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어가는 중 - “내가 언제 이렇게 할머니가 됐지?”

2025-04-28T11:45:55Z

흰 머리카락 하나가 눈에 계속 거슬렸다. 처음엔 햇빛 때문에 유독 밝게 보이는 건가 했는데 분명 그건 흰 머리카락이었다. 얼마 전에도 하나 뽑은 적이 있었지만, 그저 새치겠지 하며 넘겼는데 하필 같은 자리다. 그 말은 이게 그냥 새치가 아니라 정말 흰 머리카락이란 뜻이다. 세 살 위 남편도 몇 달 전부터 갑자기 눈이 뿌옇다고 호소했다. 설마 이 모든 증상이

원하는 하루 - 오늘은 네가 원하는 대로 해 줄게.

2025-04-22T00:37:02Z

일주일 같지 않은 일주일이었다. 시간은 내 뒷머리를 잡으려고 부지런히 달려왔고, 난 잡히지 않으려고 혼신의 힘을 다해 도망쳤다. 일 년에 한 번은 꼭 치러야 할 일이다. 교회 학교 행사. 이때만큼은 다른 일을 돌아볼 여력이 없다. 또다시 아침에 허겁지겁 집을 나서려는데 엄마의 말투가 예사롭지 않다. 애들 아침에 먹을 것도 없고, 우유도 다 떨어졌어

편(便) - 그저 판단을 멈추고 서로를 바라볼 뿐이다.

2025-04-14T22:37:02Z

공기마저 차갑다. 시어머니는 며느리를 매우 못마땅한 표정으로 내려다본다. 시어머니가 그러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며느리는 설거지를 산더미 같이 쌓아두고 거실에 드러누워 있다. 심지어 핸드폰 게임에 빠져 옆에서 청소하고 빨래하는 시어머니를 나 몰라라 한다. 한술 더 떠 일 마치고 들어온 아들의 손에는 며느리가 좋아하는 두리안이 들려 있다. 콧소리를 내며 애

페니 챌린지 - 시리, 난 내 딸이 죽을까 봐 겁이 나.

2025-04-08T14:38:48Z

시리, 남편에게 전화해 줘. 오늘도 친절한 인공지능 비서가 지친 나 대신 전화를 건다. 통화음이 줄임표처럼 공중에 몇 개의 점을 찍다가 어느 순간 정확히 내 심장 소리와 겹친다. 고요하다 못해 주위가 딱딱하게 굳는다. 여보세요? 당신이 이 시간에 웬일이야? 그의 목소리를 듣자, 턱까지 올라간 숨이 한꺼번에 쏟아져 내렸다. 여보, 나 지금 병원. 뭐? 병원?

이만 원 짜리 유전 - 그리고 드디어 다윈에게 밀렸던 라마르크가 크게 웃었다.

2025-03-31T23:27:40Z

시간에 무게를 더하는 일은 분주하다. 유월의 마지막 토요일 오후. 오랫동안 머리 없이 걸려있던 드레스들이 주인을 찾아 지퍼를 올린다. 줄 잡아 다린 정장 바지들도 간만에 벨트로 멋을 부리고 섰다. 열한 명의 피사체가 한 몸이 되어 네모난 틀 안으로 걸어 들어간다. 마치 한 사람처럼. 크기만 다를 뿐, 똑같았다. 아버지에서 동생, 조카에게로 이어지는 그 눈은

초록뱀과 아름다운 백합 - 다른 각도에서 바라봤지만, 실체는 같았다는 것.

2025-03-25T00:08:25Z

화면 구석에서 숫자가 바닥을 향해 쏟아져 내린다. 내려갈수록 가속도가 붙는 건 뇌의 착각인지 자연스러운 물리 법칙인지. 이미 무거워진 마음에 닿으려는 시간은 더 느려져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찰나 문제 설명이 끝났다. 참가자들은 마른 입술을 손톱으로 뜯으며 펜을 책상으로 던진다. 세상의 진리를 찾아가는 과정은 지난하기에 고통이 따르지만, 오늘도 퀴즈쇼에

오늘도 행복해 - 존 에이커프는 완벽주의의 반댓말이 목표 달성이라고 했다.

2025-03-17T22:13:16Z

머리 위로 좌절이 융단폭격처럼 내렸다. 하필 지붕이 뚫릴 듯 요란한 빗소리로 인해 고요해야 할 아침이 더 부산해졌다. 휴대전화 대화창을 바라보는 내 눈에 불안이 일렁였다. 큰마음 먹고 용기 내서 맡은 성경 공부 그룹 리더였는데 한 달도 안 되어 사고를 친 것이다. 얼른 통화 버튼을 눌렀다. 총괄 리더에게 이 사태에 관해 상의하기 위해서였다. 어쩌죠, 교회

빨간 등대, 하얀 등대 - 그렇다면 등대의 색은 왜 다른 걸까?

2025-03-10T22:10:49Z

여름이다. 여기저기에 ‘납량 특집’이란 푯말이 붙는다. ‘납량’이라는 말은 여름의 더위를 피하여 서늘한 기운을 느낀다는 뜻이다. 그런데 그 서늘한 기운을 느끼기 위해 왜 무서운 이야기가 등장해야 하는지 다 큰 지금도 알 수가 없다. 그중에서도 단연 화장실 귀신 이야기가 최고다. 밤에 화장실을 가면 귀신이 나타나 ‘빨간 휴지 줄까, 파란 휴지 줄까.’

문을 묻다 - 그제야 내가 꿈속에서 간과했던 것을 발견했다.

2025-03-04T11:39:22Z

입구는 있는데 출구는 없었다. 그리고 방 안에 난 혼자였다. 마음 탓인지 사방을 둘러싼 흰 벽이 명도 대비 더 어둡게 느껴졌다. 물 밖에 던져진 물고기처럼 점점 더 숨이 차오를 때 나의 의식은 폐소공포증을 견디지 못하고 공간 밖으로 퉁겨져 나왔다. 꿈이다. 대형 마트 앞, 넓은 공터엔 일 년에 두 번 카니발이 열렸다. 그리고 커다란 트럭 몇 대가 오더니,

그건 네 생각 - 아, 몇 번을 말합니까? 우연히 일어난 사고라고요.

2025-02-24T18:58:46Z

제 말 좀 들어보십시오. 민디와 저는 무려 12년이나 만난 장수 커플입니다. 네, 뭐 중간에 권태기도 있고 하다보니까 두 번 정도 헤어진 적도 있었지만... 그래도 이게 오래된 정이란 게 있잖습니까. 그래서 또 잘 붙어 만나고 했습니다. 문제는 바로 그 날이었죠. 아, 생각만 해도 짜증나네. 그 새끼, 그 무슨 같은 학교 선생이라는 그 새끼 말입니다. 민디

해마의 데자뷔(Deja vu) - 어디선가 본 것 같아.

2025-02-17T08:24:05Z

어디선가 본 것 같아. 사람들은 이런 걸 데자뷔라고 한다지. 참으로 몽환적이고, 신비로운 이름이야. 그건 영화 속 남녀 주인공이 우연을 가장해 자주 스치는 상황과 비슷하다랄까? 왜냐하면 주인공은 꼭 이런 대사를 던지거든. 우리 어디에서 본 적 없어요? 극작가는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아. 이건 운명이고, 우주의 법칙입니다. 관객 여러분, 인제 그만 받아들

나였던 나는 나로 죽을까 - 신의 시간은 인간의 것과 같지 않다.

2025-02-10T23:54:00Z

시간이 없다. X축과 Y축이 만나는 모서리에서 시작된 점 하나는 경사면을 만들며 한 걸음을 내디딘다. 마감이라는 고지를 향해 무수한 발자국을 찍어 상승곡선을 그려갈 예정이다. 이제 필요한 건 성실하고 믿음직스러운 손가락이다. 신은 왼손잡이라는 누군가의 말을 믿으며 오른손잡이인 난 괜히 왼손에 더 힘을 준다. 그래야 두 손의 속도를 맞추는 신의 경지를 기대할

콘크리트 벽 - 콘크리트 벽이 거기 있었다.

2025-02-03T23:19:23Z

콘크리트 벽이 거기 있었다. 그로 인해 무려 179명의 사람들이 죽었다. 그것도 승무원 2명이 살아남았을 뿐, 승객은 전원 사망했다. 태국 방콕을 떠나 전남 무안국제항공에 도착 예정이었던 비행기는 새 떼와 충돌하며 첫 번째 위기를 맞았고, 비상 착륙 시 랜딩기어가 작동하지 않아 두 번째 위기를 맞았다. 그렇게 두 번의 위기는 피했지만, 결국 동체 착륙 후

새해 첫 날, 혼나다 - 그건 마치 과속 방지턱의 무늬 같다.

2025-01-28T00:01:04Z

눈 앞에 휙 하고 나타난 건 분명 사람이었다. 순간 너무 놀란 나머지 옆도 확인하지 않고, 운전대를 왼쪽으로 꺾었다. 남자가 내 쪽을 날카롭게 노려봤다. 검은 후드티에 숨겨진 그의 하얀 얼굴이 재빠르게 내 쪽으로 다가오는 걸 보고서야 급제동을 걸고, 경적을 울렸다. 이른 새벽, 비까지 내리는 어둠 속에서 가시거리는 몹시 짧다. 차들이 빠르게 달리는 대로에선

대현자의 머리카락 - 나의 머리를 가득 채운 군살들이 다이어트를 못 해서 문제다.

2025-01-20T19:46:19Z

나이가 드니 머리가 무거워서. 과감한 단발을 감행한 나의 변명이었다. 중학교 후 처음이다. 갑자기 훤해진 목둘레를 미용사가 쓸어 만지는데 기분이 묘했다. 허전한 건지, 상쾌한 건지. 이럴 때 쓰는 적합한 표현이 있다. 시원 섭섭. 그래도 아침마다 겪는 꾸밈 노동을 반으로 줄일 수 있단 생각에 나름 현명한 처사다 스스로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시어머니께서는

싼 맛에 저승행 - 그 한마디가 불러일으킬 결과를 엄마는 예상했어야 했다.

2025-01-14T08:57:20Z

집과 가까운 곳에 새 배추 농장이 생겼다. 그곳 배춧값이 워낙 싸다 보니 광고한 것도 아닌데 주변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요즘 한국 사람이 모이는 곳엔 이 농장 이야기가 단연 화제다. 맥도날드엘 가도 그 이야기가 들릴 정도니 사람 입이 참 무섭다. 공중을 날아 독감처럼 순식간에 이 지역에 퍼져나간다. 속도가 거의 전염병 수준이다. 어느 날 차고 앞에

엔쿠타타쉬 - 여긴 2017년이야.

2025-01-07T01:40:59Z

연말이 되면 그들은 줄을 선다. 새해부터 얼굴을 들이밀려면 지금부터 작전을 잘 짜야 한다. 누군가는 연말에 줄을 서는 것이 상 받는 데에 훨씬 유리하다고 하지만, 어느 때보다 더 치열하게 예쁘고 잘생긴 얼굴들을 앞세우며 출발선에 서 있다. 2025년 드라마 기대작 10편. 스릴러부터 로맨스, 첩보 액션, 좀비물까지. 입맛을 몰라 다 차려봤습니다, 라고 하듯

제 글이 보이시나요? - 글 쓰는 사람은 글로 독자와 소한통다.

2024-12-31T00:53:22Z

오늘 나는 K와 이기야를 하며 왠지 만장리성을 마하주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는 ‘아’라고 이기하야면 ‘어’라고 알듣아는 놀라운 능력을 지녔다. 또한, 반대로 ‘아’라고 말하면 상방대은 ‘어’라고 알듣아게 하는 신기한 재주도 함께 지녔다. 소통의 부재다. 소통이 이지어루지 않으면 그말야로 글과 말은 돼지 목의 진주 목이걸요, 개밥에 도리토다. 화

사실 버섯은 - 조용한 밤에 날아든 소식이었다.

2024-12-23T08:42:43Z

말도 안 돼. 말콤 박사가 귀신이었다니! 역사에 길이 남을 반전의 시작이었다. 귀신을 본다는 소년, 콜을 영화 내내 치료하던 말콤 박사가 사실은 이미 죽은 사람이었다는 결말. 그건 아직도 온몸에 짜릿한 충격을 안겨 준다. 그뿐인가, 요즘같이 복잡한 반전이 유행하는 시대에도 툭하면 <식스 센스>급 반전이란 대명사로 사람들 입에 곧잘 오르내리곤 한다. 아리스토

심장이 걸린 하루 - 아이 심장에 난 구멍은 과연 하나뿐일까.

2024-12-17T05:18:26Z

빨간 심장들이 교실 입구에 대롱대롱 매달려있다. 일 년 중 가장 많은 심장을 볼 수 있는 날. 이날엔 어딜 가나 이렇게 심장들로 가득하다. 카드에도 가게에도 길가에도 온통 심장이 내걸려 있다. 사실 인간의 장기가 특정 상징물로 지정된 건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폐, 간, 신장 등을 모양으로 만든다면 과연 이만큼의 인기를 누릴 수 있었을까. 간혹 그 모양을

Boradbu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