= "https://img1.daumcdn.net/thumb/R1280x0.fjpg/?fname=http%3A%2F%2Ft1.daumcdn.net%2Fbrunch%2Fservice%2Fuser%2F85gv%2Fimage%2FLjP-MPcj8ZVkxvo1mXVM9k3cMO0" width="500" /자유와 해방의 구분 - 인간의 조건, 그리고 힘의 의지/@@85gv/482025-04-10T14:55:39Z2025-04-09T14:20:56Z카지노 게임은 종종 정치적 대화나 주장 속에서 ‘자유’라는 말을 쉽게 끌어온다. 그러나 잘 알려진 개념일수록 오히려 잘 모른다는 헤겔의 말처럼, 자유에 대해 깊이 사고하는 경우는 드물다. 자유를 단지 억압이 사라진 상태, 일종의 엔트로피 증가처럼 받아들인다.그러나 자유는 억압의 종결, 곧 해방의 상태가 아니다. 인간의 조건에서 아렌트는, 노예제가 <img src= "https://img1.daumcdn.net/thumb/R1280x0.fjpg/?fname=http%3A%2F%2Ft1.daumcdn.net%2Fbrunch%2Fservice%2Fuser%2F85gv%2Fimage%2FP5Qm8chXbeE2-NkYCvYQFCYCBpc" width="500" /정제된 질투, 닮음의 불편함 - 우상의 황혼에서 읽힌, 니체가 소크라테스를 끝내 참을 수 없었던 이유/@@85gv/472025-04-08T05:16:49Z2025-04-08T03:21:17Z우상의 황혼에서 읽힌 니체의 소크라테스를 향한 근원적 불편함에 대하여 니체의 소크라테스를 향한 비판은 마땅했다.당시의 지식인들은 ‘모른다’는 나약함 속에서만 정당성을 가질 수 있었다. ‘안다’고 말하는 것은 교만이 되었고, 자신의 정의를 드러내는 일은 공격받게 되었다.그러니 자랑은 부덕함이며, 타락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나약함을 조장하면서도, <img src= "https://img1.daumcdn.net/thumb/R1280x0/?fname=http%3A%2F%2Ft1.daumcdn.net%2Fbrunch%2Fservice%2Fuser%2F85gv%2Fimage%2FLpADe9pAf2RroOVMsm_RXDEVhSI.jpg" width="500" /꽃병에 담긴 니체 – 읽지 않은 니체를 소비하는 방법 - 잘린 말과 사다리 위의 독자들, 그리고 대지 위의 니체/@@85gv/462025-04-03T04:19:29Z2025-04-02T23:55:05Z니체의 말은 흔히 잘린 꽃처럼 소비된다.생의 뿌리를 잘라 낸 채,작은 꽃병에 꽂혀 전시되는 아포리즘.그럴싸하지만, 금세 시든다.카지노 게임은 니체를 읽는다고 말한다.그러나 그들이 마주하는 것은그의 책이 아니라,그에 대해 쓰인 글,누군가가 추린 문장,혹은 SNS에 떠도는 짧은 인용이다.카지노 게임은 각자의 사다리를 세운다.니체를 이해하기 위한 수밥값과 책값 사이/@@85gv/452025-04-02T04:20:27Z2025-04-02T01:21:39Z처음 그를 마주했을 때,나는 기대보다 한 걸음 물러나 있는 카지노 게임을 보았다.대화 속에서는 무척 쾌활하고 다정한 카지노 게임이었는데,막상 마주한 표정은 굳어 있었고, 말끝은 자주 주저했다. 식탁 위 음식은 제법 맛있었지만,대화는 그렇게 맛있지 않았다. 마치 오래된 의자의 나사처럼, 자꾸만 어긋나고 삐걱거렸다. 어색한 공기를 깨보려, 괜히 이런저런 말을<img src= "https://img1.daumcdn.net/thumb/R1280x0/?fname=http%3A%2F%2Ft1.daumcdn.net%2Fbrunch%2Fservice%2Fuser%2F85gv%2Fimage%2FpKAnZCl2lRmTtqgcJEbkqst756k.jpg" width="500" /죽은 신과, 새로운 권위의 얼굴들 - 동등한 종이지만, 동등하고 싶지 않기에 인간이 만든 것들에 관하여/@@85gv/442025-04-02T02:11:22Z2025-04-01T23:42:48Z1. 동등할 수 없는 존재들 — 권위의 근원인간은 본질적으로 동등하기 때문에, 그 안에서 권위를 설정하기 어렵다. 그래서 외부로부터의 초월적 권위—신—를 설정할 수밖에 없었고, 그 권위는 “너는 해야 한다”는 강제를 가능하게 했다. 결국 ‘동등함’은 윤리적 명제가 아니라, 신이라는 질서가 생겨날 수밖에 없었던 조건으로서의 동등함이었다.2. 신이 사라뒤집힌 가치의 계보 - 니체의 자연적 가치의 억압과 회복을 위하여/@@85gv/432025-04-01T12:56:50Z2025-04-01T11:44:22Z1. 오해된 전복 — 니체에 대한 흔한 착각 카지노 게임은 니체의 ‘모든 가치의 전도’를 흔히, 기존 도덕이 전복되었다는 의미로 이해하곤 한다. 마치 지금 우리가 따르고 있는 도덕이 원래부터 정당하고 따라야 할 도덕(칸트가 말한 정언명령처럼)이라 믿고, 니체는 그것을 파괴하려 한 급진적 사상가로 오해하는 것이다. 프랑스 시민혁명을 일으킨 사람처럼, 기존 질서괜찮은 카지노 게임은 다 결혼했어./@@85gv/422025-04-01T08:37:54Z2025-04-01T07:14:17Z누가 봐도 괜찮은 카지노 게임은 다 결혼했다는 말이 계속 마음에 맴돌아 밤잠을 설쳤다. 나는 특수한 공동체에 속해 있었기에 일찍 결혼을 했다 하더라도 그건 그 나름대로 지옥이었을 것이다. 결국 그곳을 벗어나 사회에 적응하는 데 수년이 걸렸고, 이제야 겨우 조금 피어날 듯한 데, 나는 서른일곱이다. 결혼하지 않았고, 누가 보아도 괜찮은 카지노 게임은 아니란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