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디의 추억

2025-05-03T07:35:12Z

옥구천 기슭에 제법 무성하게 자란 뽕나무 두 그루가 있다. 천변 자전거 도로를 따라 시화공단 쪽으로 가다 보면 옥구3교를 지나자마자 보인다. 평소 출퇴근길에는 무슨 나무인지 모른 채 자전거를 타고 휙 지나간다. 그러다 오디가 열리는 오월 말이 되면 비로소 뽕나무라는 것을 알게 된다. 한번 열리기 시작한 오디는 어느새 가지마다 다닥다닥하다. 조그만 알이

스승의 은혜

2025-05-01T19:51:14Z

욕실에서 샤워기를 오른손에 들고 맨발을 씻고 돌아서는데 갑자기 몸이 공중에 붕 떴다. 순간 ‘어?…!’ 하다 바닥에 쿵 하며 떨어지고 말았다. 욕실 바닥에 발이 미끄러지며 크게 넘어지는 일을 당했다. 하마터면 어디가 부러지거나 심한 충격을 받았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윽’ 소리를 내며 누운 몸을 일으켜보니 다행히 왼쪽 팔꿈치에 입은 작은 찰과상 외엔 별

내 인생의 소울 푸드 “갈치조림”

2025-04-30T03:42:53Z

우리 아이가 갓난이였을 때니까 아마도 20년도 더 되었을 이야기이다. 친구가 아이 백일이라고 저녁을 먹자고 토요일 저녁에 집으로 초대했다. 나는 아내와 젖도 안 뗀 아이를 데리고 친구 집으로 갔다. 백일 식사 자리에는 우리 가족뿐만 아니라 친구 직장 동료들도 몇 사람 함께 했다. 식사에 반찬으로 나온 음식이 바로 “갈치조림”이다. 넓지 않은 아파트 거실에

무 맛

2025-04-29T00:03:33Z

어렸을 적에 내가 무척 싫어했던 채소가 있었다. 바로 “무”다. 어머니는 가을에 땅을 파고 묻어두었던 무를 꺼내 겨울 내내 음식들에 넣었다. 청국장, 갈치조림, 고등어조림, 소고기국, 무나물 등등. 고기를 좋아했던 나는 무만 골라내고 음식들을 먹었다. 삶은 무의 물컹한 식감이 느껴질 때면 뱉어내질 못해 억지로 삼키기도 했다. 특히 무나물은 그 맛이 밍밍해서

로드킬

2025-04-28T00:37:37Z

차를 몰고 도로를 달리다보면 동물의 사체를 마닥뜨리곤 한다. 대부분은 죽은 지 오래 되어 그 흔적만 남아 있다. 하지만 차에 치어 얼마 안 된 시체가 갑자기 나타나는 경우도 없지 않다. 그럴 땐 피해가려 핸들을 급히 틀게 된다. 요행히 잘 피해가도 마음이 불편한데 바퀴에 닿은 느낌이라도 들면 그 찝찝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세차장을 찾아 고압분무기라도 쏴

나의 책 이야기, ‘세계 문학 전집’

2025-04-27T07:04:36Z

내 어릴 적에 우리 집 책꽂이에 세계 문학 전집 여러 권이 있었다. 정음사(正音社)에서 출판한 책들이었다. 금색(金色)과 검은색으로 고급스럽게 디자인한 북케이스에 녹색 하드커버로 장정(裝幀)한 책이 들어가 있었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I/II/III』, 지드의 『좁은문/배덕자/법왕청의 지하도/전원교향악』, 카뮈의 『이방인/페스트/전락 외』, 호머의 『

갈등(葛藤) 이야기

2025-04-25T05:26:06Z

갈등이란 말의 의미를 사전에서 검색해보면 이런 설명이 나온다. “칡과 등나무라는 뜻으로, 칡과 등나무가 서로 복잡하게 얽히는 것과 같이 개인이나 집단 사이에 의지나 처지, 이해관계 따위가 달라 서로 적대시하거나 충돌을 일으킴을 이르는 말.” 또 이런 설명도 나온다. “불교 번뇌(煩惱)와 망상(妄想)을 이르는 말.” 나는 갈등이란 말이 언제부터 쓰였을지

서점 주인이 갖춰야할 덕목, ‘총체적 시각’

2025-04-24T04:31:48Z

서점 주인은 책을 읽어야 할까, 읽지 말아야 할까? 물론 팔려는 책이 새 책이라면 읽은 표시가 남고 그 책은 고객에게 새 책이 아니라 중고서적처럼 보일 것이기에 삼가야 할 일이다. 그렇다면 중고서점의 주인은 책을 읽어도 되는 것인가? 이미 누군가의 손때가 묻었다는 전제가 있는 책이니 읽어도 별로 표시가 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서점 주인이 책을 읽은 것은 바

김이 모락모락

2025-04-23T02:18:50Z

식탁 한편에 스킨답서스를 키우고 있다. 멋을 부릴 줄 아는 사람들은 화사한 꽃꽂이로 식탁을 치장하겠지만 우리 집 식탁에는 일년 내내 녹색 공기 정화 식물이 놓여있을 뿐이다. 요즘 들어 스킨답서스를 보며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식탁에는 빛도 통하지 않고 식물이 살아가기에 그다지 좋은 환경 같지 않은데 스킨답서스가 너무나 푸르게 잘 자란다는 것이다. 베란

눈물

2025-04-27T08:12:37Z

간밤에 비가 내린다는 예보가 있었다. 그런데 아침에 보니 비는 이미 다 내려 습기로 축축하기만 하다. 딸아이를 차에 태우고 출근하는데 신호등에 걸렸다. 브레이크를 밟자 앞 유리창으로 물방울 두 개가 주르르 흘러내린다. “아빠, 차가 눈물을 흘려.” 와이퍼를 작동시켜 물방울을 훔쳤다. “아빠가 눈물을 닦아주네.” 딸아이는 학교를 졸업하고 취업을 못해 전전

‘퍼펙트 데이즈’인 이유 - 영화 〈퍼펙트 데이즈〉감상문

2025-04-23T01:13:18Z

영화를 보는 내내 ‘퍼펙트’란 말을 염두에 두었다. 그런데 주인공인 히라야마의 삶뿐만 아니라 주위 사람들의 삶은 전혀 퍼펙트하지 않았다. 히라야마에게는 숨겨진 과거의 아픔이 있다. 히라야마가 청소 일을 하러 출근하는 차안에서 첫 번째로 나오는 노래가 애니멀스의 ‘The House of the Rising Sun’이다. 무겁게 흐르는 선율을 따라 나오는 가사

계면활성제 단상

2025-04-22T11:28:07Z

물과 기름을 함께 넣고 세게 저어주면 순간 잘 섞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저어주기를 멈추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물과 기름은 분리되고 만다. 두 성분의 성질 차이가 너무 크기 때문에 서로 다름을 억제하던 힘이 사라지면 본래의 성질로 바로 돌아간다. 이런 물과 기름을 별로 힘들이지 않고 뒤섞는 방법이 있다. 계면활성제를 소량 넣어주면 된다. 계면활성제는 유

철새와 인간

2025-04-22T08:50:12Z

소한(小寒)의 매서운 추위에도 맑은 물이 졸졸 흐르는 옥구천에 날이 밝아 왔다. 흰뺨검둥오리 두 마리가 잎이 다 떨어져 버린 버드나무 그림자가 아른거리는 물가에서 유영하고 있었다. 오리의 꼬리와 몸통은 끝 선이 하얀 검은 갈색 깃털로 덮여 있고 가슴에서 목으로 갈수록 하얀 우모(羽毛)가 늘어난다. 목과 뺨은 흰색이 주를 이루고 짙은 갈색 눈썹 선이 검은 부

매들린 밀러의 『키르케』를 읽고

2025-04-17T01:24:40Z

‘나는 평생 전진한 끝에 지금 이 자리에 왔다. 인간의 목소리를 가졌으니, 그 나머지까지 가져보자. 나는 찰랑거리는 사발에 입술을 대고 마신다.’ 약사발을 들이킨 키르케는 깊은 잠에 빠진다. 눈을 떠보니 그녀 옆에 외할아버지 헬리오스의 정기를 이어받아 햇살처럼 환하고 강력한 V.와 F.가 잠들어 있다. 그리고 텔레마코스가 환생한 그녀의 시네 쿼 논 너새니

델리아 오언스의 『가재가 노래하는 곳』 만들기

2025-04-16T02:33:35Z

2017년 12월 어느 날, 뉴욕에 있는 퍼트넘 출판사의 타라 싱 칼슨 편집장은 책상 위에 놓인 두툼한 원고 뭉치를 바라보았다. 그 원고는 ‘가재가 노래하는 곳’이라는 다소 특이한 제목의 소설이었다. 작가는 델리아 오언스였다. 델리아는 전남편인 마크 오언스와 함께 아프리카에서 야생동물을 관찰하며 겪은 실화를 바탕으로 세 권의 책을 출간한 이력이 있었다.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을 읽고

2025-04-16T08:03:22Z

에밀 아자르의 소설 『자기 앞의 생』의 끝부분에서 모모는 “하밀 할아버지가 노망이 들기 전에 한 말이 맞는 것 같다. 사람은 사랑할 사람 없이는 살 수 없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소설은 “사랑해야 한다.”라는 말로 마무리된다. 모모와 로자 아줌마의 가슴 아픈 사랑 이야기를 읽고 나니, ‘나도 사랑을 해야겠다’라는 마음이 들며 감정이 북받쳤다. 그 감정이

회화나무 꽃과 박완서와 엔트로피

2025-04-14T02:05:10Z

암녹색의 잎이 무성한 회화나무 우듬지에 작은 나비들이 다닥다닥 모인 듯 연노랑 꽃이 피어 있다. 실바람에 살랑거리며 산들바람을 맞아 한 꽃잎, 두 꽃잎이 날아오른다. 뜨거운 햇살을 견디지 못하고 이카로스처럼 추락하기 시작한다. 어둑한 나무 그늘에 소리 없이 내리는 눈처럼 꽃 무더기가 소복하게 쌓여간다. 꽃 무더기의 환한 빛이 더해갈수록 여름은 더욱 농익는다

Let it go

2025-04-15T06:25:43Z

영화를 보려고 채널을 돌리던 중, 마침 〈인디아나 존스 3, 최후의 성전〉의 하이라이트 장면이 방영되고 있다. 성배가 바닥에 뒹굴고 땅이 갈라진다. 낭떠러지로 추락하려는 여자의 한쪽 손을 존스 박사(해리슨 포드)가 가까스로 붙잡는다. 여자의 다른 손끝에는 절벽 턱에 걸린 성배가 닿을 듯하다. 여자는 성배를 붙잡으려다 존스 박사의 손을 놓치고 끝을 알 수 없

건망증

2025-04-12T00:30:40Z

“여보세요? 엄마, 택배 받으셨어요? 배추김치와 열무김치를 주문해서 보냈는데요. … 아직 못 받으셨다고요? 아마 오늘 도착할 거예요. … 왜 보냈냐고요? 매일 묵은지만 드시지 말고, 밥 잘 챙겨 드시라고 보냈어요. 엄마도 이제 여든다섯이시잖아요. 이제 좀 편하게 사세요. … 예, 받으시면 잘 받았다고 전화해 주세요. 그럼 끊을게요.” 주현은 시골에 홀로 사

파김치를 담그다!

2025-04-21T09:44:29Z

아침에 밭에 나가 기다랗게 새파란 쪽파를 뽑았다. 쪽파는 옹기종기 줄지어 밭이랑을 따라 한두 뿌리에서 대여섯 뿌리씩 모여 내 손 크기 정도로 자랐다. 마침 김치를 담가 먹기 좋을 정도였다. 줄기의 땅 위 부분을 바짝 잡아 살며시 들어 올렸다. 하얀 실뿌리에 보드라운 잿빛 흙더미가 엉겨 있었다. 흙더미를 탈탈 털어서 소쿠리에 담으니 수북이 했다. 봄기운 담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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