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기

2025-05-10T00:43:26Z

장대비를 뚫고 애써 도서관에 왔는데 궁둥이만 붙인 채 2시간이 흘렀다. 또다시 맞이하게 된 영겁의 시간. 나는 흠뻑 젖은 청바지 밑단이 본래 색을 되찾기도 전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내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는 건지.’ ‘나는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건지.’ 애꿎은 땅만을 짓어 밟으며 집으로 돌아온 뒤, 나는 옷과 신을 갈아입고 다시 밖을 나섰다

왼손잡이

2025-04-29T10:02:38Z

‘툭’ “아, 미안” 왜인지 내가 사과했다. 왼쪽 끝자리를 사수하지 못한 내 잘못이었으니까. 정확히는 모두가 오른손으로 숟가락을 집을 때, 나 혼자만 왼손으로 숟가락을 집었으니까. 태어나보니 난 왼손잡이였고, 태어난 곳은 확연히 오른손잡이를 위한 세상이었다. 사회 구성원의 대다수가 오른손잡이였기에 사회는 당연히 왼쪽보다는 오른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필

인연

2025-04-19T14:17:55Z

3년 동안 무려 6명의 선생님을 거쳤던 때가 있었다. 지금이야 귀했던 시간이라 자부하지만, 당시 중학생이었던 아이에게 잦은 이별은 역시나 어려운 것이었다. 주시는 큰 사랑에 감동하기도 전에 나는 이별을 준비해야 했고, 흘러내린 눈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내게는 새로운 사람이 찾아왔다. 진심은 진심을 덮었지만, 반복은 마음을 딱딱하게 했다. 첫 이별엔 서른 개

벚꽃

2025-04-17T05:38:18Z

작년엔 인사만 했다 하면 계절 이야기를 하곤 했다. “무감에 젖은 권태로운 삶에는 ‘덥다’와 ‘춥다’라는 계절만이 존재한다.” 운운하며, 고개 푹 숙이고 있는 아이들에게 계절 안에 고여 있는 삶의 아름다움과 다채로움을 알려주고자 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내 인사에 계절 이야기가 없어졌다. 계절 이야기는 충분히 나눴기에 그런 걸까, 아니면 언젠가부터 내 삶

여름

2025-04-07T09:02:10Z

앙상했던 나무 끝에 초록 망울들이 맺혔고, 내 발은 쉬이 그 앞을 떠나지 못했다. 마음이 영 일렁이는 게, 마음이 영 두근거리는 게, 마음이 설설 움직이는 게, 초록 가득한 여름을 줄곧 기다리고 있었다. 벌써부터 뜨거운 햇볕이 땅을 내리 쐬고, 사랑을 찾는 매미들의 세찬 노래가 귓가에 어렴풋이 들려오는 듯하다. 살이 익어가는 줄도 모른 채 남자아이들은 활

기다림

2025-03-22T01:17:51Z

‘언젠가는.’ 거칠어 메마른 밭에 오늘 씨앗 하나를 더 심는다. ‘너는 꽃을 피울 수 있을까.’ 건강히 자랄 수 있는 옥토를 마련하지 못해 심는 내내 가슴이 쓰리다. 염치도 불고하고 내 귀한 씨앗 좀 제발 잘 부탁한다며 땅을 토닥이고는 이내 굽힌 등을 곧추세워 하늘을 향해 손을 모은다. 이제는 내 손을 떠나 하늘과 땅에게 맡겨야 하는 한 생명을 위해 하늘

잡담

2025-03-15T02:43:49Z

3월만 기다렸다. 비교적 다른 달보다 바쁜 일정이 없는 3월, 이제는 내 시간을 넉넉히 가질 것이라 기대하고 3월만을 기다렸다. 3월이 되면 이미 해야 했을 일도 발 빠르게 하고, 이제 해야 할 일도 하나둘 시작하고, 앞으로 준비해야 할 일도 천천히 훑어보려 했다. 정말 그러려고 했다. 근데 놀라지 마라. 벌써 3월 중순이다. (내가 제일 놀랐다.) 이미

결심

2025-03-08T07:07:37Z

‘아, 재미없어.’ 큰일 났다. 또 재미없기 시작했다. ‘이런 세계였구나’, ‘이런 말이었구나’, ‘이런 생각도 있구나’ 읽기만 하면 항상 빨려 들어가기 십상이었던 책이 최근 다시 재미없기 시작했다. 500페이지짜리 책을 읽고 있어서 그런가. 잠시 다른 책으로 머리를 환기하려 하지만 지금 내 손은 그 어떤 종이 한 장도 무겁다. ‘하, 재미없어.’ 어쩌다

정리

2025-03-01T02:08:35Z

사진을 뗐다. 책은 챙겼고, 생필품은 동료들에게 나눠줬다. 텀블러는 하나면 충분했다. 널브러진 옷들을 하나둘 개어 놓고, 나뒹구는 서류들을 하나둘 파쇄하니 이곳저곳에서 너도나도 우려의 목소리를 붙여댔다. 무엇이 걱정거리인지 알면서도 이것이 나를 지키는 행동이라 생각했다. 과감해야 했다. 버리는 데에는 감히 과감해야 한다. 움켜쥐고자 할수록 자유롭기 어려우니

취미

2025-02-21T23:47:04Z

나는 농구를 참 좋아한다. 시간이 나면 시간이 나는 대로, 날씨가 좋으면 날씨가 좋은 대로, 일에 쫓기면 일에 쫓기는 대로 일부러 농구를 하곤 한다. 두 번이나 발목에 칼을 댔어도 나는 여전히 농구를 즐기고 있다. 무릎과 발목에 점차 무리가 오지만, 함께 웃으며 서로를 응원하고 너도나도 땀에 젖으며 뛰는 순간이 지금도 언제나 즐겁다. 나는 기타 치는 걸 좋

기침

2025-02-15T00:44:20Z

“콜록콜록.” 2주가 넘도록 기침이 멎질 않는다. 열 기운이 올라오진 않는데, 처방받은 약도 꾸준히 먹었는데, 목이 계속 간지러운 것이 기침이 도통 멎질 않는다. “툭, 툭.” 평소 목을 많이 쓰는 편이긴 하지만 가래를 앓으며 살아온 적은 없었는데 기침만 하면 이상하게도 끈적한 가래가 툭 툭 떨어진다. ‘그냥 지나갈 목감기겠지.’ ‘피곤이 쌓여서 그런 거겠

거짓말

2025-02-08T14:52:46Z

오늘 또 거짓말을 했다. 부당함을 겪고 있는 아이들이 아주 쓰러지는 것만큼은 어떻게든 막고 싶어 그럴싸한 거짓말로 상황을 포장했다. 무엇이 옳은 것인지 무엇이 참된 것인지 알지 못해 속이 곪고 있는 아이들에게 무책임한 거짓말로 또 순간의 상황을 무마했다. 힘을 잃지 않을 수 있게 꺼낸 말이 거짓말이라니, 이렇게 무책임한 어른이 또 있을까. 힘이 없어 아무것

숫자

2025-02-01T06:05:46Z

“파악해 봐.” 빈 문서에 숫자가 빠르게 올라간다. 글자 역시 셈하여 나온 통계 양옆으로 날카롭게 정렬한다. 금세 숫자와 글자로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상황 보고서가 나왔다. 나는 가만히 출력된 보고서를 보았다. 보고 또 봤다. 숫자가 보였고, 글자가 보였다. 하얀 종이 위에 숫자와 글자가 이토록 뚜렷하고 분명한데, 어째서 내 눈엔 잘 들어오지 않는 걸까. 한

고요한 선, 매력적인 악 - 당신의 빛이 빛나는 이 밤

2025-01-31T01:11:57Z

괜히 좀 걸었습니다. 가까운 커피집을 두고 괜히 좀 걷고 싶어 먼 커피집으로 발을 돌렸습니다. 딱히 다른 커피를 마시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딱히 다른 분위기를 만들고 싶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냥 좀 걷고 싶었습니다. 겨울 찬 바람에 신선함을 느끼고 싶었고, 내리쬐는 햇빛에 따사로움을 느끼고 싶었고, 여전히 우직한 나무에게서 초록을 느끼고 싶었고,

빛

2025-01-30T07:27:21Z

많이 피곤했을까, 오늘따라 유독 우리 아이의 자는 모습이 신경 쓰인다. 소리 가득 찬 공간이지만 정작 내게 들리는 소리는 없다. 다른 것도 보이지 않는다. 나의 시선은 오직 곤히 자고 있는 우리 아이의 얼굴 위에 머물러 있다. 그러다 문뜩 내 입가에 번진 웃음을 보았다. 나 분명 피곤함에 부서져 있었는데, 나 분명 분주함에 허덕이고 있었는데, 나 분명 막연

삭제

2025-01-17T23:59:30Z

초점이 또 나갔다. 7년째 필름으로 사진을 찍고 있는데 이 허탈한 감정은 도통 익숙해지지 않는다. 이제 좀 필름을 쓴다는 기분이 들면 필름은 언제나 결과물로 내 뒤통수를 세차게 때린다. ‘최근에 카메라를 바꾼 탓일까.’ ‘노출계가 고장 났나.’ ‘마음이 너무 급했었나.’ 셔터를 누를 당시의 내가 본 장면과 전혀 다른 결과물을 봤을 때 마음은 요란하지 않을

색

2025-01-11T03:46:56Z

“하늘 아래 같은 빨간색은 없다.” 색조 화장을 하는 친구들에게서 자주 듣던 말이다. 같은 빨간색 계열이지만 각자 다 다른 발색을 하고 있다나. 내 눈엔 거기서 거기 같아 보이지만, 그 속마음을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눈총을 맞을 게 뻔하다. 생전 색조 화장을 해본 적 없고 앞으로도 할 일이 없는 나는 도통 모를 일이지만, 색조 화장과 친숙한 사람들은 그

청춘

2025-01-04T00:52:01Z

불쑥 찾아온 목감기에 밤잠을 설친 지 며칠째, 아침에 일어나 보니 입술 위에 붉게 포진이 일어났다. 거울을 통해 본 퉁퉁 부어오른 입술이 왜 이리 꼴 보기 싫은지, 갈 길이 먼데 약한 내 몸이 잠시 쉬어가라고 독촉하는 것 같아 속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 이렇게 인생이 힘겨운 것일까. 몸이 말하는 대로 쉬어가면 쉬는 대로 더 뒤처질 것만 같고, 애써 못

눈

2025-01-01T00:46:53Z

눈이 쏟아진다. 온 세상을 새하얗게 물들이려고 하늘에서 눈이 쏟아진다. 커피에 눈 돌린 그사이 새하얀 눈은 숨이 죽은 잎사귀 위에도, 잿빛 건물 위에도, 길가의 모퉁이에도, 사람들의 머리 위에도 사뿐히 내려앉았다. 새하얗게 덮인 세상을 보니 설렘과 함께 감정이 고양되지 않을 수 없었다. 왜인지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 왜인지 희망과 용기를 이

슈퍼맨은 죽지 않아 - 살아. 사는 거야. (2)

2025-01-23T04:27:50Z

“나는 커서 멋진 어른이 될 거야!” “나는 착한 아이가 될래요!” “나는 악당을 무찌르고 모두를 구하는 슈퍼맨이 될 거예요!” 동네 어른들은 아낌없이 웃음을 보내줍니다. 천진난만한 아이들의 선언에 박수도 쳐주고, 머리도 쓰다듬어주고, 기특하다며 떡볶이를 사주기도 합니다. 그때는 매콤한 떡볶이를 먹으며 그렇게 멋진 어른이 되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JACO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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