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모서리에 접힌 이름 없는 시간들 - 18. 그라나다(알함브라)

2025-05-02T12:58:30Z

궁전에 사는 새들은 집의 평수도 다른가 봅니다. 둥지의 길이가 1m는 족히 넘어 보여요. 푸른 정원과 석벽 사이의 나뭇가지 위에 연둣빛 퀘이커 앵무새 한 마리가 사열을 받듯 고요히 앉아 있습니다. 세월을 견뎌온 성벽처럼, 저 나무도 오래도록 저 커다란 둥지를 품어왔겠지요. 궁전의 무늬처럼 정교하진 않아도 그 둥지 역시 삶의 흔적을 품은 하나의 예술 같았습니

렌토(Lento) 보다 느리게, 마르베야의 구름 - 17. 마르베야

2025-05-02T01:04:55Z

말라가에서 마르베야로 향하는 길은 지중해의 푸른 숨결을 따라 천천히 미끄러지는 듯한 시간이었습니다. 바다와 나란히 이어지는 도로 너머로 간간이 내려다보이는 작은 만(灣)들과 흰 집들이 모여 있는 마을은 그림엽서 속의 풍경처럼 다정하게 다가왔지요. '철썩' 어서 와~ '쏴아' 반가워~ 파도는 쉼 없이 말을 겁니다. 소리로, 리듬으로, 물결로... 파도는 물

생과 죽음의 경계, 론다의 그림자 - 16. 론다

2025-04-30T09:57:56Z

여행(旅行)이라는 단어의 뜻은, '자기가 사는 곳을 떠나 객지나 외국에 가는 일. 특히, 특별한 볼일이 없이 즐기거나 견문을 넓히기 위해 탈 것을 타고 다니는 것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음.' 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말라가에서 론다까지는 100km, 하루에 다녀오기엔 먼 거리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일이 아니라 즐기고 견문을 넓히기 위해 다니는 여행이니

살아있는 그림책, 미하스 - 15. 미하스

2025-04-30T05:13:57Z

받침 하나 없이 부드럽게 소리 나는 마을 '미하스'. 안달루시아의 차창 밖으로 하얀빛이 번지기 시작했습니다. 눈이 부신 건 흰빛 때문만은 아닙니다. 언덕을 따라 올라가는 길 끝에, 바다와 하늘 사이 어딘가에 걸린 듯한 마을. 따사로운 햇살 아래 눈부신 햇살을 가득 머금은 집들이 침묵처럼 서 있습니다. 지중해를 향해 완만하게 펼쳐진 언덕 위에 자리한 이 마을

미쳐서(狂) 미친(美) 백 년의 걸작 - 14. 세비야

2025-04-24T13:51:41Z

처음 세비야에 갔던 날,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길가에 늘어선 오렌지 나무였습니다. 그 도시는 소리도 빛도 아닌 향기로 나를 사로잡았지요. 따스하고 쌉쌀한 향이 코끝을 자극했고 햇살은 그 향기를 천천히 들어 올려 도시 전체를 부드럽게 덮고 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스페인에는 유명한 관광지가 많습니다. 바르셀로나의 사그라다 파밀리아가 최고의 주

여기 오길 잘했습니다. - 13. 네르하, 프리힐리아나

2025-04-27T10:57:06Z

기억은 종종 풍경보다 그때의 감정에 닿아 있습니다. 골목을 걷는 내내 가슴이 콩닥거렸지요. '여기 오길 잘했다' 그 생각을 했더랬습니다. 프랑스 남부에 코트 다쥐르(Cote d'Azur, 푸른 해변이라는 뜻)가 있다면 스페인 남부에는 코스타 델 솔(Costa del Sol, 태양의 해변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여행 중에서도 유난히 더 기대되는 곳이 있기

여성 중독, 피카소의 뮤즈들 - 12. 말라가

2025-04-22T10:07:54Z

식칼이 얼마나 무딘지 감자가 썰리는 게 아니라 찢어지는 수준입니다. 에어비앤비 숙소 대부분의 칼은 영 맘에 들지 않습니다. 간혹 호스트가 청소도 하고 직접 관리를 하는 경우도 있지만 보통은 관리자를 따로 고용합니다. 그러므로 호스트들은 살림살이의 세세한 사정을 잘 모르는 경우가 많지요. 집은 기가 막히게 럭셔리하고 훌륭하여 5성급 호텔이 부럽지 않을 정도인

환승의 늪, 기차는 떠나고... - 11. 마드리드 아토차역

2025-04-18T09:40:50Z

스페인이라는 영어 이름보다 에스파냐라는 스페인 이름이 더 이국적입니다. 이제 안달루시아주의 말라가로 가는 날입니다. 북쪽 아라곤 지방의 사라고사에서 남쪽 끝의 말라가까지는 자동차로 약 850km로 제법 먼 거리지만 고속 열차를 이용하면 약 4시간이면 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동해야 하는 시간에는 디렉트가 없어서 마드리드에서 기차를 환승할 예정입니다.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의 그곳, 팜플로나 - 10. 팜플로나

2025-04-16T01:53:18Z

일요일의 팜플로나는 유난히 조용했습니다. 상점들의 굳게 내려진 셔터, 무표정한 골목. 여행자의 기대를 배반하는 풍경일 수도 있었지만 그 적막이 나쁘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는 도시는 때때로 가장 깊숙한 여운을 남기니까요. 팜플로나 대성당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이럴 수도 있군요. 성당의 철문조차 굳게 닫혀있습니다. 일요일의 성당문이 닫혀있

책갈피처럼 꽂아 두었던 사라고사 - 9. 사라고사

2025-04-13T02:26:19Z

사라고사에 다시 오기까지 10년이 걸렸습니다. 서둘러 작별을 고했어야 했기에 아쉬움이 가장 큰 도시였지요. 오래전 그 기억은 마치 책갈피처럼 마음 한편에 꽂혀 있었고, 때때로 놓치고 온 풍경을 떠올리곤 했습니다. 사라고사에 도착했을 때 11월의 공기는 지난 계절들을 잘 간직한 듯 깊고 부드러웠습니다. 이번엔 서두름 없이 그때 놓친 조각들을 고요하게 되짚어야

'흐린 날씨가 당신의 미소를 지우지 않기를...' - 8. 산 세바스티안

2025-04-10T14:40:44Z

과 머 사 이과 머묾 사이 새벽 나절 잠에서 깼습니다. 아직 어둑어둑한 빌바오는 묘하게 조용했고 유리창 너머로 흐릿한 비가 보였지요. 지난밤 어깨에 스며들던 비의 감촉이 떠올랐습니다. 다시 침대에 누워 아르보 패르트(Arvo Pärt)의 '거울 속의 거울(Spiegel im Spiegel)'을 듣습니다. 반복되는 첼로의 단순한 선율이 천천히 감정의 바닥

시간과 공간을 비트는 공간, 빌바오 구겐하임 - 7. 빌바오(Bilbao)

2025-04-09T23:43:38Z

기차 여행은 낭만이 있습니다. 바르셀로나에서 빌바오로 향하는 6시간 30분 동안 창밖의 풍경은 화면을 스크롤하듯 지나갑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 햇살이 반짝이는 들판, 그리고 가끔씩 지나치는 간이역마다 한 편의 시입니다. 책 몇 장 읽다가 식당칸에서 커피를 사 갖고 와서 간식을 먹는 여유도 즐깁니다. 음악을 듣거나, 창밖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기기도

하늘을 향한 안테나, 달리의 콧수염 - 6. 피게레스(Figueras)

2025-03-26T14:17:47Z

바르셀로나 상트역에서 기차를 타고 북쪽으로 한 시간, 단조로운 풍경을 지나가다 보면 피게레스-빌라판트역에 도착합니다. 그곳은 배우 뺨치게 미남이면서 특이하고 비범한 남자를 품고 있는 도시입니다. 바로 '살바도르 달리'가 태어나고 삶을 마감한 곳이지요. 사실 달리의 작품을 좋아하는 건 아닙니다. 아니, 좋아하고 안 하고를 떠나 그의 작품은 어렵습니다

다리를 건너는 순간 과거와 현재가 포개지는 곳, 베살루 - 5. 베살루(Besalú)

2025-03-24T23:54:04Z

흔히 말하는 '중세 시대' 혹은 '중세 도시' 대체 중세(medieval)는 정확히 언제일까요. 유럽의 중세는 서기 476년 로마 제국의 몰락부터 르네상스 시대가 끝나는 1492년까지입니다. 암흑시대로도 알려진 이 시기에는 십자군 전쟁, 백년전쟁, 흑사병, 장미전쟁 등의 굵직한 사건들이 일어났지요. 프랑스의 샤르트르 대성당이 건축되고, 단테가 신곡을 썼으

지로나를 지켜낸 파리떼 - 4. 지로나(Girona)

2025-03-25T10:36:38Z

바르셀로나 상트역에서 기차로 40분이면 도착하는 지로나(Girona)는 '천 번의 공격을 받은 도시'라는 타이틀이 붙을 정도로 많은 고난을 겪은 곳입니다. 로마 시대에는 요새로 사용되었지만 중세에는 유대인 지구가 번성하며 문화적 황금기를 누리기도 했지요. 하지만 15세기에 가톨릭 군주인 페르난도와 이사벨라가 결혼함으로써 유대인과 무슬림들이 강제 추방당하고

'LGBTQ+'의 성지? 시체스 - 3. 스페인 시체스(Sitges), 산티아고 루시뇰

2025-03-21T06:20:07Z

바르셀로나에서 버스를 타고 1시간분쯤 가면 매력적이고 느긋한 바닷가 마을 시체스(Sitges)에 도착합니다. 인구 3만 명도 안 되는 햇살 가득한 휴양 도시로, 중세 시대보다 더 오랜 역사를 자랑하지요. 옛 카탈루냐어로 '지하 곡물 저장고'라는 뜻을 가진 시체스는 주민의 35%가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스칸디나비아 출신이며 부동산 가격이 바르셀로나와 마

익숙함과 낯섦이 함께하는 바르셀로나 - 2. 바르셀로나

2025-04-02T04:20:58Z

카우치의 패브릭, 전등갓, 주방 가구, 이불과 베개, 식탁 의자, 발코니의 테이블 세트, 욕실 타일, 모든 것이 하얀색으로 통일된 바르셀로나의 숙소는 모던 심플의 대명사였습니다. '이 집은 깔끔한 데다가 수(水) 세 권이라 더 좋은데.' 여기서 물이란 미네랄워터를 말합니다. 숙소 바로 맞은편에 슈퍼마켓이 있어서 무거운 생수를 쉽게 사들고 올 수 있는 장

지각 노트, 스페인 32 days - 1. 프롤로그

2025-03-23T11:25:45Z

2020년 1월, 쿠바 여행을 하고 있을 때 전염병이 나돌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인천공항에 도착하면 마스크부터 사서 착용하라는 가족의 메시지를 받았지만 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그게 벌써 5년이 지났네요. 그 전염병은 '코로나'라는 타이틀로 전 세계 사람들을 공포에 휩싸이게 만들며 기세를 키워나갔습니다. 급기야 그해 7

4만 원에 구입한 그림, 수천억 보물 - 20. 덴 하그, 델프트, 요하네스 페르메이르

2025-04-05T09:52:37Z

예술은 혼자의 몫입니다. 화가는 붓 끝에서 세상을 그리고, 음악가는 음표 사이에서 길을 찾아가고, 작가는 문장 속에서 자신을 찾습니다. 그러니 고독은 예술가들에게 가장 친숙한 벗이자 가혹한 스승일 겁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홀로 침묵 속에 머무르며 가장 깊은 울림을 길어 올립니다. 그림은 색채와 선, 형태를 통해 눈에 보이지 않는 감정을 끄집어내며 보는 이

세상에서 제일 비싼 부부 - 19.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렘브란트

2025-04-17T15:04:42Z

여행을 하는 동안은 요일에 무뎌지기 마련입니다. 오늘이라는 날짜를 모르고 지나가도 되는 시간이 참 여유 있습니다. 이왕이면 내가 누구인지도 잠시 잊을 수 있으면 좋겠다 싶습니다. 암스테르담 중심가의 본델 공원 옆 본델 스트라트에 위치한 숙소는 뮤지엄 쿼터까지는 도보 10분, 운하는 5분이면 도착할 수 있는 좋은 위치입니다.

전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