찔레꽃 로드

2025-05-14T11:27:17Z

국민학교 가는 길엔 먹을 게 천지였다. '천지'라는 말에는 먹거리의 다양함과 풍부함이 묻어나지만, 실상은 그저 먹을 게 있다면 뭐든 '먹어 치웠다'는 절실함이 어울렸다. 아이의 걸음으로 30분이 걸리는 그 거리를 언니와 함께 때론 혼자서 때론 친구와 함께 걸어 등하교했다. 버스비는 자주 불량식품을 사 먹는데 쓰였다. 좀 더 빠른 길을 찾아도 모자랄 판에 나

그 아이는 지금 어디서 울고 있을까 _ 눈 밖의 아이

2025-05-08T09:23:43Z

아이가 울기 시작했다. 차라리 닭똥 같은 눈물을 흘렸다면 그저 마음만 아프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아이는 악을 쓰며 온몸을 버둥거렸다. 마음보단 내 몸이 고된 울음이었다. 떼쓰며 우는 아이를 처음 본 것도 아닌데 어찌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런 때에 미디어의 이미지는 얼마나 강력한지. 아이를 다치지 않게 보호하며 진정시켜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나는 다리까지

축적의 힘에 대하여

2025-04-28T14:17:17Z

나는 매번 나에게 너무 이르게 기회가 찾아왔다고 생각했다. 첫 책을 출간할 때도 얼떨떨한 와중에 정신을 차려보니 내 책이 만들어져 있었다. 이후 영풍문고 입점 그리고 e-book 출간도 마찬가지였다. 꾸준히 글을 써온 노력 덕분에 책이란 물성을 손에 쥐었고 그로 인해 열린 새로운 세상이 그저 신기하기만 했다. 이번에도 비슷했다. 지난해 시립도서관에서 운영

영옥 씨의 롱 스커트

2025-04-22T01:51:27Z

휘적휘적 걷는 맨다리 위로 치마가 감겨왔다. 속치마도 없이 두껍기만 한 치마는 다리에 닿자 까끌거리며 제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건 엄마의 치마였다. 나는 여든이 넘은 엄마의 치마를 물려 입었다. 내 생애에도 엄마의 생애에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엄마는 흐뭇해했고, 나는 옷 자체보다 엄마의 치마를 입은 이 상황이 제법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그 치마를 입을

그리움의 끝, 어쩌면 미래

2025-04-15T06:21:08Z

아주 야심한 시각, 대로에 서본 적이 있는가? 그곳은 언제나 적당한 온도 속에 있었다. 차도 사람도 없는 한적함 속에서, 나는 종종 아주 먼 미래의 세계를 떠올리곤 했다. 아포칼립토 이후의 고요 속에서 나 혼자 살아남은 듯한 착각. 외롭고 쓸쓸해 마음 한구석에 적당한 긴장감이 드리우지만, 동시에 낯선 설렘이 피어난다. 앞으로 의미 있는 일을 할 무한한 시간

덤의 법칙

2025-04-09T12:19:23Z

SNS에서 놀라운 사연을 접했다. 갓 개업한 카페에 들른 손님이 사연자에게 물었단다. "왜 강남에서 오픈하지 않았나요?" 처음 만난 그 손님은 이후 사연자의 카페를 강남에 열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더 나아가 함께 봉사활동을 하자는 제안을 하며, 돈을 벌게 되면 또 다른 사람을 돕길 바란다고 말했다. 자신도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이렇게 성공할 수 있었는데,

가족도 연습이 필요해

2025-04-04T23:07:20Z

이해할 수 없었다. 고작 열 살 무렵의 아이 눈에도 가족의 불합리성이 너무나도 또렷이 보였으니까. 가족이란 이름 아래 잘못한 것에 대한 사과도 없이 스리슬쩍 넘어가는 일. 그건 정말 짜증나는 일이었다. 상대는 이미 상처를 받았는데 그게 아닌척 한다고 없는 일이 되냐고. 그렇지만 나 역시 가족이란 테두리의 수혜자였다. 나 역시 가족들 앞에서 무례하게 행동했고

과학이 모든 것을 설명할 때, 우리는 무엇을 사랑하는가

2025-03-24T21:47:17Z

얼마 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마치 호수 위에 떠 있는 달그림자 같은 걸 쫓아가는 느낌을 받았다”는 말을 들었다. 내 지인이 이 발언을 문제 삼았다. 그 표현이 과학적으로 틀렸다고 했다. 그림자란 빛에 의해 가려질 때 생겨나는 것이다. 그런데 달은 태양에서 온 빛을 반사하기 때문에 그림자가 생길 수 없다고 했다. 이 지적을 한 지인은 과학을 어

쓰지 않은 삶은 어떤 모습일까?

2025-03-24T14:29:33Z

쓰는 삶 6년 차인 나에게 올해 그 답을 찾아볼 기회가 찾아왔다. 글쓰기 모임 날이 다가왔지만, 나는 모임도, 사람도 부담스러웠다. 가야 할 이유는 많았지만, 가고 싶지 않은 마음은 절실했다. 그래서 처음으로 아무 이유 없이 가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한 달에 딱 한 번. 각자 쓴 글을 공유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이 모임에 나는 지난달에도 결석을 했다. 그때는

허리를 굽혀 마음을 낮추다

2025-05-12T10:45:54Z

언제나 입이 방정이다. 지난주 모임에서 한 말이 화근이었을까? “유전적으로 좀 좋은 체질을 물려받은 것 같아요. 그래서 부모님께 감사하고 있어요.” 자고 일어났는데, 허리가 너무 아팠다. 일어서는 것까진 그럭저럭 했지만, 허리를 펴러니 너무 아파서 비명이 악 터져 나왔다. 자세가 엉거주춤해졌음은 당연했다. 그리고 허리를 숙여 머리를 감는데, 허리가 금세라

고통을 베고 누운 밤

2025-05-12T10:40:50Z

오늘 집 앞 한의원에 갔다. 운동을 하던 아이의 근육이 놀라 치료가 필요했다. 물리치료를 받으러 들어간 아이를 기다리며 인증샷이라도 남길까 싶어 한의원 여기저기를 둘러볼 때였다. 직원이 앉은 책상 위에 있는 소화제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 옆엔 한방 파스와 연고도 있었다. 소화제의 가격은 5천 원. 평소 양방보단 한방이 더 체질에 맞다고 생각하는 나였다.

무거운 위로

2025-05-12T10:38:59Z

항상 똑부러지고 강인해 보이던 그녀가 내 앞에서 울고 있다. 금세 그녀의 코가 빨개졌다. 내 아이와도 또래인 그녀의 둘째는 큰 수술을 앞두고 있다. 지금까지 단단히 쌓아 올린 일상과 노력이 부정당한 느낌. 앞으로는 절대 이전의 행복으로 돌아갈 수 없으리란 상실감이 눈물의 이유였다. 그녀는 과거를 더듬어 그때 놓쳐버린 불운의 전조를 찾아내고 어떤 기억은 지금

엄마의 비밀 처방전 - 독감에 걸린 아이

2025-02-17T10:38:42Z

‘내가 너 그럴 줄 알았다!’ 아이의 독감 양성 판정을 받자마자 이 말부터 할 뻔했다. 하지만 지금 이걸 말해봤자 싸우자는 거나 마찬가지니 꿀꺽 삼켜버렸다. 그렇지만 얘도 독감에 걸려도 할 말이 없을 거다. 그렇게 마스크 쓰라고 잔뜩 말해도 안 썼으니까. 자기네 반에 독감 환자가 몇 명이나 있는데 멋 때문에 마스크를 안 쓰는 게 말이 되나? 거기다 옷도

잘 나이 들고 있습니다 - 입꼬리 올리기 운동중 -

2025-03-18T09:26:46Z

“여보, 나 나이 들어 주름 더 생기면 안면거상술 해줘!” “얼만데?” “몰라.” 거실 소파에 앉은 남편이 스마트폰을 뒤적이더니 수술비가 천만 원쯤 한다고 했다. 거기다 전문가들은 권하지 않는 수술이라고. 순간, 나는 바로 포기했다. SNS에서 홍보하는 거상술 효과가 솔깃했지만, 천만 원은 선뜻 감내하기엔 과한 금액이었다. 사실 내 인생에 성형수술은

후일담 - <오늘만 먹었을 뿐입니다> 연재를 마치며

2025-01-09T23:49:24Z

브런치 활동을 제대로 하기 시작한 건 올해 초였다. 작가 승인은 받은 지는 좀 됐지만, 에세이를 좀 열심히 써보자는 마음이 든 게 올해 초라서 그랬다. 새로 시작한 연재의 제목은 고심의 결과도 아니었다. 그저 나이 들수록 과거에 집착하는 걸 경계하고자(곁가지로 들어간 경우는 어쩔 수 없고) 지금의 일상에서 내가 겪는 일들 위주로 적고 싶었다. 1월 21일

보지만 보지 않았다 - 나의 기억과 다른 이야기

2024-08-11T22:43:44Z

외지 생활을 했던 오빠는 집에 올 적마다 친구들을 만나러 나갔다. 나는 그게 조금 서운하고 이해되지 않았다. 지금은 그 마음을 십분 이해한다. 나 또한 친정행이 결정되면 친구들에게 연락부터 넣으니까. 만남 1은 고등학교 동창 K를, 만남 2는 초등학교 때부터 친구인 E과 J를 위한 약속이다. 그 일은 E과 J를 만나던 날에 일어났다. 매번 우리는 이안

디자인 컷 들어가실게요 - 미용실 유랑생활을 끝내며

2024-08-02T04:06:00Z

긴 머리를 한 게 마지막으로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었고 그저 긴 머리를 감당할 수가 없어서였다. 약간의 곱슬기가 있는 내 머리카락은 나의 애절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마치 저가 정신을 가진 생명체이기라도 한 것처럼 고집을 피워댔다. 오죽하면 스스로 오른쪽 옆머리에 귀신이 붙었다고 표현했을까? 그래서 아주 여러 해 전부터 짧은

시어머니가 내 엄마였으면 좋겠다! - 가족의 무거움에 대하여

2024-07-25T06:41:29Z

갑자기 좋은 생각이 나서 아이를 불렀다. "안나야, 할머니 혼자 계시니깐 우리 할머니네서 파자마 파티 할까?" 결혼한 지 올해로 15년이 되었지만, 시댁에서 잠을 잔 적은 한 번도 없다. 시댁이 멀지 않기도 하지만 누구 하나 꼭 시댁에서 자야 한다고 고집하지 않아서였다. 그런데 시아버지의 오랜 여행으로 집이 비어버렸기에 지금이 여자들만을 위한 파티의 적기란

내 사랑은 안녕합니다 - 내 덕질의 안부를 묻다

2024-07-18T05:48:08Z

나에겐 만날 적마다 내 덕심의 안부를 물어주는 친구가 있다. 요즘 내 덕심이 과거와 다른 걸 알고 있기도 하지만 이 친구는 처음 나의 덕질을 알았을 때 가장 긍정적인 반응을 해주기도 했다. 시작하면 2박 3일 거뜬히 그들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는 나를 기쁜 마음으로 받아줄 수 있는 사람도 그 친구가 유일할 수도. 내 대답은 항상 비슷했다. 뭐 여전히 스밍

커피 내리는 청년, 커피 마시는 할머니 - 일하는 젊음을 바라보며

2024-07-16T08:12:20Z

독서회 후 언제나처럼 뒤풀이 장소로 향했다. 점심을 먹고 나면 커피 한잔을 마시며 모임 중 미처 나누지 못한 이야기를 풀어낸다. 우리가 고른 커피숍은 기찻길 옆 대형 카페로 소금커피가 시그니처 메뉴인 곳. 주요한 선택 이유 중 하나는 넓은 주차장이었다. 사람들 생각하는 게 다 거기서 거기인지 카페엔 벌써부터 사람들로 넘쳐나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는 피하고

은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