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흘러야 이해하는 자리 - 연꽃 같은 나의 어머니

2025-03-15T12:14:39Z

세월이 흘러야만 비로소 이해하게 되는 입장과 마음이 있어 때로 애석하다.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친정어머니의 괴로움과 서글픔이 그제야 내 것처럼 여겨졌다. 시아버지의 고집과 호통에 뒤돌아 눈물을 닦으면서는 내 어머니의 시집살이를 떠올렸다. 사춘기 자녀들이 끝없이 실망스럽고 속을 태우게 할 때면 작은 몸집에 야무진 얼굴을 한 어머니의 한숨이 생각났다. 어려움을

마음에도 핀 봄꽃 - 세줄일기 39

2025-03-15T02:22:13Z

아파트 현관을 나서니 물결처럼 밀려와 뺨에 닿는 것이 온풍이다. 두껍게 신었던 스타킹 대신 발목 양말을 신었다. 긴팔 외투 대신 조끼를 입었고. 몇 번이나 의심하던 봄이 진짜로 온 것 같아 봄볕 아래 걸으며 피식 웃었다. 카페 앞 네모난 시멘트 화단에 작은 분홍 꽃 무리가 개나리 같은 꽃잎을 네 장씩 펼치고 있다. 밝고 진한 핑크는 어여쁘게도 빛을 낸다.

어머니 평전 - 친정엄마 인터뷰

2025-03-13T14:33:47Z

1952년 겨울, P는 전남 진도군 의신면 옥대리에서 박0주와 김0덕의 외동딸로 태어났다. 5남 1녀의 둘째인 P는 유독 허약하고 배앓이가 잦아 아버지가 업어서 학교를 보냈다. 병치레가 길었던 그녀는 키가 작고 비쩍 말랐다. 결혼 후 아이를 낳고서 배앓이가 없어지고 오히려 건강해졌다. 당시 여아를 고등학교까지 보낸 것을 두고 동네사람들은 흉을 보았다. 아

멀리 보기 - 세줄일기 38

2025-03-12T22:54:38Z

답답함이 밀려올 때면 차를 몰고 경주 바다로 향한다. 내가 주로 가던 곳은 주상절리 멋진 풍경을 간직한 양남 파도소리길. 해안 산책로의 매력과 푸른 바다를 낀 카페 때문이다. 40분 넘게 운전해 그곳까지 갔었다. 최근, 집에서 20분 거리 고운 모래 해수욕장 근처에 대형 카페가 들어섰다. 5층 건물 전체를 사용하는 이 카페는, 차도를 건너 언덕배기에 자

점검 한 번 - 세줄일기 37

2025-02-27T18:38:19Z

선물로 받았던 홍시 여섯 개. 네 개는 익자마자 부지런히 해치웠다. 금세 익었으니까. 식탁 위에 남은 홍시 두 개는 며칠 동안 두고 기다려도 변할 기미 없다. 부엌 한편에 빨간 화분처럼 두었다. 눈길에서 벗어나자 존재는 잊혔다. 옆지기가 그 사실을 말해주기 전까지. 검붉은 빛에 뭉개진 듯한 홍시 껍질을 보자 의심이 생겼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칼을 들어

결국은 가족 - 세줄일기 36

2025-02-27T18:39:14Z

작년 3월, 같은 장소로 큰어머니 장례식에 참석한 기억이 났다. 이번에는 큰아버지 소식이다. 남편은 검은 넥타이를 매고 운전대를 잡았다. 세 시간 반 운전 끝에 도착한 순천 장례식장. 점심을 먹으며 상주인 장남과 마주 앉았다. "아버지는 초등학교 4학년까지 마쳤지만 참 똑똑한 분이셨어." "아버지는 23년간 파킨슨을 앓으셨지만 건강관리를 철저히 잘하

겨울밤 별빛 산책 - 세줄일기 35

2025-02-24T02:41:19Z

다쳤던 그의 발목이 괜찮아지면서 야간 산책을 다시 시작했다. 아파트 신호등을 건너 고풍스러운 불리단 길을 지나고, 불국사 주차장을 넘어 불국사 동산까지. 불국동산 고목 사이로 가로등이 은은하게 빛난다. 나무들 사이를 빙 둘러가며 구불구불하게 놓인 시멘트 산책로를 따라 걷는다. 넓은 길을 몇 바퀴 경쾌하게 돌고, 다시 그 길을 따라 내려오는 데 한 시간은

즐거운 날이 오리니 - 세줄일기 34

2025-02-21T03:46:39Z

쌍둥이 엄마가 작은 종이가방을 건넸다. "현이가 직접 만들었어요." 투명 비닐에 하나씩 포장한 두툼한 쿠키가 가지런히 자리하고 앉았다. 어떤 접시와 어울릴까. 진열장을 열어 도트 무늬가 있는 정사각형 푸른 접시를 꺼냈다. 쿠키 네 개를 펼쳐 식탁 위로 올렸다. 초점을 맞춰 사진을 찍었다. 밝기를 조정해서 현이 엄마에게 사진과 함께 메시지를 전달했다.

겨울과 봄 사이 - 세줄일기 33

2025-02-19T12:33:45Z

우양미술관 맞은편 후미진 골목에 차를 멈췄다. 주말 오후라 보문호수 주변은 자동차로 가득이다. 장갑을 끼고 털모자를 눌러썼다. 무릎까지 덮는 오리털 파카 덕분에 찬바람도 괜찮을 것 같다.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자 찬 공기가 콧속 깊숙이 훅 들어왔다. 오랜만에 호수 한 바퀴를 돌 생각에 한숨이 먼저 나온다. 한 시간 반, 힘차게 걸어보자. 호수 입구

초대 밥상 - 세줄일기 32

2025-02-26T02:29:19Z

아침부터 그녀가 건네준 반찬들을 데우고 볶고 끓였다. 김치통까지 안겨주며 웃음 가득한 목소리로 배웅하던 그녀가 떠오른다. 한 숟가락 떠먹은 가자미식해. 달고 시고 짭조름한 오묘한 맛에 잠이 확 달아났다. 어제저녁, 유쾌한 두 시간을 떠올리니 마치 관광여행을 다녀온 듯하다. '오 씨' 집성촌 한가운데에 2층 전원주택을 짓고 텃밭을 가꾸며 사는 60대

선택은 언제나 어려워 - 세줄일기 31

2025-02-17T13:19:41Z

‘청송 사과 한 박스에 2만 9천 원.’ ‘딸기 한 바구니에 9천9백 원.’ 마트 입구에는 오픈 행사 안내지가 바람에 나부낀다. 울산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 새로운 식자재 마트가 눈에 띄었다. 주차장이 넓은 걸 보니 규모가 꽤 커 보인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사과와 딸기. 사과는 박스별로 가격이 달랐고, 10kg짜리 2만 9천 원짜리는

좋게 만드는 말 - 세줄일기 30

2025-03-13T00:37:03Z

딸아이 운전사로 요청받아 부산에 들렀다. 겉으로는 싫은 척하지만 바다를 볼 수 있다는 기쁨에 쾌재를 부른다. 2호선 중동역에 아이를 내려주고 각자의 스케줄을 시작한다. 3년 동안 시민으로 살아 익숙한 해운대 도로. 먼저 해운대 바닷가에 들렀다가 미포 끝으로 운전대를 향한다. 미포 작은 항구 앞에는 아침에 잡은 생선을 빨간 대형 대야에 담아 파는 아낙들

마음 - 세줄일기 29

2025-02-15T16:19:20Z

찻물 끓인 유리 주전자를 잘못 잡았는지 오른손 검지 손톱 아래 마디가 붉게 부풀었다. 차를 마시다가 일어나 수도꼭지를 틀고 차가운 물줄기에 열을 식혔다. 얼얼한 손에 묻은 물기를 털고 다시 식탁의자에 앉았다. 화장을 하다가 오른손이 쓰리고 찌릿거렸다. 글을 쓰다가는 검지에 신경이 쓰였다. 바쁘거나 집중해 무언가 할 때 아니고는 마음이 아픈 쪽으로 쏠렸다.

과거의 나와 헤어지는 중입니다 - 잘 헤어진 이별

2025-01-10T12:18:03Z

이별은 어렵고 불편한 일이다. 익숙하던 관계나 연결된 고리를 끊어내는 것이다. 때로 헤어지는 일은 슬픔과 아픔을 동반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우리는 성장하고 변화한다. 인생에서 이별은 다양하다. 사람과 헤어지기도 하고, 일 또는 세월과도 이별한다. 나의 이별은 삶에서 불필요한 것들을 제거하면서 헤어지는 것이다. 이런 이별은 오히려 과감할수록 좋다. 잘 헤어질

나다울 때 가장 멋진 내가 된다 - 인생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

2024-11-20T04:02:44Z

푸근한 햇살 좋은 가을날 북촌에 갔다가 외국인들 한복 입은 모습이 예뻐 한참을 쳐다보았다. 가족 여행을 간 전주 한옥마을 거리에서도 한복 물결이 가득했다. 한복을 입지 않은 내가 더 어색했다. 나도 한 번 대여할까 싶을 정도로 한복은 매력 있어 보였다. 기와를 얹은 한옥 카페는 북적이고, 전통찻집에는 대추차와 쌍화차가 인기 많았다. 한국적인 곳을 여행 다니

선물을 사면서 기쁨도 산다 - 호주 여행 마무리

2025-03-13T03:58:08Z

호주로 출발하면서 지인들을 위해 한국스러움이 담긴 선물을 준비했다. 빨간 매화가 그려진 접는 부채, 캘리그래피로 한글을 돋보이게 하는 책갈피 그리고 홍삼과 홍삼 젤리였다. 아들의 외국인 친구들에게 부채와 책갈피를 선물했고, 한국 지인들에게는 홍삼 젤리 두 봉지를 펼쳐 포틀럭 파티 테이블 위에 놓았다. 사오십 대 부인들은 홍삼 젤리가 반가워 작은 괴성을 질

해운대와 송정을 닮은 본다이비치 - 둘이서 호주 여행

2025-03-13T04:18:55Z

호주는 해변도 예쁘구나! 380번 버스 창밖에는 푸른 바다가 하얀 건물 사이사이로 파란 띠로 이어진다. 창에 얼굴을 가까이 붙인 채 해안선 따라 넘실거리는 물결과 수평선에 시선을 고정했다.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다는 이 해변을 다 걸어볼 셈으로 본다이 비치 입구 쪽 정거장에 일부러 내렸다. 수영복, 조리, 튜브가 정거장 바로 건너편 가게 앞에 빨래처럼

블루 한 블루마운틴 - 셋이서 호주 여행

2024-12-01T07:17:10Z

ㅡ“I'm all over it!" 아들은 눈을 크게 뜨면서 ‘끝났어. 내가 알아서 해.’라며 무례한 호주인에게 답한다. 감기가 나았는데도 기침이 나왔나 보다. 아들이 팔을 들어 입을 가리며 기침을 몇 차례 했는데, 두 칸 앞에 혼자 앉은 남성이 기침할 때마다 고개를 돌려 쏘아본다. 남자는 좌석을 옮겨 더 멀리 떨어져 앉았다. 다시 한번 기침을 하자, 옮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보여주고 싶은 것 - 셋이서 호주 여행 (오페라하우스)

2024-09-09T15:13:26Z

오페라 하우스에 불빛이 켜지고 하늘은 점점 어두워지는데 기다리는 아들이 안 온다. 시드니 시내에서 친구들과 저녁 식사 후 오페라하우스 공연장 앞에서 만나기로 한 약속이다. 거의 도착했다는 전화를 끊고 나니, 멀리 젊은 무리가 뛰어온다. "안녕하세요. 아버지, 어머니!" 시드니 대학에 다니는 아이들, 워킹홀리데이로 호주에 온 아이들이 인사하며 우리 부부

그레이트 오션로드, 그레잇! - 둘이서 호주 여행

2025-03-18T09:42:31Z

새벽 다섯 시 반, 어제저녁 마트에서 사 둔 현지 청정우를 굽는다. 종일 움직일 여행을 위해 아침부터 든든히 배를 채운다. 여행도 밥심이다. 특히나 해외로 여행할 때면 기회 닿는 대로 음식을 먹어 에너지를 비축하게 된다. 객사를 두려워하는 생존 본능인가. 햇반을 데우는 동안 노릇하게 고기를 구워 샐러드와 한 접시에 담는다. 캐리어에 담아 온 작은 김치 팩도

Jina가다